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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딧 베스트 - 내 직업은 방에 감금된 여자를 지켜보는 일이다 마지막편.

익명
54분전
2
다가서는 문마다 잠금이 풀렸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시야를 벗어났다. 날 쫓는 사람들이 저마다 무전기에 대고 지시사항을 소리치며 발전기가 왜 작동이 안되냐고 물어댔다.
대답이 뭐든간에, 복도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고, 나는 그 안을 눈먼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어갔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넘어지지 않았고, 길을 잃었지만 끝내 발견되지는 않았다.

마지막 문에 다다라 문을 열자, 눈부신 오후의 빛이 쏟아졌다. 한 주간 접하지 못했던 신선한 바깥 공기를 처음 들이마시자 폐가 살짝 타는 듯 했다. 눈을 깜박이며 목소리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오는것은 침묵 뿐이었다. 가슴속에 공포가 차오르는걸 느끼며 나는 문을 닫았다. 여기까지 와놓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잡힐수도 있는것이다.  나는 인적없는 외딴 곳에 서있는 평범한 갈색건물 앞에 있었다.  오른쪽으로 뻗은 길이 하나 있었고, 왼쪽에는…

레이첼의 숲이었다. 그녀가 내게 준 첫 번째 그림에 있던 바로 그 숲.


보는 즉시 레이첼이 그린 그 숲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림과 똑같아서만은 아니었다. 새들이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아는것처럼, 마치 자성같은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그 숲을 바라보자, 무언가 나를 그쪽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이게 맞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이 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길로 향했다,

숲 가장자리에 들어섰을때 건물에서 남자들이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까도 싶었지만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걸 직감했다.  그들에게 잡힐수도 있었지만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나는 앞으로 몸을 던지듯 달려 나갔다. 거의 무모할 정도의 속도였지만,  발이 걸리거나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흩어져 나를 찾는 사람들의 소리가 가끔씩 저 뒤쪽에서 들려왔지만 달리는 동안 그 소리도 희미해졌다. 그들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한 순간 내 왼쪽 어딘가에서 짧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기침을 억누르긴 했지만, 누군가 나도 모르는 새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채로 숨을 곳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온통 덤불과 나무만 가득한 가운데 저기 우물 하나가 보였다. 그냥 우물이 아니라 레이첼의 우물이다. 회색 돌로 만들어진 벽체 위에 나무 뚜껑이 덮혀있었다. 레이첼의 우물을 발견해 기쁜 마음도 잠시, 저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건지 생각해야 했다. 그들도 우물을 보면 열어볼게 뻔했다. 게다가 다치거나 끼이지 않고 우물 안으로 내려갈 방법도 없었다. 그러다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몸을 낮춘 채 덤불을 타고 조심조심 우물 쪽으로 다가가 뚜껑을 밀어보았다. 처음엔 꿈적도 하지 않았지만 좀 더 세게 밀자 누군가가 뚜껑을 열어놓았다는걸 분명히 알 수 있을만큼 충분히 옆으로 밀려났다.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덤불속으로 돌아오니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는게 들렸다.

"이거 확인해봐야 돼"
"저 안으로 들어갔을까봐요? 아니길 바래야될텐데요. 저기 내려갔으면 벌써 목이 부러졌겠죠. 그럼 다 우리 책임일거고."

남자 두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둘 다 어두운 색의 방탄복을 입고 돌격소총을 들고 있었다. 나이가 더 많은 쪽이 상대방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숨어있는걸 못찾는 것보다야 낫지"

젊은 남자가 짜증 서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확인할게요." 그가 우물 쪽으로 다가가 나무 뚜껑을 거칠게 옆으로 밀자 뚜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소총에 달린 버튼을 눌러 손전등을 켜고 우물 안쪽을 비추는 동안 나머지 한명은 사방을 둘러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면 그에게 발각될까봐 걱정됐지만 더는 기다릴수가 없었다. 침착해야 한다.  생각은 천천히, 행동은 빨라야 한다.

언제라도 그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거나,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내 등을 덮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후의 빛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 앞쪽의 나무들이 점점 드문드문해지는 게 보였다.  나는 도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아스팔트로 이어지는 언덕을 오르며 보니 양방향으로 여러대의 차들이 오가는 평범한 공도처럼 보였다.

내가 붙잡혀있던 곳 바로 근처에서 히치하이킹을 한다는 생각만 해도 무서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이 준 운동복 하의와 티셔츠에 내 운동화를 신고 있긴 했지만 돈이나 신분증, 폰 같은건 없었다. 내 유일한 선택지는 멀리 달아나 도움을 청하는 것뿐이었다.

커다란 트레일러 트럭 한 대가 내 옆에 천천히 멈춰 섰고, 공기 브레이크가 쉭 하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는 살짝 움찔했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고, 백발에 희끗한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 몸을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길을 잃은것같구나. 태워줄까?"

트럭 문에는 "마르티네즈 앤 선즈 건설·운송"이라는 로고 밑에 대형망치로 벽을 내리치는 만화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미소지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네, 부탁드릴게요.”

5시간 후에 눈을 떠보니 네바다주 어딘가의 트럭 휴게소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가는 내내 깨어있으려 했지만 피로감이 엄습해와 몇 분 버티지도 못했다. 올리버 마르티네즈 씨를 올려다보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도 피곤하지만 너는 완전 기진맥진이구나. 주유랑 샤워도 하고 요기도 해야겠어. 그 다음엔 캘리포니아로 갈거다. 너도 계속 갈거면 한시간안에 이리로 와. 괜찮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차에서 내리며 다시 한번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잠이 다 깨지 않아 정신이 없었지만 그것말고는 괜찮았다. 여기서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을지, 아니면 마르티네즈씨와 계속 차를 타고 갈지 선택해야 했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 같았고 할수있는 한 도와주려 할게 분명했지만 더는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가 있는 작은 마을은 꽤 괜찮은 곳 같았다. 나는 좀 더 구경한 후에 뭘 해야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3블록쯤 갔을때 저 멀리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극장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조여오는게 느껴졌다. 레이첼의 그림에서 본 그 극장이었다.


"안녕하세요, 피닉스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극장의 캔디 판매대 직원은 나보다 살짝 어려보였지만 아주 친절했다. 하지만 묘하게 조금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공포영화 두 편 연속상영 보러 오셨나요? 죄송하지만 두번째 영화가 시작된지 30분 정도 지났거든요. 지금이라도 들어가시겠다면 반값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속으로는 미친사람이 된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아니요, 괜찮아요. 저.. 제 친구가 그린 그림에서 이 극장을 봤거든요. 그래서 제 친구에 대해 뭐라도 아시는게 있는지 물어보러 왔어요."

그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그러세요, 좀 이상하긴 하지만요."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이상하지만 흥미롭네요. 그 친구가 누군데요?"

나는 침을 꿀걱 삼켰다. "제 친구 이름은..친구 이름이 뭐였나면.. 레이첼 도노반이예요."

그가 놀라거나 흥미를 보이거나 화를 내길 바랬지만 그녀의 이름이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는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고개를 흔들며 그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죄송해요 떠오르는게 없네요. 사장님께 여쭤보면 좋겠지만 이번주엔 여행을 가셔서 자리에 안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도 더 물어볼게 없는지, 그녀의 다른 그림들이 그랬듯 이 극장도 어떤식으로든 연관지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궁리했다. "이 극장에 뭔가 특별한 점은 없나요? 역사라든지 그런거요"

남자가 활짝 웃었다. "여기 출신이 아닌게 확실하네요. 이 극장은 완전 지루한 곳이예요. 극장 뿐 아니라 이 동네가 자체가요." 얼굴을 찌푸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그가 덧붙였다. "이 곳의 역사에 대해 제가 아는건 예전에 이 자리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불에 타버렸다는 거예요. 그게 아마 1920년대인가 30년대 일이었을거고, 그때는 여기가 마을에 속해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을 거예요.  화제에 대해선 더 아는게 없지만, 그게 여기서 일어난 제일 흥미로운 일이었을거라고 장담해요."

나는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네. 감사합니다." 내가 극장을 나서려 돌아선 순간 남자가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

"도와줄게 없어 미안하네요. 다시 오면 영화 반값으로 할인해드릴게요. 제가 없으면 마샬이 그러라 했다고 하세요."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지만 문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왜 날 여기로 오게했나요 레이첼? 여기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다시 밖으로 나와 뭔가 비밀스런 시그널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극장의 밝게 깜박이는 간판을 올려다보는데 시야 한구석에서 뭔가 움직이는게 느껴졌다. 극장 옆으로 난 골목 하나가 뒤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끝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보안등 불빛이 골목 벽을 따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 그림자가 움직였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두려움 대신 흥분을 느꼈다. 레이첼이 날 여기로 인도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것이 분명했다. 계속 찾아봐야..

그림자는 부는지도 몰랐던 바람에 날린 나뭇잎들이었다. 골목 끝까지 들어오니 극장 뒤편에 쇠사슬 펜스가 둘러처진 작은 뒷마당이 있었다. 펜스 너머에는 레이첼의 그림에서 본 그 나무가 보였다. 어두운 붉은색의 뒤틀린 나뭇가지에 달린 초록잎들이 밤의 공기 속에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 먼 곳의 노래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가슴속에 온기가 가득 차 올랐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나무 스스로 발견되길 원하지 않는 한 찾을 수 없다는 그 특별한 나무가 있는 곳.

 
나무는 사방이 건물과 마당으로 둘러싸인 작고 풀이 무성한 공터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땅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잘게 쪼개지는 과정에서 존재 자체가 잊힌 것 같았다.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위치임에도 아주 오랜시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던 나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 나일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펜스를 넘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삐쭉삐쭉한 철사에 다리를 찔려 바지가 찢어지고 피가 살짝 났지만 거의 눈치채지도 못했다.  이제 나무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전에 한번도 맡아본적 없는 풍부하고 향긋한 냄새였다. 나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나무에 닿는 순간 노래소리가 한층 커짐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이 사그라들고 내면의 강한 힘이 느껴졌다.  나무 뿌리 사이를 뚫고 빛이 보이자, 나는 몸을 떠는 대신 미소지었다.

나무 밑에 숨겨진 터널이 있었다.  터널은 나무 냄새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달콤한 향을 풍기는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부는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나를 부르고 격려하면서 앞으로 이끄는 황금색 불빛들로 터널안이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공터를 돌아보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온 세상을 뒤로 하고 떠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게의치 않았다.

터널은 계속 이어졌다. 아래쪽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진데다 충분히 높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나무뿌리들이 흙벽 사이사이에 얽힌 채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게 보였다. 돌아보니 내 뒤로 터널 문이 닫혀 있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몇 시간은 걸은 것 같았지만 배가 고프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지금 어디쯤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랐음에도 길을 잃었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 저 앞에 있는 터널 안쪽에서 뭔가를 보았을때 밀려들던 기쁨과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벽돌로 만들어진 벽이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나 싶었을때 벽이 사라지며 어두운 방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

터널의 끝에 멈춰서서 지하실처럼 보이는 그 방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방은 비어 있었지만 나무에서 나온 빛 덕분에 바닥에 새겨진 무언가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숫자 2였다. 레이첼의 그림에서 본 극장 좌석표를 떠올리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나는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방은 집에 딸린 빈 지하실이었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어보니 집도 비어 있었다. 조명은 꺼져있었지만 창문을 통해 밝은 햇살이 듬뿍 쏟아져 들어왔고 저 멀리서 해변가에 밀려오는 작은 파도소리 같은 것이 났다.  밖으로 나가 여기가 어딘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먼저 집 안에 다른 사람이나 어떤 단서는 없는지 찾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런건 어디에도 없었다. 지하실 바닥에 새겨진 숫자를 제외하곤 집 전체에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었다.

집 밖으로 나오자 코 속이 소금기 어린 공기로 따끔거렸다.  집은 해변 근처에 있었고,  이 곳이 작은 무인도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레이첼의 그림에서 본 그 집이라는걸 알고 작은 놀라움이 밀려들었다. 현관 앞 포치에서 내려섰다. 여전히 사람의 흔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인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공터에서 본 그 나무와 같은 나무일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게 맞음을 알고있었다.  적어도 같은 나무의 또 다른 일부일 것이다. 터널을 만들고,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도 나타났으며, 지금 내가 있는 이 알 수 없는 장소에도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 나무의 일부 말이다.

왜냐하면, 집을 나서자마자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더 큰 섬 하나가 보였다. 거기엔 사람도 살고 호텔도 있고 자동차나 비행기도 다닐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그런게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쪽이든, 내 새로 발견된 직감은 점점 강해져서 사물의 결이 조금이나마 달라보였다. 무섭거나 나쁜쪽으로가 아니라 그저 다르게 느껴졌다.

두어시간동안 섬을 탐험하고 집을 조사하고나니 근처에 그 나무가 있음에도 끔찍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다시 터널 안으로 들어가 계속 나아가 보기로 했다.  지하실 벽 앞으로 걸어가자 벽이 스르르 사라졌고, 나는 다시 터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의 두번째 버전을 발견했다. 첫번째 집과 거의 비슷하게 터널 벽이 사라진 자리에 지하실이 나타났지만 이번에는 텅 빈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에게는 낯선 도구 같은것들로 가득한 작업실 바닥에  "4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누가 왜 이런일을 하는 것일까?

이번에는 이곳에 사람이 있는것 같았기 때문에 좀 더 세심히 살펴보려 했지만 곧 얼어붙고 말았다. 층층히 쌓인 판자 옆 벽돌 벽에 대형망치가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숨죽인 채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가 망치를 집어들곤 다시 터널 안으로 향했다.

어릴 적 아빠가 아직 살아계시던 시절, 아빠는 사냥을 좋아했다. 함께 사냥을 나간적도 없고 아빠가 뭘 사냥했는지 기억도 거의 없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집에 늙은 사냥개가 있었다는것만은 기억한다. 그 개가 사랑한 건 아빠뿐이었다. 아니, 아빠와 무언가의 흔적을 쫓는 일뿐이었다. 락커(개의 이름이 락펠러였다)가 한 번 냄새를 포착하면, 꼭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았다.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질주하는 모습이 꼭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보였다. 길을 잃은 듯하면서도, 동시에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락커가 뭘 알고 있었든 아니든, 그는 언제나 찾던 것을 찾아냈다.

내가 그 락커가 된 것 같았다 . 모퉁이를 돌때마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뭔가를 추격하거나 기억에도 없는 추억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망치를 더 꽉 쥐고서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같은 허밍이 고조되는걸 느꼈다. 그러더니 완전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또 다른 벽돌 벽이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벽이 허물어지듯 사라졌다.


다시 지하실이었지만 이번에는 훨씬 좁았다. 테이블과 옷장, 부서진 옛날식 금속 침대가 각각 하나씩 놓여있었고,  맞은편 벽 앞에서 어떤 여자가 침대에서 떼어낸 금속 다리를 벽과 벽 너머에 있는 뭔가를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에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놀라움과 공포로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나를 돌아본 순간, 손에서 망치가 미끄러져 떨어졌고, 나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어느새 다시 단단해진 벽에 등을 부딪쳤다.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한 단어를 뱉어내었다.

"레이첼?"

나를 쳐다보는 여자의 표정에서 공포는 사그라 들었지만 경계심은 여전했다. 그녀는 경고의 의미로 침대 다리를 반쯤 들어올렸다.
"네? 날 알아요?"


그 섬에 있던 나무처럼, 그녀는 레이첼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이 레이첼은 몇 살 더 많아 보였고 혼란스럽고 지친 와중에도 그 눈 속에는 다른 레이첼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느꼈던 그 조용한 슬픔이 없었다.  여전히 그녀의 질문에 미친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대답할 방법을 찾을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 허둥거리며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고, 그녀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저 나무 속 터널에서 나왔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임에 감사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찬찬히 살펴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디서 온거예요? 터널 전에요."

나는 얼굴을 붉히며 적당한 단어를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어, 전, 텍사스 출신이예요. 원래는요."

그녀는 환히 웃다가 아차 싶었는지 다시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네, 오케이..그런데 저 나무가 어떻게 된건지 알아요? 터널은 어떻게 알아냈어요? 여긴 어떻게 오게된거죠?"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기, 이게 미친소리처럼 들릴건 알지만 내 직업은 방에 감금된 여자를 지켜보는 일이었어요. 근데 그 여자가 당신이었어요. 아니면 당신의 다른 버전이라고 해야할까요? 그 여자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저는 도와줄수가 없었고, 그러다 그들에게 잡혀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그 여자가 오래전에 죽었다는 것과 미래에서 저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됐고, 그들이 나무에서 뭘 잘라내 가지고 제 몸속에 넣었어요. 그 여자 몸속에도 그게 있었는데 그것때문에 그 여자가 죽었거든요. 그리고 나서 저는 탈출했고
그 여자가 그린 그림덕에 나무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았어요.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터널을 따라가면 다른 장소들을 찾는 법을 알 수 있었어요. 내 생각엔 터널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망치를 찾았는데 그리고 나서 저..."

"잠깐만요. 이 양반아. 숨 좀 쉬어요. 그러다 기절하겠네." 그녀는 다시 미소지었고 이번에는 미소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서진 침대 너머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쇠망치를 바라보았다.
"잠깐.. 지금 망치라고 했어요?"



"네, 그 말 믿어요."


“나도 그 터널 가봤어요. 전 남친이 나를 속여 여기로 이사 오게 만들었어요. 자기 대신 나를 그 나무에 묶어두려고요.”


"말 그대로 나무에 묶었다는 건 아니고, 그 인간 대신 내가 그 나무의… 뭐라고 해야 하지? 친구 같은 게 된 거죠. 잘 모르겠어요. 다 죄다 미친 짓거리라 하나도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내가 이해하는건 그 개새끼가 나를 여기 안에 가둬놓고 벽으로 막아버렸다는 거예요. 처음엔 시간을 들이면 벽돌 몇 개쯤은 비집어 빼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걔가 이번엔 바깥쪽으로 콘크리트를 한층 더 쌓아놔가지고. 참 대단한 필이지. 아니, 저스틴이었나. 뭐든 간에. 아 누구던간에 이젠 그냥 개새끼일 뿐이지만요."


"이거 당최 끝나질 않네요."

나는 앞으로 나아가 망치를 넘겨받았다. "제가 좀 해볼게요. 돌아가면서 해요." 우리는 그녀가 이미 해낸 것보다도 더 많은 벽돌을 치워냈지만, 콘크리트 벽에는 이제 겨우 작은 금이 가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가 말하는 걸 듣고 싶었지만 레이첼은 지쳐있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망치를 건네주었다. 망치를 휘두르기 전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


레이첼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확실히 말하긴 어렵지만 내 생각엔 8개월 정도 되는것 같네요."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망치를 떨어트렸다. "그 시간동안 어떻게 살아남은거예요?'

그녀의 눈빛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나무 때문에요. 저 나무가 날 죽도록 내버려두질 않아요. 매일 잠깐씩 터널에 들어갔다 나오면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아요."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왜 터널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탈출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됐어요. 다른 세계라면 충분히 봤어요. 게중엔 썩 좋지않은 곳도 있었구요. 이 이상으로 나무에 메이고 싶지도 않았어요. 여기서 나가서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다음엔 나무와의 연결을 어떻게 하면 영영 끊어낼 수 있나 알아봐야죠." 레이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결국엔 저 그지같은 침대 다리로 해내긴 했겠지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 누가 알겠어요?"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망치까지 가지고 날 도와주러 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녀에게 마주 웃어주며 나는 다시 망치를 집어들었다. "저도요."


바깥쪽 벽에 구멍을 만들어 그리로 기어나왔을때는 우리 둘 다 땀을 뒤집어쓴 뒤였다. 레이첼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전남친은 가버린지 오래라지만 확신할 순 없었기에 조심해야했다. 망치를 손에 쥐곤 계단쪽으로 향했다. 

집은 잘 꾸며져 있었지만 조용했고 정문으로 걸어가 문을 열때까지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바깥에서는 새로운 날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현관 앞 포치로 걸어나가는데 레이첼이 내 손을 잡고 꼭 쥐는 바람에 살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른 레이첼을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애초에 핵심은 그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녀는 다른 장소나 미래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세계와 다른 가능성들까지 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이곳처럼. 이곳에는 그녀의 또 다른 버전이 갇혀 있었고,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쫓기지 않고, 그녀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 결국 레이첼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끝까지 도우려 했던 것이다.

아침 햇살이 레이첼의 얼굴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내가 지켜보고 마음을 쓰고 구하려 했던 그 여자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보았다. 결국 나에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구해준 그 여자. 레이첼에게 하고싶은 말도, 묻고 싶은 질문도 너무나 많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나중에 해도 될 일이었다.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우리는 함께 집을 떠났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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