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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녹색도시 part.1

익명
2026-09-24 23:23

***

살아가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

***

2020년 정도 된 것 같다.

오늘이 몇 월인지 며칠인지 인지 하지 못하겠다.

숨이 붙어 있으니까. 고통 속에서 죽기는 싫으니까. 누군가를 죽이기는 싫으니까. 나 자신도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찌들어 살기는 싫으니까.

공허 속에서, 허무 속에서 난 하루하루를 나아가고 있다.

***

어둠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오는 법. 반복된 생활 패턴에 눈꺼풀이 저절로 올라가며 따사로운 햇살이 온 몸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다. 턱 관절이 빠지도록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고오오-

베란다 문을 열자 매서운 강풍이 온 몸을 감싼다. 힘 없이 흩날리는 머리카락들을 대충 넘기며 고개를 살짝 내밀어 밖을 살핀다.

“....”

사람이 산다고 하기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너무나 많다. 베란다 곳곳을 삐져나와 맹렬한 기세로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 이 광경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폐허로 변해버린 아파트, 친환경 컨셉으로 지은 아파트로 생각하고도 남을 법한 광경이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생존자들 모두가 알고 있다. 저것들은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우리 모두가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

아침을 대충 때우고서 밖에 나갈 채비를 한다. 전기나 물, 가스 등이 끊긴지 오래기 때문에 날이 밝았을 때 먹을 만한 것들을 충분히 구비해놔야 한다. 최근 먹을 것이 거의 떨어져 간당간당하기 때문에 조금은 바쁘게 움직여야만 한다.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어 일교차가 꽤 심하다. 적당히 활동하기 좋은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서 굳게 잠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

퀴퀴한. 하지만 식물 특유의 냄새가 가득 메워져 있다. 점점 엄습해오는 불안한 압박감을 이기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앞집 문을 가만히 바라본다.

녹색. 진한 녹색의 뿌리들이 쇠문 사이로 미세하게 삐져나와 있다. 먹혀버린 것이다. 이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부르고 생각하고 있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고서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 문을 연다.

차가운 한기를 온 몸으로 받으며 한쪽에 고이 놓인 도끼를 쥐고 계단을 내려간다. 1층까지 내려가려면 족히 10분 이상은 소요되기 때문에 충분한 몸 풀기로 몸에 열기를 넣어주는 것은 필수다.

저벅. 저벅. 좁은 통로에 울리는 내 발소리를 들으며 내려가니 새삼 엘리베이터의 존재가 한 없이 그리워진다. 다시 고개를 젓는다. 나태한 생각은 나를 사지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계단 덕에 단단해진 하체를 생각하며 내려가니 바로 아래 쪽에서 사람 한 명이 느릿하게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살아 있는 생존자에게. 어쩌면 적이 될수도 있는 적에게 건네는 첫 번째 말이다.

“예.”

30대로 보이는 외소한 체구의 남자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내 옆을 지나친다. 양 손에 들린 도끼와 톱을 슬쩍 보니 녹색의 진득한 액체가 묻어 있다.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허탕을 친건가?

“많이 힘드시겠어요.”

적의가 없는 상대에게는 사족이라도 붙여서 말을 걸려고 한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살아오면서 터득한 처세술이다.

“그렇죠. 뭐. 조심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시간을 지체하기 싫은 눈치 인 것 같다. 이제는 완전히 들리지 않는 남자의 발소리. 성큼성큼 서너 계단을 뛰어 넘듯이 내려간다. 매일. 많게는 수 십번을 이 짓을 왕복하는 것도 점점 지겨워지려한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멈출 수가 없는 환경이 되었기에,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기에 난 멈출 수가 없다.

**

“후..”

실패다. 큰 맘 먹고 문을 딴 첫 번째 집에서 건질 것이 하나도 없다. 뚝. 뚝. 흐르는 진한 녹색 액체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닦고서 힘 없이 꺾여버린 나무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할 뻔한 공격을 머릿속으로 그려낸다.

충분한 이미지 트레이닝과 몸으로 단련 시켜야만 다음 집을 털수가 있다. 남은 나무들이 생존자들보다 많은 세상에서 준비와 대비는 필수다.

“가볼까..”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서서히 말라가려는 나무를 힐끔 보고는 집을 나온다. 곧 문을 단단히 닫고 매직으로 크게 X자를 그려 넣는다. ‘여기엔 없음.’ 혹은 ‘이미 털었음.’ 이라는 생존자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표식을 마치고 이 집 주인과 이웃이었을 문을 가만히 바라본다. X 표시가 아닌 세모 표시가 있다. 저 뜻은 도중에 포기했거나 안의 저항이 너무나 거세어 열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집보다 많은 식량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망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어쩐다..”

꽈악. 손도끼를 강하게 쥐고 생각에 잠긴다. 한 가방을 가득 채울정도의 식량이라면 일이주정도는 너끈히 버틸 수 있다. 그럼 그만큼의 생존도 늘릴 수 있는 것이고 위험을 부담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세모 표시는 다른 쟁쟁한 생존자들도 걸음을 내뺀 곳이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굳게 닫힌 문에 박힌 세모 표시를 바라본다. 한 번 쯤은 상상했었다. 저런 마크가 새겨진 곳에 자신있게 X 자 표시를 남기고 돌아서는 것을. ‘해결사’ 가 되는 상상을.

뚫기 힘든 곳만 골라 X 표시로 바꾸는 사람들을 생존자들은 해결사라고 칭한다. 실제로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뜨고 있는 화제의 인물들이다. 매스컴이 없어도, 각종 수신 장치가 없는 오늘 날에도 말은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 같다.

“후..”

‘해결사’ 라는 타이틀은 분명 구미가 당긴다. 하지만..

쿠웅.

약간의 소리에 몸이 움찔거린다. 안에서 뭔가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격하게 고동쳐가는 심장 울림을 들으며 문을 가만히 바라본다. 세모 표시를 바꾸는 것. 해결사. 나.

“좋아..”

크게 숨을 내쉬고 앞으로 걸어간다. 살면 얼마나 살고. 죽으면 얼마나 있다가 죽겠는가. 현재에 모든 것을 걸고 도전을 해야만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퇴보할 수는 없는 곳. 오직 전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저벅. 저벅.

느리지만 확실하게 발걸음을 떼고 있다.

식목일.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

모종삽과 씨앗. 어린 나무들을 심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땀을 흘린다.

공기가 혼탁해져버린 지금. 나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식물 중 하나다.

***

속죄야.

우리들이 이렇게 더럽혀버렸기 때문이야.

오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정화시키기 위해 나무들이 자라난거야.

미개한 인간으로 살아갈바에 하나의 백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 의미있을지도 몰라.

***

꿀꺽. 마른침을 삼켜내며 문을 열어낸다. 투-웅. 미세한 진동소리와 함께 녹색의 뿌리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망이질치는 심장을 간신히 다스리며 단번에 문을 열어재낀다.

쉬이익-

빠른 속도로 나에게 날아오는 것. 앞에 대비해 두었던 손도끼로 가볍게 쳐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난다. 일단 동태를 살펴야 한다. 마음은 굳게 먹으며 문을 열었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도박을 하기는 싫었기에 조금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

두 개다. 하지만 이건 꽤나 소득이 있다. 말라비틀어진 큰 나무에는 주렁주렁 커다란 열매들이 열리고 있고 그 옆에는 작은 나무가 그것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움찔거리며 뿌리들을 가볍게 움직여대고 있다.

“저거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선이다. 운이 좋다. 열매를 맺고 없어지는 시점에서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다시 도끼를 강하게 쥐고 작은 나무를 바라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

“허억.. 허억.”

꽤나 거센 저항에 시간이 걸렸지만 그만큼의 수확도 있었다. 튼실하게 열린 주먹만한 노랑색 과일 열 개 정도와 아직 유통기한이 널널한 통조림 몇 개를 챙길 수 있었다. 빨리 숨을 고르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선다. 세모로 표시된 곳에 엑스라는 기호로 덮어쓰며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운이 좋았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난 ‘운도 실력이다.’ 라고 생각하는 주의다. 그 결과 이렇게 소득이 좋지 않은가.

“가볼까..”

백팩에 느껴지는 무게감을 만끽하며 한 층 한 층 내려가는 와중에 은은한 과일향이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절로 걸음이 멈춰지고 주위를 살핀다. 지금 이곳은 비상 계단 통로. 이 향이라면.. 누군가 과일을 먹고 있다거나 과일로 만든 향수를 뿌리고 있다는 된다.

식사 시간에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한껏 신경이 날카로워 질 때다. 실제로 많은 생존자들이 식사 시간에 싸우고 죽었다. 그렇지만 이런 좁은 공간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나 약탈을 하려는 심산을 가진 걸수도 있다.

아니면 향수로 생존자들을 유혹하는 봉사자일수도 있다.

난 후자이기를 바랬다. 하루에 세 집을 털어내느라 체력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고 백팩 안에 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목숨이 더 우선이지만 지금 수집한 것들을 모두 털린다면..

“....”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 해가 떨어지고 비가 오면 더 위험하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간다.

조심스레 한 층을 내려가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후자였다. 여기저기 마음대로 자른 단발머리를 하고 여리한 몸매를 갖고 있는 젊어 보이는 여자가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기는 없구나.’

마음 놓고 계단을 내려가니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린 여자는 내게 인사를 했다.

“생각있어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흰색의 피부와 굴곡 있는 라인. 적당한 노출과 색기 있는 얼굴은 뭇 남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아뇨.”

이미 그런 것에 흥미를 잃었다. 생존에 있어서 여자는 불필요한 존재다. 나도 그렇고 마지막 아버지가 건넸던 말이었다. 단호히 고개를 젓고 여자 곁을 지나치자 은은한 과일 향과 성숙된 여인의 향이 후각을 가득 찔러왔다.

“저기, 정말 없어요?”

다시 묻는 여자의 말.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의 시선이 내 백팩에 가있다. 내 소득을 본 것 같다.

“....”

오래 굶주렸는지 입술이 곧 말라비틀어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광대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홀쭉 들어간 배는 여자의 몸이 마른 것이 아니라 정말로 허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필사적이었다. 내 눈에 여자는 그렇게 보였다.

여자를 돕지 말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여자가 아니라 생존자들은 모두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연하게 살아가야 한다. 모두 살아갈 권리가 있고 살고 싶어 한다. 게다가..

‘죽으면 곤란한데.’

난 오래 끌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후에 돌아올 것이다.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고 생존해왔다. 백팩을 풀어 획득한 과일 두 개 정도를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곧 만족한 얼굴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할래요?”

“그런거 안해요.”

내 말에 여자는 의외라는 듯 토끼 눈을 하고서 한 계단 내려오며 물었다.

“그럼 이건 뭐에요?”

손보다 큰 과일을 내밀며 묻는 그녀에게 난 ‘많이 따서 나눠주려고요.’ 라고 말한 후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한 동안 말 없이 나를 보다가 ‘고마워요.’ 라고 말한 후 자리에 앉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구나.’

***

오랜만에 포식을 하며 편하게 소파에 누웠다. 30평의 집. 혼자 살기에는 넓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 세상에서 내게 허락된 유일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거르지 않고 청소를 하고 베란다로 이곳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정찰을 하고, 각종 운동기구로 근력을 키워나간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밤이 되어 있고 세상은 죽을 듯이 고요해지지만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에 은은하게 빛나는 녹색의 불빛들은 활동이 유동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럴 땐 나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만 예상외에 수확을 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생존자들이 꺼려하고 있다.

그동안 생존해오며 목숨을 걸어왔지만 밤에는 그 차원이 다르다. 잠들어 있던 식물들이 천천히 일어나 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아침에는 햇빛을 받기 위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든다.

집에서 자라났다면 그곳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생존자들에게는 큰 시련이다.

사람이었을, 한때는 소중한 가족의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을 없애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생존자로서는 꼭 디뎌야하는 첫 번째 관문이기도 하고 자신이 얼마나 생존할 수 있느냐에 가능성을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겪고 있고 그렇게 살아남고 있다.

휘이잉-

밤공기가 확실히 차가워졌다.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는 은은한 녹색의 불빛들을 잠시 보다가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철저히 한 후 침대에 몸을 뉜다. 그리고 눈을 감고 내일을 대비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나를 향해, 몸뚱어리를 향해 말해준다.

내가 살아가는건지..

살아가는 것이 나인지..

***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야.”

“그래도 전 천국에 가고 싶어요.”

“천국이라고 해서 살기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그럼 지옥은요?”

“지옥이라고 해서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

예상외에 수확 때문인지 일주일 정도를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조절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일주일 동안은 동태를 살피며 늘어지게 잠만 잤던 것 같다. 그리고 적당한 시간을 정해놓고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반복한다. 쉬는 동안 내 몸을 끊임없이 단련해야만 만약을 대비할 수가 있다.

최근들어 예지몽. 그러니까 자각몽에 대해 많이 파고들게 되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유고, 삶에 대한 낙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삶에 하루하루 죄여 오는 녹색 식물들. 일탈이 필요했다. 난 일탈이 절실했다.

“후..”

한숨을 쉬며 자각몽에 관련된 책을 덮는다. 길게는 한 달. 두 달 정도를 꾸준히 반복하고 연습을 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인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자각몽의 시작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수많은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런 꿈들을 내가 직접 컨트롤하고 의식을 할 수 있을까.

책 커버를 잠시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5평은 돼보이는 공간. 수많은 종류의 책들로 즐비하다. 마지막 종말이 시작되기 전. 모두가 식량을 털고 있을 때 난 서점을 털었다. 사람들과 부대끼기 싫은 것도 그렇지만 누군가와 목숨을 걸면서까지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식량은 배만 채워주기만 할 뿐. 마음의 양식은 되지 못한다. 고독한 생활을 홀로 지내기엔 식량 보다는 책이 더 값이 나간다.

“흐음..”

천천히 책을 고르고. 책의 냄새를 맡는 일. 이것이 내 마음의 위안을 가져다준다. 배가 고파도 책 냄새를 맡고 책을 읽으며 허기에 지칠 때쯤 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리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식량을 구한다.

꽤 괜찮은 삶이다. 식물들만 없다면 말이지.

***

식량이 다 떨어졌다. 이젠 정말 활동 해야만 한다. 요즘은 일교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아침이나 밤에 활동하는 것은 피하기로 했다. 밤이야 뭐 더울 때도 피했었지만.. 때문에 주로 다니는 시간대는 낮으로 되어버렸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 입고 도끼를 쥐고, 백팩을 메고서 계단을 내려간다. 꽤 고층에 속하는 내 집의 위치상 부지런히, 빨리 내려가야만 식량을 얻을 수가 있다. 단번에 서너 계단씩 뛰어 넘으며 내려가기 시작하자 머지 않아 익숙한 머리를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내 말에 남자는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호리한 체격을 가진 남자다. 선한 인상을 하고 있지만 그가 쥐고 있는 톱날이나 도끼에 묻은 녹색 액체의 양은 그가 얼마나 사냥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나가?”

“예에. 다 떨어져서요.”

“그렇구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드는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계단을 내려간다. 통성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루 보고 다음 날 또 보면 인사를 한다. 서로 머릿속에 넣어 봤자 손해보는 것은 살아남는 자들이다.

온정을 베풀면 독이 된다. 정을 품으면 죽음이 된다.

“참. 그 얘기 들었어?”

묵묵히 내려가는 도중 계단 틈으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얘기라뇨?”

“요새 악질인 놈들이 꽤 많다더군. 농장을 만든다고 해서 말이야.”

“옛날부터 있던 얘기잖아요.”

“그렇긴하지. 근데 최근 활동량이 많아졌다고 해. 몰려다니는 놈들있으면 눈 마주치지 말고 자리에서 내빼라구.”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재촉한다. 농장. 식물들이 말라 비틀어지기 전에 열매들을 맺고 죽는데, 그것을 악용하는 것을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이 하등 나쁠 것이 없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여 식물로 만드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임은 분명했다.

최근들어 느끼고 있었다. 식량의 양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입은 많은데 먹을 것이 떨어지니 절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였다. 과일 하나에 목숨을 내걸며 싸우는 꼴이라니..

***

“덥군..”

선선했던 아침 날씨는 온데간데 없이 내리쬐는 태양이 한없이 뜨겁다. 절로 찡그려지는 인상을 펴가며 가보지 못했던 아파트 단지로 걸음을 옮긴다. 자박. 자박. 밟히는 건물 부스러기와 잘게 갈린 시멘트들의 촉감이 영 낯설기만 하다.

꿀꺽. 절로 목이 말라온다. 땀을 많이 흘리면 안된다. 적당한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 내로 걸음을 옮긴 후 아무 동으로 들어간다.

“후우.”

그늘진 곳에 들어가니 한층 열기가 덜해졌다. 식은 땀을 가볍게 닦은 후 일자형 복도 식으로 된 문들을 가만히 훑어 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표시를 살핀 후 어느 곳에 들어갈지를 정한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기에 작은 행동 하나도 소흘히 해서는 안된다.

“여기만 비었네..”

8개의 문들 중 가운데 쯤에 있는 문 하나만 표식이 없다. 이럴 경우 사람이 사는 곳이라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하기 때문에 물러났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산다면 노크에 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소음 소리로 날 반겨줄 것이다.

느리게 손을 뻗어 문을 두드린다. 똑똑.

“조용하네.”

다시 두드린다. 일 분 정도를 차분히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린 후 문을 연다. 식물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찔러온다. 꽈악. 도끼를 강하게 쥐고서 앞으로 나아간다. 신발장. 바로 연결된 거실. 좌우로 닫힌 방문. 한 곳에만 녹색 뿌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다른 것부터 살펴보자.”

집안 곳곳을 뒤지며 쓸만한 것들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허무한 마음을 달래며 마지막 남은 문쪽으로 다가간다. 작게 소음을 내고 안에서 나는 반응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속임수인가..”

말도 안된다. 식물들이 지능적으로 발달할 리가 없다. 그렇게 굳게 믿은 나는 문을 열었고 곧 싱그러운 풀잎 냄새와 함께 정 가운데에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중년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진행 중이었다. 등을 찢고 나오는 녹색의 여린 뿌리들은 나의 존재감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움찔거리며 맹렬하게 움직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도끼를 쥐고 앞으로 걸어가 후에 다른 누군가를 위협할 ‘식물’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죽음’만이 살길인가.

세상에서 편안한 ‘죽음’이란 있을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작은 망설임도, 작은 떨림도 없을까.

죽으면 뭐가 남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사라지는거야. 전부.”

***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걸 깨닫는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 뿐이야.

"포기해. 포기하는게 더 편하니까. 포기하는게 더 빠르니까."

***

그래도 한때는 인간이었을 중년 여성을 최대한 배려하기로 했다. 변화하기 직전, 머리에 충격만 주면 되기 때문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에 들린 도끼도 잘 갈린 상태였기에 목과 몸통을 분리 시키는 일은 내겐 쉬운 일이었다.

한 두 번 있던 일도 아니다. 점차 이 일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물끄러미 손등에 그어진 굵은 흉터 자국을 바라본다. 그러자 시린처럼 가슴이 죄여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집을 나선다.

먹을 것은 구하지 못했다.

***

“태우야!”

다급한 엄마의 소리. 처음엔 실감이 나질 않았다. 살아 생전에 엄마가 저런 목소리로 나를. 간절히 불렀던 적이 있었을까. 집에 도착한 난 바로 엄마 방으로 갔고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패닉 상태에 빠져야만 했다.

“태우야! 정태우!”

사람이 아니다. 오늘 아침까지만해도 졸린 눈을 비벼가며 상을 차려주던 엄마였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이? 수 많은 질문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현실에 내 몸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굳어진 동상처럼 그 자리에서 멍하니 엄마를 아니, 식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정신차려! 어서.. 어서!”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짙은 녹색의 뿌리들로 하체가 잠식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엄마는 사람과 식물의 모호한 경계선에 있었다.

“엄마..?”

평소 알던 엄마의 얼굴이 아니다. 온화하고 자상하던 화초같은 모습. 이젠 붉게 충혈된 눈과 거무튀튀한 피를 한 움큼 쏟아내고 있는 모습은 내겐 도저히 익숙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쩌지. 어찌해야 엄마를 저기서 꺼낼 수가 있지.

후들거리던 두 다리가 점차 말을 듣기 시작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난 부엌으로 달려가 뾰족한 것들을 모조리 양손으로 집어다가 엄마의 하체를 아니, 뿌리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아아아악!”

엄마의 고통 섞인 비명소리에 내 손은 반사적으로 멈췄고 곧 고개를 돌려 피를 토하고 있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처음 듣는 엄마의 격한 비명소리. 방을 적시기 시작하는 검붉은 핏물들. 내 머리와 몸은 점차 굳어져가고 있었다.

스스슥.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엄마의 하체를 앗아가던 뿌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쥐어짜듯한 엄마의 목소리에 난 고개를 들었다. ‘태우야.’ 앞이 뿌옇다. 눈가가 축축했다.

“..엄마.”

“어서.. 엄마를 편하게..”

붉다 못해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의 두 눈. 탈색되기 직전의 안색에 난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다음 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 안에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조금은 무리를 해서라도 움직이기로 했다. 지금이.. 5층. 아무것도 구하지 못했으니 다음 층은 넘길까. 느리게 계단을 오르며 6층에 다다르자 가운데 즈음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 한 명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백팩이 조금 볼록하게 올라온 것을 보아 어느 정도 수확이 있었던 모양이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있나보군.”

목숨을 건 대가이기에 난 얼른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서로가 예민할 때 만나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최대한 충돌을 피하기로 했다. 7층으로 가니 계단 바로 옆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는데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니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 말에 남자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에 들린 것은 종이로 말린 담배였다. 편한 차림으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사는 것 같았다. 한 걸음 계단을 올라가니 남자는 나를 빤히 보며 담배를 깊게 빨았다.

“후우. 먹을 거 찾나?”

“예.”

“가리는건?”

“..예?”

그 뜻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아니, 저런 식으로 질문을 해오는 사람은 저 남자가 처음이었기에 난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몰랐다. 곧 남자는 담배를 비벼 끄며 바닥에 대충 던지고는 말했다.

“다 먹냐고. 보아하니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위험할 것 같은데?”

한 눈에 내 상태를 꿰뚫어보고 있다. 오랜 시간 여기서 굴러먹은 베테랑 같았다. 난 솔직해지기로 했다. 괜한 자존심만 앞세워 오기를 부리는 것은 예전에 포기해버렸다. 살아가는데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도와주시게요?”

“도울 수도 있지.”

“그 뜻은..”

“자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거지.”

“뭘 원합니까.”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여자.”

“..예?”

“여자를 원해.”

“저쪽 동으로 가보세요. 식량과 교환하는 여자들이 있으니”

내 말에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나. 성병에 걸렸거든.”

“....”

이런 상황에서 성병이라니.. 멋쩍게 웃으며 나를 보는 남자를 가만히 보았다. 꽤나 굶주려 있는 모양이다. 나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지. 하지만 저 남자와 관계를 갖는 여자들 모두 병에 옮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는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한다. 심하면 죽임을 당하거나 따돌려지는 것이 원칙이다. 병으로 인해 생존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 가장 크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걸 왜 저에게 말하는거죠?”

“글쎄.. 자네라면 날 도와줄 것 같았거든. 보아하니 꽤나 절박한 심정인 것 같은데. 얼마나 굶었지?”

“..하루 되었습니다.”

남자는 과장스럽게 손바닥을 치며 안쓰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래 봤자 속이 훤히 보였지만 지금 우위에 있는 것은 어찌보면 남자니까..

“이틀만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지? 여자만 데려와. 그럼 자네에게 먹을 만한 것들을 주지.”

“....”

“아, 잠깐만 기다려 보라구.”

곧 몸을 돌린 남자는 바로 옆 문으로 황급히 들어가더니 단번에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주먹만한 크기. 어두운 갈색에서 쌉싸름한 냄새가 난다.

“뭐에요?”

“먹어봐.”

한 움큼 떼어서 내미는 남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를 봤지만 이미 남자는 갈색 덩어리 중 일부를 씹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절로 손이 움직였고 천천히 입속으로 내밀고 턱을 움직였다.

짭짤한 맛과 약간은 질긴 식감. 고기를 말린 것 같았다. 그다지 나쁜 맛은 아니지만 좋은 맛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먹는다면 포만감이 들 것 같았다.

“이게 뭐죠?”

“고기지. 말린거야. 물론 사람은 아니고.”

“....”

“어때? 데려오겠어? 한다고 하면 두 덩이 더 줄게.”

“성병에 걸렸다면서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꼭 옮는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자네가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그쪽 사정을 여자가 알게 되면 하려고 할까요.”

내 말에 남자는 가만히 고기를 씹더니 말했다.

“그럼 포기하지 뭐. 어때 할거야 말거야. 데려오기만 해. 어려운 일 아니잖아. 찾기 힘들면 다시 오면 돼. 이거 두덩이 준다니까.”

눈 앞에서 대롱거리는 말린 고기 덩어리를 그냥 모른척 하고 지나가기에는 내 허기가 너무나 컸다.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내 입은 멋대로 ‘알겠어요.’ 라고 말했고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집으로 들어가 고기 두 덩이를 내게 내밀었다.

“천천히 먹어. 내일 이 시각에 다시 보자구.”

“....”

음흉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든 남자는 곧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손에 남은 고기 두 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른 잠바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금 인간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그럴바에 열매로 변해 다른 사람들을 돕게 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구. 난 그것을 조금 더 앞당겨줬을 뿐이야. 그런 눈으로,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마. 너도 열매에 입을 댔잖아? 결국 너도 사람들의 마지막 생명을 먹어치운 셈이라구. 나도 너와 같아. 같은 인간이라구.”

***

“살고 싶어하는 마음은 모두가 같지. 누구라고 해서 죽고 싶어하겠어. 모두 다 같은 마음일거야. 하지만 우린 희생이라는 단어와 양보, 배려를 잊고 살아왔어. 환경이 인간을 만들지. 하지만 이런 각박한 환경 속에서도 온정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있어. 네가 내 앞에 서있는 것이 첫 번째 증거지.”

***

양손 가득 흘러내리는 녹색의 액과 붉은 색의 핏물. 방바닥을 적시며 두 개의 액체가 서로 융합이 되어 가고 있다. 엄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식물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돌연 무언가가 목구멍을 차고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우웨에엑!

우웩!

따갑고 뜨거운 위액이 식도와 입안 가득 멤돈다. 뿌옇게 변해버린 주변 환경. 따끔거리는 손등 위에 상처.

“오빠!”

다급한 여동생의 목소리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이 처참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막고 싶었지만 내 몸은 통제 불능이었다. 빠른 발걸음 소리. 동생도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점점 가까워진다. 안돼. 막아야만.. 동생에게 이런 것을 보일 수는 없어.

“큰일났어! 오..빠?”

“....”

간신히 고개만 돌려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살차이의 우리 관계. 친남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리의 사이는 좋았다. 언제나 밝게 웃으며 나를 잘 따르고 챙겨주었던 동생이다.

가끔 남자 문제로, 학업 문제로 트러블이 일어나긴 했지만 청소년기에는 당연히 겪는 일이라고 동생의 편에 서기도 했었다. 항상 튀는 동생 덕에 나는 모범생 이미지를 갖고 학교에 다녔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는 동생이기에 어쩌면 더 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심통이라도 난 걸까.

아빠의 부재가 컸는지도 몰랐다. 우리가 어릴적에 아빠는 부도를 막지 못한 채 자살을 택했다. 그 결과 ‘수억원’ 이라는 빚에 앉아 살기 시작했지만 우리 세 가족은 나름대로 행복했다. 아빠의 빈자리가 가끔 느껴지기는 했지만 든든한 엄마 덕에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 빚도 어느 정도 갚아가는 시점에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등 돌려도 나 하나만 믿고 의지하며 웃어줄 내 마지막 가족. 엄마와 동생. 자식 둘을 먹여살리느라 제대로 발 뻗고 잠을 청하지도 못했던 세월이었다. 곁에서 보며 자라온 내가 잘 알고 있다. 여자 같지 않은 투박하고 거친 두 손. 따뜻하게 잡아주지도 못했다.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해주지 못했었다.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거라고는 엄마를 한시라도 편하게. 내 손으로 편하게 해주는 것 뿐이었다.

“..오빠.”

울고 있다. 투명한 액체를 흘리며 나를 보며 울고 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그게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강한 부정의 도리질을 하며 동생은 뛰쳐나가버렸다.

그게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

“이쯤인가..”

어제는 남자가 건넨 의문의 고기 덕에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맛은 그럭저럭이지만 포만감을 어느 정도 메꿔줄 수 있었기에 꽤 유용했다. 게다가 실패를 해도 남자에게 돌아가기만 해도 고기를 다시 받을 수 있다. 이정도면 꽤 남는 장사 아닌가.

한적한 아파트 단지. 오후 때라 그런지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한 여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였다. 그래봤자 서너 명 뿐이었지만, 당장 말을 걸정도의 외모와 포스를 풍기고 있지는 않아서 조금 더 배회하기로 했다.

“저..”

찬찬히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려보이는 여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길게 기른 흑발에서는 기름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관리를 오래 하지 못한 것 같아 보였다.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화장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여자였다.

“일하는거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이 어려웠지만 이상하게 이 여자에게는 그럴 수가 있었다. 여자는 보일 듯 말듯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아기새 같은 모습에 난 내적 갈등에 휩싸여야만 했다. 고기 두덩이에 이런 여자를 팔아 넘겨야 하는건가.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먹을 것을 구하지는 않을까.

“..생각 없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생기 없는 표정이 묘하게 끌렸다. 남자에게 데려가기전 여자가 포기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여러 가지로 말을 건넸다.

“다 잘해?”

“네.”

“성병있어.”

“네.”

이건 좀 의외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염병이라도 옮아 오기라도 하면 사람들과 지낼 수 없게 된다. 그런 사실을 다 알고서 말하는건가? 놀란 눈으로 여자를 보자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굶은지 이틀 됐어요.”

“....”

여자도 마지막 갈림길에 놓인 것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조금 가야되는데.”

아마 입이 그렇게 움직였던 것 같다.

“가요.”

여자는 망설임 없이 말하며 나를 따라왔다.

***

남자의 집에 가는 동안 우린 한마디의 사담도 주고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하고 무거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차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 여기저기를 점령하고 있는 굵은 뿌리들. 군데군데 멀쩡해보이는 창문들. 저번 달에 비해 녹색의 식물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체크 포인트를 정해둬야 후에 움직이기 편해진다. 틈틈히 고개를 돌려 가볼만한 곳을 선점해두기로 한다.

처음에는 불을 질러 없애자는 말도 많았다. ‘식물이니까 당연히 불에 약하겠지.’ 라는 마음이 고무적이었다. 허나, 그것은 큰 오산. 불이 붙기는커녕 오히려 꺼트려버리는 신기한 식물들의 내성에 사람들은 넋을 잃어 버렸다. 그렇다고 크게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물들이 말라비틀어지기 직전 열매를 맺고 활동을 멈추는데 그 열매는 남은 생존자들에게 꽤나 큰 도움을 주었다.

공생관계. 글쎄.. 이 말이 과연 맞을까.

“얼마나 더 가야해요?”

여자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약간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간 꾹 참고 있다가 말을 뱉어버린 꼴이랄까. 왠지 모르게 순수해보이는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다 왔어.’ 라고 대답한 후 남자가 있는 아파트 동으로 들어갔다.

저벅. 저벅.

침묵 속에서 올라가는 계단은 꽤나 심심했다. 1층. 2층. 3층.. 그리고 남자의 집 앞. 남자는 우리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일찍이 보고 있었는지 담배를 끄고서는 나와 여자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수고했어.”

그 말과 함께 집에 들어간 남자는 곧 고기 네덩이를 건네며 희미하게 웃었다.

“....”

고기의 무게가 여자의 생명인가. 죄악감이 들기 시작한다. 과연 난 잘한걸까.

“오래 기다렸지? 일단 들어가자. 배는 안고파?”

남자는 여자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자연스레 어깨를 감싸며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끝날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그 여자에게 예의인 것 같았다. 곧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먹먹해져왔다. 이상해. 이상하다.

“..아아악!”

비명소리? 손에 든 고기 덩어리들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닫힌 문을 열었다. 신발장. 눈 앞에 보이는 방문. 저기는 아니야. 보통 안쪽에 있는 방을 쓰지. 곧 바로 거실을 걸어가 당장 보이는 방문 앞에 다가갔다.

끼이익-

낡은 문소리와 함께 나오는 여자. 한 손에는 예리한 단도를 굳게 쥐고 있었다. 붉다 못해 탈 것 같은 하얗고 여린 손목을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여자는 곧 내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나이든 주제에 나를 먹으려고 하니까 그러는거야.”

아까와는 정 반대의 목소리와 톤. 연기였었나. 애초에 이런 것을 노리기 위해?

“너 같은 새끼들이 하는 짓은 잘 알고 있어. 그 뒤에 누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고마워. 덕분에 얼마 동안은 식량 걱정은 할 필요 없겠네.”

굴러다니는 백팩에 고기 덩어리를 가득 담은 여자는 단도를 흔들며 집을 나가버렸다.

“....”

상상이상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니. 멍하니 여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 문틈에서 얕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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