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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녹색지대 part.2

익명
2026-09-24 23:27

“누구도 믿지 마라.”

“동료를 만들지 마라. 언젠가 그 동료가 너의 발목을 잡을테니.”

“자비를 베풀지 마라. 굳게 먹은 마음만 약해진다.”

“살인을 하지마라. 인간의 선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너를 타락 시킬 것이니.”

***

남자의 마지막 생명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문을 열지 않아도 죽는 것은 확실해져 있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문을 열고 있었고, 다리는 방문턱을 넘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머릿속에서 말하고 있지만 남자의 마지막 정도는 지켜봐주는 것이 예의라고 마음 속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도 남자 덕에 하루를 연명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자를 죽인 것이 나일지도 모른다. 여자를 잘 데려왔더라면..

“하아.. 하.. 하하.”

남자는 나를 보고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케 가지 않았군 그래.”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걸까. 이상하게도 남자의 미소는 한 없이 편안해 보였다. 고대하던 여행을 떠나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 애초에 알고 있던 것일까.

“너라면 가지 않을 줄 알았지.”

“....”

복부에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상당하다. 꽤 깊이 박힌 듯 꿀렁대며 올라오는 피의 양이 어느새 침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남자는 포기한 듯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사람을 다뤄보고 봐와서 잘 알아. 넌 정에 약한 타입이지.”

“..괜찮아요?”

내 물음에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각오한 일이야. 이름이 뭐지?”

“정태우.”

“그렇구만.. 내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

“....”

“들어줄거라고 생각해. 내 ‘마지막’ 이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어때. 해줄 수 있지?”

남자의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되면 발악을 하기 마련이다. 이 남자라고 해서 보통의 인간들과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한 일이면 나까지 곤란해진다. 미련 없이 나가자. 나가버리자. 그리고 새로운 식량을 구하는거다.

“어려운 일.. 아니야. 내가 가면 남은 고기들을 자네에게 모두 줄게. 어때?”

구미가 당기는 말에 돌아가려던 몸이 저절로 멈췄다. 남자는 이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말하세요.”

“후우.. 후.”

‘고맙군.’ 이라고 말한 남자는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며 말했다.

“식물로 죽기는 싫어. 특히 다른 누군가에게 영양이 되는 일은 지옥에가서도 못하겠어.”

“....”

“천국에 간다는 건 욕심이지. 지옥에서 받을 고통을 조금은 덜 수 있지는 않을까 해서 말이야. 하하하하.”

격하게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잠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고 있었다.

“후우.. 바로 옆 집에 내 식량 창고가 있어. 거기에는 내 애완동물들이 살고 있지.”

“거긴 이미 점령 당하지 않았어요?”

“위장이야.”

“..그래서요?”

“내가 죽거든 토막내서 애완동물들에게 나눠주게.”

남자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던 발악이 바로 이런 것일까.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못해요.”

라고 매몰차게 거절하고 몸을 돌리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남자가 죽은 후 머리를 잘라내는 일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하겠지만 토막을 내어 동물들에게 먹인다는 것은 도저히 내키지가 않았다.

“..왜? 어차피 내가 죽으면 머리를 내리칠거 아닌가? 숨이 꺼지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해. 유감스럽게도 내겐 시간이 없고 청을 들어줄 유일한 사람은 너뿐이야.”

“제정신이에요? 그깟 애완둥물이 뭐라고 자기를 먹이로 줘요? 아니, 애초에 사람을 먹는다는게 말이 돼요?”

“네가 먹었던 고기.”

“!!”

설마..

“궁금했었지?”

“....”

“가 봐. 그럼 떼를 쓰지 않아도 내 말대로 할테니까. 크.. 크크크큭.”

마지막. 남자는 마지막 숨을 뱉으며 짐승처럼 웃어댔다. 곧 소리가 끊겼고 작은 경련과 함께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찝찝하다. 무거운 기분이 든다. 평범한 고깃덩어리들은 아닌 것 같았지만 분명 내게 도움을 줬었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받을 용의도 있었다.

“..옆 집이라고 했지.”

생존이 우선인 상황에서 오래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도끼를 강하게 쥐고 옆 집으로 향한다. 확인을 한 후 남자를 처리하면 된다.

***

남자의 말대로였다. 문틈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녹색의 식물들은 위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집안 가득 메우고 있는 악취와 요란한 동물들 소리는 쉽게 적응이 될만한 요소들이 아니었다. 천천히. 신발장을 지나 거실로 향한다.

“....”

넓은 식탁. 정육점에서나 보던 칼과 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는 가느다란 빨랫 줄이 있었는데 팔뚝 만한 크기의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든 고기들이 다져져 메달려 있었다. 천천히 고기가 달린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큭..”

냄새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원형의 통이 보였다. 동물의 가죽처럼 보이는 것과 길고 작은 털들, 그리고 동물의 장기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여기저기 뒤섞여 있었는데, 수 많은 파리와 구더기들이 굴러다니며 작은 만찬을 즐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찍. 찍찍찍. 찍찍.

그리고 확연해지는 동물들의 울음 소리.

“..쥐인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굳게 닫힌 방문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지독한 악취와 격한 쥐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팔뚝만한 크기의 10평 정도의 방을 바글대며 가득 메우고 있는 쥐들은 유독 한 자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내가 내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녀석들의 주위는 내게로 쏠렸고 자연스레 다수의 녀석들이 방문 앞 높은 철조망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제길..”

어두운 방에서 지독한 냄새와 바글바글대는 생명체들을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방 가운데서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늘어 보이는 팔과 다리. 작고 아담한 신체. 마네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리얼하다. 아직도 떠나지 않은 쥐들이 여기저기 달라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

어두운 방을 고마워해야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줄에 메달려 있는 고깃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여자를 데려오라고 한 것도, 처음 보는 내게 고기를 쉽게 건넨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남자는 쥐를 사육하고 있었고 그 사료로 인간을 쓰고 있었다. 정말 나쁜 놈은 남자였다. 그는 연쇄살인마에 불과했다.

마지막 청을 들어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이하다. 강하게 방문을 닫고 몸을 도는 순간 낯설지 않은 작은 체형을 가진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순진한 척을 하며 나를 따라오던 여자였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의 형태였다.

우주가 탄생하고 별들이 탄생하고 행성이 탄생하고 생명체가 탄생하듯이.

새로운 생명체가 이곳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특별한 ‘매개체’가 필요하지만 모든 살아있는, 살아가고 있는 것들은 진화를 해야만한다.

같은 자리에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퇴보, 썩어들어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

“내일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헛된 기대를 품는 것은 정신병이지. 미친거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내 미래는 왜 이럴까. 난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만 하는걸까. 개소리하지 말라 그래.”

“미래는 정해져 있는건가요?”

“네가 움직인다면 바뀌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정해져 있어.”

***

“안녕?”

파공음. 낮은 각도에서 뭔가가 올라오고 있다. 피해야 하지만 당황할대로 당황한 내 몸은 쉽게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곧 둔탁한 뭔가가 내 머리 부분을 가격하고 나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아니, 움직여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끄윽.”

시야가 급속도로 기울어진다.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 몸 상태를 아는지 여자는 쭈그리고 앉아 단검을 내 목쪽으로 들이밀었다.

차가운.. 서늘하고도 매서운 감촉이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힘을 준다면 목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했다.

“너 같은 새끼가 제일 싫어.”

“....”

“살아가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기꺼이 희생시키는 이기적인 새끼.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거 아니야.”

“크..큭.”

“물론 그런 아저씨들만 고르고 골라서 보는 눈이 생겼지만 말이야. 처음엔 말이야.”

스으윽. 차가운 입김을 뱉으며 얼굴을 들이미는 여자는 ‘꽤나 아팠다구.’ 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여자는 방안을 둘러보며 자신의 가방에 담긴 고기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고, 방 가운데에서 뜯어먹히고 있는 ‘사료’를 보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 분노의 화살은 모두 내게로 쏘아질 것이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최악이네. 실컷 노리개로 쓰다가 저런 대우를 하고 죽인다는 건..”

그렇게 말한 여자는 잠시 동안 방안을 뚫어지게 보고는 벽을 타고 올라오려는 쥐들을 한 마리씩 처단하기 시작했다. 찌익. 찍. 격한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추락하고 있는 쥐들. 그 혐오스러운 것들을 남자가 아닌 여자가. 저렇게 태연하게 없애는 것은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처음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새로운 광경에 넋을 잃어서는 안된다. 몸에 힘을 줘야만 한다. 손가락과 발가락를 서서히 움직여가며 사지를 움직이려고 하지만 머리에 가해진 충격과 바닥에 엎어질 때 받은 대미지가 상당한 듯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젠장. 어디에 맞은거야. 몸이 왜 이렇게..

“기다려. 넌 다음이니까.”

뒤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태연하게 말을 뱉은 여자는 묵묵히 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제길. 이런 때에 단련해왔던 몸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니. 이래서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 팔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다른 쪽은 벌벌 떨리기만 할 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팔 하나로..

“!!”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방에서 조금 떨어진 방. 나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사사사삭. 사삭. 벽을 긁고 있는 발톱 소리 같다. 저거다. 저걸 이용하는거다. 어차피 죽을 몸이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아아. 드러워졌네. 기껏 뺏은 옷인데 말이야.”

휘익. 단검을 강하게 휘두르고 핏물을 털어낸 여자는 나를 잠시 보고는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찌익. 찍-

방심하고 있다. 저기까지 기어갈 수 있을까. 다시 이를 악물고 한 팔로 몸을 끌기 시작한다. 이를 악물고 숨을 천천히 몰아쉰다. 까딱거리던 다른 팔도 움직이려고 한다. 좋아. 이대로라면..

“큽..”

문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만 더 가면..

“잔머리를 쓰네.”

그렇게 말한 여자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내 상태를 보고 바로 몸을 돌린 것 같다. 분명 단검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망설임 없이 나를 찍어 누를 테고, 그럼 난 죽고 말 것이다. 문까지의 거리는 정말 조금이다.

“하아앗!”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양손을 딛고 상체를 주욱 내민다. 반동을 이용하지 못해 머리를 그대로 문짝에 들이박는 꼴이 됐지만 방문을 열며 철로 된 얕은 벽을 무너트리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낯선 무게감과 악취는 얼굴을 절로 찌푸리게 했다.

‘곱게 죽지는 않겠지.. 사람들만 먹는 놈들이니까.’

곧 뒤따를 고통에 질끈 눈을 감았지만 예상외로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지만 예상을 한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법이다.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고 고개를 들 때 쯤.

“꺄아아악!”

날카로운 하이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체를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우글대는 쥐떼들이 여자를 뒤덮고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꺄아아악! 살려줘!”

검은 털들 사이로 삐져나온 얕은 다리.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훤히 보이지만 녀석들의 공격은 상상이상이었다.

“어째서..”

서로 대가리를 처박고 먹이를 차지하려는 쥐들의 모습을 보니 문득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 나에게 고기를 건네며 했던 말. ‘먹어 봐.’, ‘여자를 데려와.’ 처음부터 남자의 목적은 욕구를 푸는 것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녀석들은 자기 동족을 먹은 사람을 제외하고, 남자를 제외하고, 여자만을 먹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것인 걸지도 몰랐다. 녀석들이 갇혀 있는 방안을 보니 그리 오래 되지 않는 여자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그런건가..”

발작적으로 외치던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만찬은 진행 중이었다. 그 상황을 차마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을 이끌고 집을 나와버렸다.

***

‘내가 죽으면 녀석들의 사료로 써주게.‘ 남자는 어떤 의도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한걸까. 저 녀석들을 책임져달라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여자를 없애기 위한 힌트를 준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녀석들의 뱃속으로 들어가 속죄를 받고 싶었던 것일까.

“....”

굳게 닫힌 위장 문을 바라본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지만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봉사자들을 사료를 써가며 생존을 해왔다니.. 확실히 제일 리스크가 적은 방식이기는 하지만 식량을 위해 인간을 저런 식으로 죽이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잘 지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게 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험해졌으니까.

“후..”

급하게 나온 터라 도끼를 두고 와버렸다. 찝찝하지만 남자의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쓸만한 것들과 남자가 식물화가 되지 않도록 막아야만 한다. 이건 배려가 아니라 나를 위한 행동이다.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누군가를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

[괴물을 죽일 땐 내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쥐들이 가득한 문에 엑스 표시를 크게 그리고는 남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 있을 고기가 걸리기는 하지만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봤기 때문에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는 허기를 달래준 두 시체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하는 것이 전부였다.

느리게 남자가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

생명이 꺼진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희미하지만 뭔가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을 오래 끌지 말자. 얼른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쓸만한 것들과 내 몸을 지킬만한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남자도 처음부터 맨 몸이었을리는 없다. 어딘가. 분명 어딘가에서 밖을 돌아다닐 때 유용하게 쓰던 것이 있을 것이다.

“제길..”

없다.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도끼가 없어진 시점이 내게는 가장 큰 위기다. 다시 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도끼를 가져오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만찬을 즐긴 녀석들이 나를 보면 그대로 달려들 가능성이 있다. 두 가지의 선택지에서 녀석들은 내가 아닌 여자를 택한 걸지도 몰랐다. 그동안 그래 왔고, 익숙해져있으니까. 다시 배가고파진다면 남아 있는 사람을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몸을 유지하려면 꽤 많은 양을 먹어치워야만 할것이다.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움직인다. 하나라도 건져야 이곳에서 빨리 나갈 수가 있다.

“겨우 이건가.”

15분정도. 집안을 샅샅히 뒤져본 끝에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은 부엌칼이 전부였다. 그 외에 고깃덩어리들이 식탁과 비슷한 곳에 놓여져 있었지만 챙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젠 남자를 처리해야한다.

***

목을 완전히 떼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날이 잘 서지도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애초에 두꺼운 것을 자르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헛구역질을 연신 해대며 식물의 싹을 잘라낸 후 바닥에 잠시 앉았다.

흘러내리고 있는 피의 양이 상당하다. 저 피를 먹고 살아가는 식물들은 대체 왜 생겨버린 것일까. 왜 내가 살아가던 시대에 이런 일이 생겨버린 것일까. 왜 모든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 물어 뜯기 바쁜 것일까.

“후..”

급격히 고단해져간다. 여자에게 당한 것이 꽤 큰 것 같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안심해가는 단계여서 그런 것 같다. 몸을 지배하려는 잠의 기운을 애써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침대 아래에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

피로 뒤덮여버린 바닥과 이불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니 기다랗고 검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안에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되건 되지 않건 간에. 아무거라도 들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볼까.”

오랜 생활 끝에 얻은 감이다. 이런 감은 잘 틀리지 않는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검은 상자를 앞으로 끌고 와 조심스레 뚜껑을 연다. 미약하게 일어나는 먼지와 함께 천으로 쌓여 있는 길고 얇은 것이 보인다.

“....”

검은 손잡이와 그 아래로 예리하게 뻗은 검날. 이건 진검이다. 조심스럽게 검에 말린 천을 떼내자 하얀 빛을 머금으며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꽤 큰 소득이다. 이거라면 위험사거리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아직 잘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꾸준한 연습을 통해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식량을 구할 것만 같았다.

예상외에 수확이다. 얼른 진검을 상자에 챙기고 자리에 일어난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후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와버렸다.

***

진검을 챙기고 나서는 수련에만 매진했다. 특별히 가르쳐줄 사람도 없어서 단순한 베기와 찌르기 등을 죽도록 연습했다. 그동안 부족한 식량은 가끔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기에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뜨고, 지고를 수십 번 반복할 때쯤이었다. 서서히 검에 대해 적응을 해갈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안에 있어?”

낯설지 않은 목소리다. 무슨 일이지? 사적인 일로 집에 오는 사람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죠?”

안면이 있는 사람이지만 쉽게 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익숙해져 있던 패턴이 깨지면 불안해지듯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의논할게 있어서 말이야. 문 좀 열어주겠어?”

의논? 의논이라는 단어를 참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참 오랜만이군. 난 대답 대신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문을 여니 가끔 계단에서 인사를 나누던, 몇 번 나에게 식량을 주었던 30대 중반의 남자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의외네요.”

내 말에 남자는 씁쓸히 웃으며 ‘들어가도 되나.’ 라고 물었고 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에 들어온 남자는 느릿하게 거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앉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꺼내기가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

재촉은 안된다. 나름대로 굳게 결심한 얼굴이다. 곧 남자는 얇은 외투를 벗으며 내게 말했다.

“이거.. 뭐라고 해야할지 참 복잡하구먼.”

“이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해. 그 중 하나가 네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럼 네 몸에서 열리는 과일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거야. 네 몸에 흐르는 피가 내 식욕을 자극하거든. 너로 인해 내 하루가 즐거웠으면 좋겠어.”

***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공평하다.]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한 경쟁을 반복한다.]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사람들을 정화 시킬 것이다.]

[세상은..]

***

남자는 외투를 벗고는 내게 손짓 했다.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자 오른 팔목 부분을 덮고 있는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

붕대를 품과 동시에 나는 식물 특유의 향이 내 후각을 자극했다. 멈칫. 그 자리에서 난 동상처럼 굳을 수 밖에 없었고, 남자는 착잡한 얼굴로 붕대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곧 팔목을 든 남자는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팔목 부분에 보여야할 핏줄 자리에는 미세하지만 복잡해 보이는 나무 뿌리가 살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더 아래 부분에는 뿌리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 살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남자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된거죠?”

“모르겠어. 왜 이게 내 몸속에서 자라나고 있는건지 모르겠어.”

“아프지는 않아요?”

“어. 신기하게도 나쁘지가 않아. 이게 생기고 나서 오히려 몸에 힘이 생겨.”

“..힘이 생겨요?”

식물이 인간의 몸에서 자라나면 힘을 주는건가? 하지만 저건 누가 봐도 몸의 일부가 식물화가 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언젠간 식물로 뒤덮여 버릴 것이다. 그럼 사고를 제대로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믿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봐. 나 원래 다리 절었잖아.”

벌떡 일어난 남자가 두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를 봤다.

“확실히.. 정말 나아졌어요.”

어떤 의미로는 축하할 일이지만 남자에게는 많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미 다른 쪽으로 식물이 자라나 몸을 점차 잠식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역시 머리를 지배당하지 않았기 때문인건가.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고는 붕대를 메기 시작했다.

“이 상태를 보인 것은 자네가 처음이야. 나도 왜 생기는건지 모르겠어.”

“아저씨..”

붕대를 감다만 남자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건. 이 식물이 내게 힘을 준다는거야. 다친 부위를 치료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거지.”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어떻게 될지 아시잖아요.”

내 말에 남자는 묵묵히 붕대를 메기만 했다. 괜한 말을 한건가. 아니다. 남자도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 나를 찾아와 이 말을 듣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식물로 변하면 가족도, 친구도 없다. 없애야할, 죽여야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날 이후 난 그렇게 다짐했다.

남자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시간을 좀 가져볼까 해. 심해지면 자네에게 다시 찾아오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외투를 다시 걸치고 있다. 왠지 모를 처량한 모습에 난 ‘알겠어요.’ 라고 대답했고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

괜히 머리만 혼란스러워진다.

“길게 생각하지 말자.”

소파에 앉아 마지막 남자의 집에서 건진 일기장을 집어 든다. 원래는 그 집에 두고 올까 생각했었지만 날짜마다 빼곡하게 적어낸 일기장의 내용에 흥미가 생겼다. 어쩌면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

오래전 일입니다. 오래전에 난 기러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자식들이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난 기러기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뉴스에서 나오거나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던 기러기 아빠들의 무리 중에 합류한 것입니다.

힘들었습니다. 하루 하루를 악착같이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피로는 점점 쌓여가고, 몸 여기저기가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내왔습니다. 개같이 일하면서 개같이 벌고 개같이 저축하고.

그래요. 난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습니다. 내 생활을 이미 물 건너간지 오래. 내 꿈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어릴적 꿈꿔오던 이상향 같은 꿈들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유토피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 풋풋하고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 난 없습니다. 이젠 늙고 허약해진 육체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꿈을 쫓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상냥하지 않았습니다. 어깨에 짊어진 세 가족의 무게 때문일까요. 허리를 쉽게 펼수 없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굽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이런 세상. 망할 세상.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매번 생각했습니다. 용기가 없던 나에게는 그것이 세상에게 하는 최후의 발악이었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나를 찾고 싶었습니다. 아무 근심없이 환하게 웃던 그때가 그리웠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모든걸 팔아서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요.

세상은 날 구원해주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움직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난 후회합니다. 내가 왜 그런 일을 바랬는지. 왜 세상은 망해 없어져야 한다고 믿었는지. 어리석고 무능한 나를 원망합니다.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이젠 정말 혼자가 된겁니다.

바람난 와이프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습니다. 학업을 중단하고 경찰과 어울려다니는 자식들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습니다. 안보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사라져버리면. 이 세상이 망해버리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세상을 원망합니다. 이제야. 왜 이제야 나를 위해 움직여주었는지요. 그토록 간절히 바랄때는 아무런 답도 없더니 지나가는 말로. 한숨 섞인 말로 던진 말은 어찌 그렇게 잘 받아들였는지요.

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먼저 죽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이지요.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난 뭐든지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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