(공포) 김할아버지
김 할아버지는 참 특이한 사람이다. 특이함이란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보통은 외형적이나 성격적으로 특이하다고 정의를 내리지만 김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특이함’ 은 조금 달랐다.
김 할아버지는 폐지를 줍고 다닌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폐지 줍는 사람들이라면 남김없이 모조리 주워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 할아버지는 소량의 폐지.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쌓여진 폐지들 중에서도 몇 개만 골라내 가져가곤 했다.
이걸 알아낸 것도 참 우연찮은 일이었다. 휴강인 날 집에 일찍 들어가기도 뭐 해서 편의점에 김밥을 먹고 있는 와중에 김 할아버지를 본 날이 있었다.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그날 본 김 할아버지는 폐지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마치 물건을 고르는 듯이 이것저것 고르고 있었다.
이상했다. 한편으론 신기했다. 왜 저러는 걸까?왜 모두 가져가지 않는 걸까. 수많은 의구심 속에서 김 할아버지의 행동을 가만히 볼 때.
“저 할아버지 특이하죠?”
자주 가는 편의점의 알바생이 그렇게 말했다. 단골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상태인지라 내게 말을 건넸는지 몰랐다.
“아, 네. 그러네요.”
“저 할아버지요. 항상 저렇게 폐지를 골라 가져가세요. 다른 곳에서도 그러실걸요?”
“음.. 꽤 오래 보셨나 봐요?”
내 말에 알바생은 고개를 살짝 흔들거리고는 말했다.
“아뇨.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한 4개월?”
“4개월 동안..”
“정 궁금하시면 가서 물어보세요. 혹시 알아요. 답해줄지?”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로 돌아가는 알바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말 그래버릴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내 단순한 호기심이고 김 할아버지도 그냥 별 다른 이유 없이 그랬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 사실 난 김 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그냥 김 씨가 흔하고 많으니까 김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 뿐이다.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 할아버지, 박 할아버지. 아니면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
이른 아침. 수업을 듣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날은 생각외로 일찍 일하시는 김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폐지를 고르시는 김 할아버지의 모습. 오늘은 생각보다 그 거리가 가까웠기에 김 할아버지의 행동과 표정을 볼 수 있었다.
“....”
무언가 몰두 한 듯 심각한 얼굴로 폐지를 들춰내는 김 할아버지. 뭐길래 저렇게까지 하는걸까.가만히 김 할아버지의 생김새를 살펴보다 문득 머리를 덮고 있는 모자를 볼 수 있었다. 참전유공자신가.. 모자 가운데에 그려진 무궁화가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그 아래에 박힌 문구는 김 할아버지가 나처럼 평범한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으론 씁쓸했다. 나라를 위해 몸 하나를 바쳤는데 폐지를 주워야하는 현실이라니. 그 이상 보는 게 마음이 무거워질거 같아 시선을 돌릴 때.
“자네.”
약간 나이들어 보이는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손수레를 이끌고 있는 김 할아버지가 눈 앞에 서있는게 보였다.
“어.. 안녕하세요.”
왜 그렇게 인사했는지 모르겠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인걸까.
“궁금한가?”
눈을 껌뻑이며 내게 묻는 김 할아버지. 이제 보니 김 할아버지는 눈이 조금 불편한 상태였다. 백내장이 왔는지 한쪽의 안구가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수술을 받을 돈이 없는건가.자식들은 있는건가.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을 때쯤.
[잠시 후 00번 버스가 도착합니다.]
라는 방송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난 할아버지에게 적당한 말로 둘러대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김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말 없이 바라볼 뿐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
다음 날. 학교를 일찍 마치고서 매번 그렇듯 들리는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기니 웬일인지 편의점 사장이 직접 가게를 보고 있었다.
“어? 사장님이 여긴 왜 계세요?”
편의점엔 단골 손님인지라 사장님과는 조금 안면이 있는 상태다. 가끔 가게에서 마주치면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곤 했었는데 요즘은 서로의 시간이 달라 그게 어려웠었다.
“어? 오랜만이네.”
반가운 마음에 사장님에게 다가가 커피를 사달라고 하니 무거운 얼굴로 한숨을 쉰 사장님은 말 없이 커피를 두 개 들고서는 내게 말했다.
“얘기 좀 하자.”
“..예?”
분위기가 좋지 않다. 한 번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혹시 내가 뭐라도 잘못한걸까.걸음을 옮기는 순간에 잠시나마 기억을 되새겨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조심스레 운을 떼자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사장님이 세상이 꺼질 듯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알바생 있잖아. 상훈이.”
알바생 이름이 상훈이었구나.
“아, 예.”
“그 친구 자살했댄다.”
“예에?!”
그건 꽤나 큰 충격이었다. 본 시간은 길지 않지만 상훈이라는 알바생은 자살을 쉽게 할 정도로 우울하고 어두운 성격이 아니었다. 혹시 남 모를 병을 앓고 있었던건가?
“그 알바생..그렇게 목숨을 끊을 정도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내 말에 사장님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하. 갑갑하다. 그래도 그 놈이 남이긴 해도 나랑은 인연이 있던 놈인데 그렇게 되니..”
씁쓸한 듯 이내 담배를 무는 사장님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지나갈 무렵. 드륵.드르르륵.수레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 할아버지가 끄는 손수레라는 것을 말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사장님은 김 할아버지와 안면이 있는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무표정하게 인사를 받은 김 할아버지는 나와 사장님 너머로 편의점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그 친구..”
그 말에 사장님은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갔구만?”
그 말에 우린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알바생이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하직했다는 것인지 분명히 말하진 않았지만 난 어렴풋이 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르신.. 이제 눈 좀 고치셔야죠.”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사장님이 그리 말하자 김 할아버지는 말 없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그 놈..내 말을 그렇게 안 듣더니만.. 쯧쯧.”
그 말에 나와 사장님은 말 없이 김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어서 김 할아버지에게 자초지정을 듣고 싶었지만 노인들이 흔히들 하는 혼잣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괜히 마음을 쓰고 싶진 않았다.
머지 않아 편의점엔 다른 알바생으로 교체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편의점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김 할아버지가 수레를 이끌고 오는게 보였다. 김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박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박스를 쉽게 고르지 못하고 있던 김 할아버지는 뭔가 잘못됐다는 듯 한참을 주위를 둘러보며 서성거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김 할아버지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음.”
그렇게 10분정도가 지났을까. 편의점 옆 오피스텔에서 박스 더미를 들고 내려온 한 젊은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여자는 늘 그렇듯이 박스 버리는 장소에 아무렇게나 내려 놓고는 걸어가버렸다.
그제야 김 할아버지는 여자가 버린 박스를 이리저리 들춰내더니 곧 서너개의 박스를 수레에 싣고는 이동하기 시작했다.
“흐음.”
김 할아버지는 참으로 특이한 분이다. 어째서 일부 박스만을 가져가는 것일까.
***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서 하루 일과처럼 편의점으로 걸어가려는 찰나 도로가 통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편의점 바로 옆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경찰관들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글쎄 멀쩡하던 아가씨였단 말이야.”
“근데 왜 그랬대?”
“나야 모르지. 죽은 사람의 심정을 내가 알 수 있나.”
아가씨와 죽은 사람이라는 단어는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충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앞에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는 아주머니들에게 대강 얘기를 들어보니 어제 우연히 보았던 젊은 여자가 간밤에 자살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참 흉흉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는 아주머니들. 그와 동시에 수레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르륵.드륵.언제나 같은 소리였지만 지금 순간에는 뭔가 꺼림칙한 소리로 내 오감을 자극했다. 소리가 난 곳엔 어김없이 김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곧 내 시선을 느낀 김 할아버지는 소리없이 입을 열었다.
‘갔어?’
라고 말이다.
한번은 우연, 운이라고 치자. 하지만 두 번부터는 우연이 아니게 된다. 김 할아버지는 젊은 여자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걸까. 드르륵. 지면을 차고 굴러가는 수레 바퀴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할아버지. 잠깐.. 잠깐만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던 것 같다. 허나 김 할아버지는 쉽사리 멈출 생각이 없는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점차 멀어지는 김 할아버지에게 서둘러 이동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거리는 도무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홀린건가.. 대체?”
조금만 걸어가면 김 할아버지에게 닿을 것만 같은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30분정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신랑이를 한 끝에 가까스로 김 할아버지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
김 할아버지는 내가 왔음에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박스를 고르는 일 말이다.
“이번에도 누가 죽나요?”
내 말에 김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세상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박스 이곳저곳을 면밀히 살피던 김 할아버지는 마침내 어느 하나를 발견한 듯 수레에 조심스럽게 실고서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
“....”
“운명을 믿는가?”
“예?”
운명? 나는 태어나 그런 단어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뿐더러 믿지 않는 주의다. 누구나가 정해진 운명에 살아간다면 아무리 노력하고 별짓을 다해도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그야말로 허망한 삶이 아닐까.
“아뇨. 안믿어요.”
내가 믿는 소신대로 답하자 김 할아버지는 ‘그렇구만.’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되려 답답해진 것은 나였다. 분명 김 할아버지는 뭔갈 알고 있는게 분명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사람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대체 왜? 어떻게? 어째서?
“할아버지 잠깐만요! 물어볼게 있어요.”
허나 김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현상으로 거리가 점차 멀어지려는 찰나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재빨리 발을 놀려 김 할아버지 옆에 설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김 할아버지에게 연유를 묻자 김 할아버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어차피 정해진 운명에 살게 되있어. 그 청년도. 그 아가씨도. 저 아줌마도. 저 아저씨도.”
“좋아요. 좋아. 할아버지 말이 맞다고 쳐요. 근데 제가 이해가 안되는건 어떻게 그 운명을 알고 계시냐는 거에요. 어떻게 미리 알 수가 있는거죠?”
내 말에 김 할아버지는 한쪽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어찌하여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죽기전 할아버지가 그들과 연관이 있던 물품.. 박스들을 가져가셨잖아요. 그게 사인 아니었어요?”
“..글세?”
그렇게 말하며 점차 거리를 벌리는 김 할아버지에게 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얘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정말 운명이란건 정해져 있는걸까. 할아버지는 정말 단순히 우연으로 그들의 물건을 가져가는 것일까. 할아버지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작은 혼란이 점차 커져 머릿속을 강하게 헤집는 것 같다. 마지막 할아버지가 박스를 주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사람이 죽는다면 할아버지의 말이 맞는 셈이다.
***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마지막 박스를 주웠던 곳 근처에서 또 한 명의 자살자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수군거렸다. 저주가 걸렸다고 말이다. 마을 내에 좋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니 다들 그렇게 믿는 눈치였다.
현장을 통제하고 정리를 하는 경찰들을 보며 내 머리와 마음은 더욱 복잡해져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럼 혹시 김 할아버지는 내 운명도 알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언제 죽는지 알게 된다면 당장 해도 될 뻘짓을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생이란 참 고달프고 힘들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며 얻어내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야말로 허무한일이 없을거다. 김 할아버지를 찾아야겠다. 찾아내서 내 운명의 끝을 들어봐야겠다.
“갔구만?”
이런 내 절실한 마음이 닿았는지 어느새 다가온 김 할아버지가 내 옆에 서있었다.
“할아버지..?”
허나 오늘은 그 행세가 이상했다. 늘 끌고 다니던 수레도 보이지 않았고 항상 굽어져 있던 허리가 곧게 펴져 있는 상태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할아버지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이제 운명을 믿는가?”
나를 보며 조용히 묻는 할아버지에게 난 부정할 수 없었다. 눈 앞에서 일어난 일들. 죽어나간 사람들이 벌써 셋이다. 이렇게 뚜렷이 증거가 있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예.. 믿어요.”
“그럼 자네의 운명도 궁금하겠구만?”
“....”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말에 오감이 깨어나는 듯 했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되묻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온 김 할아버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할아버지는 분명히.”
그 말에 김 할아버지는 나직이 속삭였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된다네. 다시 한 번 묻지. 정말 자네 눈엔 내가 할아버지로 보이는가?”
“무슨..?”
할아버지는 분명히 수레를 끌고 다니시던 분인데? 하지만 아까의 멀쩡했던 그 모습은 뭐지? 만약 할아버지가 젊은 상태였다면 꽤나..
“?!”
“어떤가?”
활력이 있는 목소리. 그리고 나와 비슷한 체격을 가진 젊은 사람이 나를 보며 서있었다. 정말 이게 가능한 일인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닐까? 분명히 할아버지는.. 수레를 끌고 있는데.
“알겠나?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산다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말이야.”
다시 원래의 모습. 아니, 노인의 모습을 한 ‘무언가’ 는 그렇게 말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자네가 사는 곳. 지금 보고 있는 이곳이 정말 현실일까. 지구일까? 00동일까? 어떤가?”
“아, 아아.”
머리가 아프다. 지독한 두통이 온 몸을 지배하는 것 같다. 눈알이 빠질 듯이 괴로웠다.
“현실은 언제나 잔혹한 법이지. 모든 인간들은 그것을 외면하고 산다네. 운명은 정해져 있는거야.”
“....”
“자네에겐 내 기회를 주겠네. 어쩌겠는가?”
온 몸을 부수는 듯한 격통에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를 향해 내미는 할아버지의 손을 반드시 잡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저 손을 잡아야만.. 내가 처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겠.”
이를 악물고서 간신히 손을 뻗는데 성공했다. 김 할아버지의 손을 강하게 잡으니 몸 안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눈이 감겨진 것 같았다.
***
“할아버지. 오늘도 고생하시네요. 천천히 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내 수레에 무언가를 실어주는 청년을 보니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 고마우이..”
감사 인사를 표하기 위해 입을 열자 목을 타고 나오는 것은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너무 놀라 한 발자국 내딛으려는 순간 무릎과 하체에 전해지는 낯선 감각에 또 한 번 놀랐다. 고개를 숙여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몸과 다리. 그리고 손을 바라보니 잔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생기를 잃은 사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아.”
마지막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운명을 피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이다. 그게 이거였나?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만 내게 처한 운명을 피할 수 있는걸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걸까. 순간 후회가 몰려왔지만 수레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륵. 거기에 맞춰 난 반강제적으로 다리를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머지 않아 전봇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박스 더미가 보였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더미 속에서 백색 빛을 뿜어내는 박스가 눈에 보였다.
난 알 수 있었다. 저 박스의 주인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드륵. 드르륵. 처음부터 알고 있다는 듯 수레의 방향이 거기로 정해졌다.
박스를 향해 움직이는 두 다리가 무겁다. 온 몸에 힘이 이렇게도 없었나. 약해질대로 약해진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 수레의 무게가 현저히 줄어드는게 느껴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젊은 청년 하나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청년의 몸은 온통 연한 빛으로 덮여 있었다. 그 빛은 청년에게 곧 어떤 일이 일어날거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청년을 보니 절로 입이 열렸다.
“자네.. 운명을 믿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