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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밖에 나가지 마시오 번외 1/2

익명
2026-10-18 04:13

온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이제 익숙해져갔다. 명치와 머리 부분을 보호하는 보호구가 거의 소용없을 정도로 상대의 타격은 내 전신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퍽. 퍼퍼퍽. 깔끔한 연속 스트레이트. 몸은 거의 한계라고 울부짖었지만 이를 악물고 두 다리로 버텨냈다.

퍼퍼퍽!

몇 차례의 공격이 더 오고 나니 다리가 버티질 못했다. 스르륵. 풀려버리는 다리와 함께 내 몸도 앞으로 기울어졌다. 상대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부축해주고 링 가운데에 정중히 눕혀줬다.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던 상대는 나를 잠시 지켜보고는 링을 나갔다. 꿀꺽. 말라비틀어져 푸석한 입안에 짠 땀방울들과 침을 섞어 대충 삼키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얇은 티의 색이 진하게 물들 정도로 흘린 땀의 양이 상당했다. 양손을 서서히 들어 보호구를 서서히 벗어 제치고 아무렇게나 던진 후 다시 누웠다. 차가운 링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온 몸을 주무르듯 안마해주는 것 같았다.

“10분 뒤다.”

스윽. 중년인은 탈모가 한참 진행 중인 마빡을 내밀며 내게 차가운 물병을 건넸다. 물병을 들어 입안에 꽂고 대충 식도 안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거친 숨을 몇 번 몰아쉬자 다음 스파링 선수가 들어왔다. 나는 축축하다 못해 눅눅해진 보호구를 몸에 끼고 몸을 일으켰다. 퍽. 퍼퍼퍽. 퍼퍽.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주먹에 근육들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중학교 중퇴 이후 따로 배운 기술들이 없는 나에게는 이런 식의 알바가 살아가는 유일한 밥줄이었다. 부모가 손을 놓은 지도 오래였다. 언제부터인가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것이 당연시 되어 이제는 남들과 어울리는 것이 거북할 정도였다. 내가 이상한가? 아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간단히 밥을 먹고, 일찍 자고, 다시 일을 하고, 먹고 자고 그런 반복된 삶을 살아가며 범죄 한 번 저지르지 않았다. 이정도면 모범시민 기준에 들지 않겠는가?

때앵-

종소리와 함께 스파링 상대는 몸을 멈추고 내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링을 나갔다. 링 밖에서는 내게 물병을 건넨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나는 물렁하다 못해 축 늘어진 보호구들을 보고는 샤워실로 갔다. 쏴아아- 차가운 물로 몸을 진정시켰다. 아직 초겨울이지만 온 몸에 전해지고 있는 열기에 비하면 더울 정도였다.

대충 열기를 식히고 적당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곧장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중년인이 다가와 흰색 봉투를 건네고는 ‘수고했다.’ 라는 말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물끄러미 봉투를 바라보던 나는 대충 점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체육관을 나섰다.

일 년 째 이런 일을 하고 있지만 나에게 돈을 주고 있는 중년인은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출생이나 학력을 따지지 않고 일한 대가를 고스란히 주는 사람도 꽤 드물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휘이잉-

날카로운 칼바람이 덜 말린 머리를 망가트렸다. 스윽. 손을 들어 대충 머리를 털어 내고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상대적으로 건장한 내 체구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좌석에 앉자, 그것도 곧 사라졌다.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맡기며 창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부모와 그리 깊은 연은 아니지만 한 가지 감사한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건장한 신체조건이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신장과 남들에 비해 1~2배는 더 많은 근육 량을 갖고 있는 신체는 내 유일한 무기이자 자랑거리였다. 물론 내 생김새가 그리 잘나지 않은 편이라 종종 오해를 받곤 하지만, 이런 식의 일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것도 탁월한 신체 덕인지도 몰랐다.

부르릉-

점퍼 주머니에서 흰색 봉투를 꺼내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수표 2장과 녹색의 지폐 여러개가 있다. 하루 꼬박 일하고 25만원이라…… 꽤 괜찮은 직업 아닌가? 다시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서 내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려 파스와 비타민, 영양제를 사고서 걸음을 옮겼다.

19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당히 어둑했다. 이런 거리라면 상당히 곤란했다. 사람들이 자칫 오해하고 나를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죄가 없어도 파출소에 앉아 여러 가지 진술을 하며 시간을 허비할 바엔 집으로 뛰어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집까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오 분이면 충분했다.

어둑해져가는 골목길 사이를 뛰어가며 낡고 초라한 빌라 앞에 멈췄다. 3층으로 가기 전 우체통을 열어 내게 온 것이 없나 확인했다. 여러 가지 고지서와 납부금 그리고 정체모를 흰색의 봉투가 손에 잡혔다. 본 적도 없는 흰색 봉투가 무료한 내 삶을 조금이나마 즐겁게 해주지 않을까 라는 작은 기대감을 안고 3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거실이 나를 반겨줬다. 그래도 예전엔 나를 돌봐주던 사람들이 와서 사소한 것들을 챙겨주던 때가 있었다.

거실 불을 키고 낡은 소파에 몸을 편하게 누워 흰색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찌직. 연약하게 뜯어지는 봉투 사이로 금색 종이가 손에 잡혔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건강에는 문제가 없으신지요? 이번 임상실험을 하는데 귀하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기에 부득이하게 이렇게 연락을 드리는 점 양해바랍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아래 번호를 통해 연락바랍니다. 120-0384-2532 관리자 송병헌.]

짧고 간결한 문구였다.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으며, 내 신체를 눈여겨보고 있는 거지? 실험이라는 단어보다 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었다. 멍하니 내용을 다시 보고는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들어 눈에 보이는 숫자를 찍었다. 몸으로 하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매일 맞기만 하는 일도 서서히 질려가던 참이었다. 어쩌면 재밌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과 설렘이 내 심장을 조금씩 뛰게 했다.

뚜루루루-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차분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역시 연락해주셨군요.”

“…….”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 한 명이니까요. 필시 전화가 온다면 분명 당신이라고 생각했지요.”

미리 알고 있던 건가.

“내 주소를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우연이죠. 우연히 그 동네를 지나가는데 아주 좋은 체구의 당신을 보고 곧 바로 따라가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턱대고 당신 앞에 나타나 임상실험에 응해달라고 하면 거절할 확률이 높아 보였기에 편지를 했는데, 생각 외로 잘 되었군요.”

“…….”

“하하하. 말수가 적으시군요.”

“보수는?”

“2억입니다.”

“2억?”

2억…… 평생을 맞으면서 살아도 만져보지도 못할 돈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임상실험을 하는데 2억씩이나 준다는 말인가? 내 짧은 생각을 알고 있는지 전화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실험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금액을 지급해드리는 겁니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멘트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간 사람 관계를 소홀히 하며 홀로 지내온 내게도 이런 어눌한 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정도로 위험하기에 그 정도의 보수를 하는 겁니까.”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그렇죠. 뭐, 성과가 잘 나타난다면 5천까지 더 드릴수도 있습니다.”

2억 5천…… 구미가 당기는 것은 사실이었다. 20평생을 넘게 살아오며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있었다. 그 돈이면 매일 맞지 않아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길게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로 가면됩니까.”

“역시 명쾌하십니다. 딱히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일 저희 직원들이 모시러 갈 테니까요. 푹 쉬고 계십시오.”

그것을 끝으로 남자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뚜. 뚜. 뚜. 거리는 신호음을 여러 번 듣고 나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 봤다. 살아서 돌아온다면 거액이 내게 들어온다. 사기일까? 아니다. 종이 아래 부분에 기관 명칭도 명시되어 있었고, 광고를 통해 여러 번 들어본 기관 이름이었다.

“후…….”

그 정도의 거액이라면 ‘못난 아들놈 하나 봐주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희망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학교 중퇴 후 10년 동안 연락이 끊긴 부모와의 사이를 돈으로라도 이어보고 싶었다. 뒤늦게나마 못 다한 효를 하고 싶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보다 금의환향을 해서 돌아가는 편이 더 멋지지 않겠는가. 물론 어디까지나 부모가 살아 있고 연락이 된다는 가정하지만, 그 정도 돈이라면 무엇이든 못할까.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정신을 말짱했지만 몸 여기저기가 거의 만신창이었다. 내일은 맞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드디어 일탈이 오는 것인가.

**

“……니까?”

“……씨?”

꿈틀.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에 눈과 귀가 번쩍 떠졌다. 따가운 눈알을 좌우로 굴려가며 현실을 서서히 파악했다. 그러자 나를 깨웠던 소리가 귀로 명확하게 들려왔다.

“00제약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니, 일단 일어나야겠다.

“…….”

어제의 일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금색의 고급스런 종이가 힘없이 가랑이 사이로 떨어졌다. 조심스레 종이를 들고 내용을 살폈다. 쿵. 쿵. 쿵. 노크 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그제야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삐빅- 낡은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검은 색과 회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 입은 30대 초반의 두 남자가 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살아생전 남이 내 집에 온 적은 처음이었기에 둘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준비가 되시는 대로 나와 주셨으면 합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무미건조하게 말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그 옆의 남자도 나를 힐끗 보고는 따라 나섰다. 대충 세수를 하고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삐리리리-

집을 나서자마자 전화 소리가 들렸다. 액정에 뜨는 번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예.”

“오늘은 쉬는 건가?”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제의 일을 사실대로 털어 놓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까? 아니다. 괜히 사소한 일까지 말해서 무얼 하겠는가.

“이제 못 나갑니다.”

“못 나가다니?”

“대충…… 그렇게 되었습니다.”

“잠깐…… 보수가 적은가?”

“…….”

일년 가까이 보면서 중년인이 이렇게 당황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내 존재가 큰 건가. 하지만 이어지는 소리에 나는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 자네가 워낙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아 보수를 남들보다는 적게 줬긴 하지만…… 솔직히 말이야. 자네 외관이 어디 특출 난 것도 아니고…… 그런 외모로 어디서 돈을 버는…….”

개소리. 어차피 나를 이용해먹으려는 속셈이었나. 통화 시간을 나타내는 얄궂은 액정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쑤욱 내미는 검은 정장 남자 때문에 정신이 확 들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아닙니다.”

길게 망설이지 않고 남자를 따라갔다. 밖으로 나오니 좁아터진 골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고급스러운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정장 남자는 뒷좌석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주고 나를 보며 손짓했다. 살아생전에 이런 차를 타는 일도 생기는군. 느릿하게 걸어 뒷좌석에 몸을 맡겼다.

“…….”

안락한 의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칙칙한 곰팡이 냄새가 나던 계단이나 집에서 나던 기분 나쁜 냄새도 나지 않았다.

2억이라는 액수를 지불할 만큼의 기관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세단은 좁고 더러운 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몇 분 만에 골목길을 벗어난 세단은 큰 길로 접어들어 도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승차감과 밖에 보이는 새로운 풍경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궁금한 점? 있다고 한들 내가 실험대에 오르는 쥐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살아나면 그만이다. 이때까지 몸으로 살아오며 경험했던 나날들.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고마운 몸이 어떻게든 잘 버텨줄 것이다.

“?”

얼마나 갔을까. 눈이 번쩍 떠졌다. 세단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때문에 무기력하고 바보처럼 잔 것 같았다.

“일어나셨습니까.”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긴……?”

“다 왔습니다.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커다랗고 견고해 보이는 백색의 건물과 그 옆에 깔린 푸른 잔디가 보였다.

“이쪽으로.”

두 남자는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며 건물로 걸어갔다. 나를 슬쩍 보고서는 회전문을 가리켰다. 나를 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 같았다.

말없이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괜한 미련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담아냈다. 검은 색과 회색의 두 정장. 커다랗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세단. 수평선처럼 쭉 이어진 푸른 잔디들. 자, 이때까지 버텨 준 몸아.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버텨다오.

“안녕히…….”

회전문을 통과하기 직전 그렇게 들렸던 것 같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살아 돌아올 것이다. 살아서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며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는 거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안녕하십니까. 이 곳 연구의 담당자 송병헌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문을 통과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내 시선을 끌었다. 180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가운을 걸친 남자였다. 송병헌이라고 한 남자는 내게 다가와 한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하하하. 이거 원,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군요.”

남자는 보기 좋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나를 다른 쪽으로 안내했다. 남자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가볍게 훑어봤다. 백색의 타일과 견고해 보이는 기둥 여러 개. 좌우로 뻗은 기다란 통로와 중앙에 위치한 고급스러워 보이는 엘리베이터 두 대가 있었다.

남자는 기다란 통로 중 왼쪽으로 나를 안내했고, 여러 개의 방문 중 두 번째 방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소파에 나를 앉힌 남자는 곧 파일 철을 들고 내게 내밀었다. ‘계약서.’ 라고 써져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유독 내 눈을 번뜩이게 한 것은 2억이라는 엄청난 배상금이었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남자가 펜을 건넸다.

“거기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예.”

길게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 목적은 단 하나. 얇은 펜을 쥐고 서툴게 내 이름을 써내려갔다. 살아오면서 펜을 잡아본 일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10여년 만에 처음 잡아보는 펜의 감촉이 한 없이 낯설기만 했다.

“예. 감사합니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파일 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하시는 일이 어떻게……?”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맡고 있습니다.”

“아…… 그럼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겠군요.”

“몸으로 해 온 일이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만…….”

“아, 그게 아닙니다. 이번 실험을 임하는데 있어서 00씨의 몸을 최적의 상태로 이끌어내서 약의 작용을 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남자는 손을 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

“그럼 간단한 테스트를 거치고 방으로 안내해드리지요. 자, 따라오십시오.”

가벼운 몸놀림으로 일어난 남자는 다른 공간으로 나를 안내했다. 딱히 남자에게 할 말은 없었다. 그저 내 존재가 이곳에 맞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같은 문이 열리며 남자가 나를 안내했다. 신체를 측정하는 기계로 보이는 것들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서 남자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남자의 몸이 유독 크게 보였다.

“…….”

남자의 주도하에 검사를 시작했다. 정확한 신체와 몸무게를 재고 근육 량과 골격 량, 적혈구, 백혈구 등.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피곤하시죠? 기본적인 검사들은 끝났으니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남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연구만하는 사람치고는 신체 발달이 잘 되어 있었다. 스파링을 오래 해오면서 상대들을 봐왔지만 저렇게 몸에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을 보는 일은 참 드문 일이다.

“00씨?”

“예.”

긴 통로를 지나 중앙에 위치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층이었다. 1층. 2층. 바뀌어가는 숫자를 올려다보며 남자가 말했다.

“지내시는데 큰 불편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00씨만 지내는 생활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양보하셔야 할 일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제 말 이해하시죠?”

“쓸데없는 소란은 피하라는 말입니까.”

“00씨는 서두 없이 본론만 내뱉는 스타일이군요. 예. 그게 더 화끈하고 좋지요. 소란이라…… 웬만하면 조용히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안 그러면 실험 자격에서 ‘박탈’ 될지도 몰라요.”

다른 말보다 ‘박탈’ 이라는 단어가 나를 옥죄어 왔다. 시작도 못해보고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사양이었다. 기껏 멋을 부리며 알바를 관둔 마당에 돌아간다고 한들 나를 받아주는 이가 있기는 할까.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넓고 거대한 공터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 벽에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인지 백색의 문이 일정 간격으로 띄어져 있었다. 공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벤치들이나 인조 공원 등이 있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편히 쉬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인조로 만들어낸 것인가.

“…….”

어떻게 저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거지? 실험이 잘못 되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데.

“00씨의 방은…… 어디보자.”

남자는 가운 주머니에서 네모난 기기를 꺼내 화면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런 남자와 내 모습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와~ 아저씨 크다.”

밝고 명랑한 소리가 들렸다. 왼쪽 허벅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0살 정도 된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 어린아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봤지만, 난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너도…….”

저런 아이도 이런 실험에 참가하는 것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아직 10대로 보이는 청소년들과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20대의 청년들. 30대 이상의 중년층들이 균형 있게 모여 있었다. 전부 나와 같은 심정인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버틸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것인가.

“저기가 좋겠군요. 이쪽으로…….”

남자는 고개를 들고 나를 안내했다. 뒤에서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는 꼬마를 보다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따랐다.

“이곳입니다. 115호. 잘 기억해두십시오. 모두 문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호수로 구별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115호입니다.”

남자는 사무적인 목소리와 톤으로 내게 일러두었다. 115호. 어렵지 않은 숫자였다.

“체구에 맞게 다 세팅을 해두었으니 염려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검사 결과는 2~3일 내에 나오니 그때까지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예.”

사무적인 멘트를 마친 남자가 돌아가려는 찰나, 114호가 조용히 열리며 흑색과 흰색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나왔다. 그러자 남자는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가식 없는 미소로 여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혜야. 잘 잤니?”

“…….”

은혜라고 불린 여자아이는 생기없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여자아이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내게 말했다.

“이 녀석은 정신지체아에요.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왔는지 원…… 00씨를 115호에 머물게 한 것도 그 이유입니다.”

“이유?”

“그게…… 아저씨들끼리 작당을 하고 은혜를 성폭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 박탈처리가 되어 쫓겨났지만 은혜가 정신지체라는 것을 교묘히 이용해 성 욕구를 풀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저 아이를 지키라는 말입니까.”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자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내 내 존재감을 감지했는지 여자아이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허망해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혼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부탁합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어쩐지 이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군요. 00씨라면 은혜를 잘 지켜주실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 아이를 범하려고 한다면?”

“00씨는 그럴 분이 아닙니다. 제가 알아요.”

남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탁합니다. 은혜야, 앞으로 이 아저씨를 잘 따라다녀야 해. 알았지?”

“…….”

여자아이는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남자는 쓸쓸한 미소와 눈빛을 흘리며 내게 가볍게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이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은혜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하고 순결해 보여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아주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허지만 너무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약해 보이는 은혜를 다시 114호로 강제로 넣다시피 한 후 115호의 문을 열었다.

스르륵.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10평은 되어 보이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끝에는 내 체구에 맞는 커다란 침대와 다른 끝 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소파와 TV가 전부였다. 내부도 깨끗한 편이어서 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온통 흰색이군.”

건물의 내부나 밖은 희다 못해 투명한 흰색이었다. 굳이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스르륵. 문이 열리며 뭔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흑색의 머리카락이 윤기 나게 반짝거리는 것이 아름다웠다.

“…….”

은혜는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공허한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 것 같아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하지만 평소에 TV를 보지 않는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했다.

TV너머로 은혜의 존재가 확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저런 아이를 돌볼 만한 재주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가만히 앉아 골몰히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보지도 않고 있는 TV 프로가 끝난 후에 정신이 든 것 같다. 삐걱거리는 몸을 풀어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적으로 기지개를 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은혜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리 와.”

손짓을 하며 은혜를 불렀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얇은 다리로 오래 서 있으면 아프지 않을까. 은혜에게 다가가 얇은 손목을 잡았다. 오묘하다. 새삼 느끼는 감정이었다.

“앉아.”

소파까지 은혜를 끌어 강제적으로 앉혔다. 그러자 멍한 눈으로 TV를 바라봤다. 내용을 이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오는 것이 힘들었던 것일까. 은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허한 눈으로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표출했다.

“…….”

은혜라는 존재가 영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끌리기 시작했다. 왠지 나라면 은혜를 온전히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TV에 빠져든 은혜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공허한 얼굴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 같은 얼굴이다. 왜일까. 은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진정되는 것은?

TV에서 들려오는 잡음이 10평의 공간을 서서히 메우기 시작했다.

**

은혜를 보호하겠다고 다짐한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째.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시간대에 나오는 식사. 지루한 면이 있다는 점을 빼고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하루 사이를 경계로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띌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인조 공원에 배치된 벤치에 은혜와 앉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하루 사이에 20명 이상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의 말대로 임상실험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람의 ‘목숨’ 뿐이라는 것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은혜는 아직 데려가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내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같이 데려갈지도 모른다.

띵-동.

어제와 비슷한 시간대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를 안내해주던 남자와 2명의 연구원으로 보이는 호리한 체격의 남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송병헌이라고 했나. 남자는 처음 나를 맞아줄 때와는 다르게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

그 남자의 등장에 주변 공기마저도 멈춰버린 것 같다. 사람들은 불안한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남자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남자는 크게 숨을 마시며 작은 기기를 꺼내 이리저리 터치를 했다.

삐- 삐비비- 삐.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저 소리가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심정인지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중 한 사람은 도저히 궁금함을 못 참겠는지 손을 들어 올렸다.

“어제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는 침묵을 깬 남자를 슬쩍 보고는 다시 기기를 터치했다.

“살아있습니다만…….”

미묘한 뉘앙스에 사람들은 전혀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웃기지 않는가. 모두 목숨 하나 버리면서까지 2억이라는 거액의 돈을 거머쥐러 온 것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죽으면 죽을 수도 있는 거고 운이 좋으면 살아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늘은 121호부터 140호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자, 순서대로 엘리베이터에 오르시지요.”

남자의 표정이 다시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신의 번호가 지목된 사람들은 마치 죄를 지은 죄수마냥 힘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시작했다. 남자 뒤에 있던 두 남자들은 번호를 체크해가면서 이상이 없는지 파악했다. 그런 모습을 잠깐 보던 남자는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내일 결과가 나올 겁니다.”

“예.”

“긴장되십니까?”

“어차피 나를 걱정해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어쩌면 은혜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군요.”

남자는 멍하니 앉아 있는 은혜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뚜벅. 뚜벅. 구두 굽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가.”

미세하지만 은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남자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뚜벅. 뚜벅.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남자는 잠시 뒤를 돌아 은혜를 보고는 미련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4층. 5층. 6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내일인가…….”

6층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잠깐 상념에 빠졌다.

“형씨.”

하지만 내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샌가 나타난 30대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처음 올 때부터 저 양반이 형씨한테만 뭐라 말을 하는 것 같던데, 무슨 비밀교환이라도 한 건가?”

나의 침묵에 남자의 왼쪽 눈이 약간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비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 다 서로 좋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 나나 자네나 같은 처지인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부모 없이 여기까지 오다가 팔자 좀 피어보자는 속셈으로 지원하긴 했지만, 사람이란 게 원…… 때가 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나.”

남자의 표정에서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나를 대하며 가식적인 가면을 쓰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해 나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를 하려는 것인가.

“그저 이 아이를 맡아달라는 얘기 외에는 없었습니다.”

내 말에 남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은혜를 삿대질 했다.

“이, 이런 모자라 보이는 애를? 아, 아니 미안하네. 성격이 급해져서 그러네. 정말 그것뿐인가?”

“예.”

“……하아.”

남자는 더 이상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다른 무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3~4명으로 되어 보이는 무리들은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자.”

그런 무기력한 꼴이라니…… 자신이 선택한 일에 책임질만한 각오도 없는 것인가. 은혜의 손을 이끌고 내 방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스르륵.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밀고 침대 위에 은혜를 강제적으로 눕혔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려는 은혜를 억지로 눕힌 뒤 가만히 지켜봤다.

“…….”

자기 싫은지 은혜는 내 손을 뿌리치다시피 걷어내고 TV 앞에 앉았다. 하는 수 없이 TV를 틀어주고 소파 옆에 앉아 은혜를 지켜봤다.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구나.”

지켜주고 싶었다. 갖고 싶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투박하고 두터운 입술로 은혜의 작고 여린 입술을 탐해도 되는 것일까. 세상을 살아오면서 온갖 더러운 것을 먹고 뱉어낸 입술이었다. 이런 걸로 괜찮은 걸까.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은혜는 아무 말 없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

역시 안 되겠다. 더러운 것으로 은혜를 물들일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그저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 그게 나의 올바른 선택이자 행동이다.

TV에 몰두해 있는 은혜를 가만히 바라봤다.

“날씨입니다. 내일은 전국의 저기압 영향으로 안개가 짙게 끼는 날이 되겠습니다. 체감 온도는 5~10도…….”

**

그렇게 무료한 공간 속에서 잠이 든 것 같았다.

“……하라고!”

“어서!”

얼마나 지났을까. 이 공간에서 도저히 들릴 수 없는 불협화음에 눈이 떠졌다. 그와 동시에 내 눈에 잡히는 것은 내 앞에서 뭔가를 꾸물거리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까 전 나에게 뭔가를 물어보던 남자의 무리들 중 한 명이었다.

“제길…… 왜 이렇게 안 돼?”

남자는 연신 중얼거리며 내 몸을 점점 옥죄어갔다. 손을 보니 뭔가로 나를 묶으려 하고 있었다.

“얌마. 조용히 해. 저 놈이 보는 앞에서 이년을 능욕해야 하니까.”

“다음은 나라고. 순서 제대로 지켜.”

“취미 한 번 고상하다니까.”

“어차피 죽는 마당에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남자는 신경질적인 말투로 다그쳤다. 이상하게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왜 저런 옷차림이지? 천천히 시선을 옮겨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는 누군가를 봤다. 지켜야만 하는 연약한 어린 새 은혜였다. 전과 같은 멍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지만, 은혜의 상의 역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이상한 행동에 내 앞에서 꾸물거리던 남자 역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침대에서 백색의 빛을 내고 있는 은혜였다. 부드득. 부득. 마음속의 폭풍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어, 어이!”

당혹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어쩔 줄 몰라 어물거리며 내게서 물러났다. 두근. 두근. 엄청난 속도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파악.

낯선 소리와 함께 뒤에서 충격이 느껴졌다. 뜨겁고 따가운 뭔가가 눈과 코를 타고 흘러내려 입으로 들어갔다. 찝찝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것.

“으워어어!”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뒤에서 공격을 가한 남자의 목에 강한 하이킥을 날렸다. 차마 피할 생각도 없던 남자는 그대로 맞아 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혀, 형씨 잠깐만!”

당장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남자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 버렸다. 퍼억. 소리와 함께 뜨거운 뭔가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아아아악!”

남자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미꾸라지처럼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서서히 남자와의 거리를 좁혔다. 허겁지겁 방문을 밀고 나가려는 남자의 손목을 잡고 강하게 비틀었다. 콰득. 콰드득. 익숙한 소리가 내 청각을 후벼 팠다.

“크아아악!”

살을 뚫고 나오는 뼈를 보며 공포에 젖은 남자는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손목을 뜯어내고 다른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쿠웅.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실신한 듯 쓰러졌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발을 떼고 남자의 목을 짓누를 준비를 했다. 단숨에 끝내자.

“으아아악!”

이제 저 목을 부러뜨리기만 하면 된다. 박탈? 상관없다. 설상 살인죄를 뒤집어쓴다고 해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잠깐!”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자 뒤를 보조하고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각자 양손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당장 멈춰!”

“쏜다!”

아플까. 저런 총알이 내 몸에 박히면? 아니, 뚫린다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까. 잠시 두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평온 자체의 눈빛이었다.

콰직.

그러나 역시 살려둘 수 없다. 기형적으로 목이 뒤틀린 놈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죄를 지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했다.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타앙- 탕-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소음과 함께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아마도 난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

넓지도 작지도 않은 백색의 공간. 그 가운데 위치한 데스크 탑과 좌우 책상으로 흐트러진 서류 더미들이 보였다. 어지러운 공간 속에서 남자는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씻지 않은 모양인지 머리 군데군데에 까치집이 잡혀 있었다.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것은 물론. 입에서는 단내마저 날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곧 구겨지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송 박사님!”

노크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조수 때문이었다. 송병헌은 흐름을 깬 자신의 조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는 작은 원망도 섞여 있었다.

“그게…… 큰일 났습니다.”

조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송병헌은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하며 키보드를 다시 두드렸다. 타다다닥. 타닥. 타다닥.

“답답하게 하지 말고 말해.”

“그…… 박사님이 데려오신 덩치 큰 남자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게…….”

송병헌은 단숨에 자리를 박차고 조수에게 걸어가 그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이 새끼야. 지금 너랑 내가 장난할 짬이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남자가.”

송병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깊게 한숨을 쉬고 조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다시 되물었다.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거냐.”

조수는 어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송병헌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때까지 수많은 실험을 같이 해온 조수지만 이런 식으로 공포에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물론 송병헌 그가 처음부터 거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곳에서는 절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송병헌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덩치 큰 남자가.. 피 실험자들 3명을 죽였습니다.”

“왜?”

“그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흉기는?”

“손과 발로…….”

“그 남자가 덩치가 큰 것은 알지만 그 정도로 괴력을 지녔다는 게 말이 되나? 주먹 한방에 사람이 죽어나가?”

조수는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송병헌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수에게서 더 이상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컴퓨터에 앉아 남자의 검사 결과를 조회했다.

처음 자신의 흥미를 돋우었던 생김새와 분위기. 선뜻 실험에 응하겠다고 말했던 굵직하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송병헌은 바로 자료를 출력하여 조수를 이끌고 긴 통로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어디 있지?”

“여자아이와 함께 방에 있습니다.”

“방에?”

“예.”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송병헌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사람이 가질만한 수치가 아니야.”

“……예?”

송병헌은 말 대신 출력물을 조수에게 건넸다. 이내 그의 눈도 크게 확장되었다.

“그 정도의 몸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어.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매일 스파링을 하면서 버텨낼 수 없는 일이야.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내왔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몸의 구성을 벗어났다는 얘기가 될 수 있었어. 쉽게 생각하면 되는 일이거늘…….”

“박사님 어쩌면…….”

“‘그것’과 ‘이것’은 별개지. 하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겠어. 준비 단단히 해둬.”

“저…… 그게 박사님.”

조수는 다시 한 번 더 머뭇거렸다.

“말해.”

“그 남자 총에 맞았습니다.”

“뭐?!”

이제껏 침착을 유지하던 송병헌의 이성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조수는 양팔을 저어가며 자신의 상황을 다급하게 설명했다.

“들어주십시오. 박사님. 그 남자가 사람을 죽이려고 하기에 경고 차원에서 위협을 줬습니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안하고 바로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저와 제 동료는 연구실 수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포 한 것입니다.”

“……후.”

송병헌은 자신의 신변과 조수의 신변을 옭아매고 있는 연구소의 규칙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면 된다. 근데 다른 조수는 어디 갔나?”

“역시…… 죽였습니다.”

송병헌은 사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단말기를 꺼내 비상을 발령시켰다.

백색의 바닥이 온통 붉은 색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서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은혜가 보였다. 일어나려고 힘을 줬지만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크…… 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은 내게 내려진 하늘의 선물이 아닐까.

“00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얼굴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남자는 처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내 몸을 훑어봤다.

“00씨는 저를 실망시키는군요.”

말투는 평온하지만 그의 눈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둘러라. 많이 버텨야 10분이다. 그때까지 샘플을 주사해야한다.”

“하지만 박사님…… 이런 몸으로…….”

“닥쳐! 옮기라면 옮겨!”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 명의 손길이 나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 게다가 바닥과 벽에 끈적대며 붙어 있는 피 때문에 어려울 것이다.

“끙…….”

남자 역시 팔을 걷어 올리고 나를 들어 올리려 애를 썼다. 그렇게 몇 번의 사투 끝에 내 몸을 들어 올린 사람들은 침대 비슷한 것에 나를 눕힌 후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꽤나 소란스러운 일이었는지 인조 공원에 몰린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단숨에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한 번만 더 은혜를 보고 싶었다. 몸에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써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아, 볼 수 없는 것인가.

띵-동.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직전, 느리게 걸어 나온 연약한 은혜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눈에 보였다. 찰나의 순간. 은혜의 한쪽 손이 올라갔다. 이어 좌우로 흔들렸다. 조그만 입술이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녕.”

**

송병헌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중요한 피 실험자를 허망하게 잃어버리는 것은 그에게도 엄청난 타격이었다. 어떻게든 샘플을 피 실험자에게 주입해야만 했다. 성과가 나와야만 이 시설에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가 갖는 무게는 평범한 실험자들과는 달랐다.

“제길…….”

하지만 남자의 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샘플을 버텨낼 최소한의 체력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시점이지만 평범한 사람과 월등히 다른 조건의 남자라면…… 시도해볼만 했다. 만약 이번 실험이 잘 된다면 밖으로 나갈 수도, 은혜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다.

띵-동.

6층에 도착한 송병헌과 2명의 조수들은 남자가 실려 있는 침대를 힘차게 밀기 시작했다. 푸시익. 투명하고 더운 입김과 함께 투명한 유리관이 열렸다. 다른 한 명은 버튼을 눌러 유리관을 세우고 다른 버튼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거친 바퀴 마찰음과 함께 침대가 미끄러지듯 유리관 앞에 멈췄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끙끙거리며 유리관에 남자를 구겨 넣듯이 처박아 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지만 누구하나 닦아낼 생각조차 없었다. 아니,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푸시익. 다시 유리관이 닫혔다. 안에는 힘을 완전히 잃은 남자가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정말 합니까?”

조수는 송병헌을 보며 다시 물었다.

“…….”

송병헌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어버린 실험자들 샘플까지 다 주입시켜.”

“……예?”

조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송병헌을 보며 확인을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송병헌은 굳은 얼굴로 흔들림이 없었다. 조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버튼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불안과 초조함이 전신을 흔들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것은 도박을 넘어 가망이 없는 확률이었다.

“박사님…….”

“이번 회기에 주어진 샘플을 소비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다는 거지? 다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라고.”

송병헌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겉으로는 평범한 척하며 지내왔지만 이들 모두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임상실험이 달가울 리가 없다. 조수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남은 버튼을 눌렀다. 취이익. 그러자 유리관 가운데에서 은색의 바늘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 바늘과는 다른 굵기와 크기였다.

굵고 기다란 바늘은 그대로 남자의 허리를 뚫고 조금 더 나아가 멈췄다. 그 충격이 상당한지 의식을 잃은 남자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쿠궁. 유리관이 약간 흔들거렸다. 송병헌은 망설이는 조수를 거칠게 밀어내고 남은 보라색 버튼을 눌렀다.

[샘플 주사를 실시합니다.]

무미한 기계음이 들리고 곧 은색 바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피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작고 검은 알갱이들이 기분 나쁘게 득실거렸다. 수 천, 수만의 알갱이들이 붉은 물을 따라 남자의 허리를 거칠게 공격해대는 것 같았다.

“박사님…….”

“지금 이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한다. 저 남자가 죽기만을 바라자고.”

그렇게 2~3분가량이 지나자 투입이 완료된 바늘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샘플 투입이 완료된 남자는 그대로 쥐죽은 듯 고개를 박고 있을 뿐이었다. 송병헌과 조수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한숨을 쉬고 다른 유리관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크아아!”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던 유리관의 ‘생물’들은 괴성을 질러대며 유리관을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최소 수 백 개는 되어 보이는 유리관 안에서 인간의 모습과 유사한 생물들이 동시에 포효를 했다.

“크와아악!”

검은 생물체들은 조수들과 송병헌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봤다. 거칠게 유리관을 두드리며 발광을 하는 생물들이 있는가하면, 애초에 포기한 듯 조용히 앉아 있는 생물들도 있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난 후에 모든 유리관의 점검을 마친 이들은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전히 죽은 듯 고요했다. 실망의 기색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무한히 번복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지금은 쉬고, 내일 아침 7시에 네가 직접 가라.”

송병헌은 조수를 지목하며 말했다. 조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1층으로 내려온 이들은 각 통로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송병헌 역시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갔다. 피로 범벅이 된 백색의 가운과 와이셔츠를 대충 벗어버리고는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대충 샤워를 했다.

“…….”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항상 같은 얼굴일 줄만 알았던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주름들이 얼굴 곳곳에 즐비했고, 지속적인 과업에 피부는 푸석해져 있었다. 그는 대충 물기를 닦은 후 옷장에서 적당한 티와 바지를 입고 침대에 누웠다.

“후…….”

이대로 진척이 없으면 남은 사람들이 실험대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입을 단속시킨다고 해도 피 실험자들이 다른 피 실험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밝혀지게 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은혜 역시…….”

복잡한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흔들었다. 송병헌은 애써 눈을 감았다.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잠을 청해야 했다.

똑-똑. 얼마나 잤을까. 아니, 언제 잠들었을까. 송병헌은 번쩍 눈을 뜨고 시계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두운 공간에서 시계바늘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는 느리게 걸어가 기계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송병헌은 문 앞이 깜깜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각에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이 있단 말인가? 송병헌은 다시 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다.

“?”

하지만 단단하고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송병헌은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르.”

낮고 굵은 울음이 그의 귀를 강타했다. 찌리릿. 전신이 마비된 듯 빳빳하게 굳어져버렸다. 그는 간신히 두 눈을 굴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2미터의 거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강인한 체격의 사내. 단숨에 실험에 응하겠다고 나선 사내. 은혜를 보호해주던 사내.

“허…… 허.”

공포보다는 당혹감이 더 큰 탓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인간의 몸과 얼굴이 아니었다. 송병헌은 멍청하게 거구의 괴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괴물의 붉고 강렬한 눈빛이 번뜩이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흐르는 더러운 액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크아아아!”

강렬한 포효소리와 함께 괴물이 움직였다. 질끈. 송병헌은 눈을 감았다.

“……사님!”

“박사님!”

송병헌은 몸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헛바람을 들이키며 벌떡 일어났다. 조수 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송병헌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박사님, 정신 차리십시오.”

조수의 말에 송병헌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수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다들 무사한가?”

“예?”

“다…….”

송병헌은 그제야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피범벅이 된 가운과 와이셔츠가 어제의 일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듯 을씨년스러웠다. 그제야 자신이 악몽을 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니야. 그보다 결과는?”

“실패입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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