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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괴담 재단은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익명
2026-07-30 20:16
46

어느 날, 재단은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인간의 시체로 산을 쌓아올리는 괴물들이 즐비했고.

바다에서는 대륙만한 해룡이 승천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으며.

그림자들은 지면의 속박을 벗어나 제 주인의 목숨을 취하려 들었다.

하늘은 마녀의 영역이 된 지 오래였고, 태양은 거대한 눈동자로 변모했다.

그 사이에서, 주인 잃은 전자기기가 지직거리며 하나의 영상을 토해내듯 재생한다.

[이 메시지는 포고가 이루어지는 시점부터 전 세계에 전송된다.

본 재단은 약 11세기부터 암약하며 인류의 생존을 위해 투쟁했다.

이는 재단이 감춰 오던 괴이 현상의 빈도가 늘어나 민간에 드러났을 때에도.

그것을 막기 위해 재단이 대중 앞에 나선 때에도, 창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가치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현 인류의 말살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것이다.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하여.]

하나의 비명과도 같은 그 현대 문명의 단말마는-

-콰직!

머리가 셋 달린 파충류에게 짓밟혀 마무리가 지어질 뿐이었다.

이윽고 하늘에 뜨인 눈이 한 번 깜빡인 후, 세상이 일변했다.

*

커다란 원탁과 열두 개의 의자들이 그에 맞춰 늘어서 있는 회의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각자 의자에 앉더니 곧 이어질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시선을 뒀다.

‘세계의 항상성과 개연성’ 이라고 크게 적혀 있는 화면에는, 한쪽 팔이 잘린 원숭이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할 연구원은 보고를 앞두고 점검해야할 것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들 하나하나가 각종 괴이와 형이상학적인 현상을 관리하는 재단의 간부들이었기에, 이런 식의 시간 낭비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인류를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래, 연구 C팀에서 이런 식으로 강조한 건 처음이지 않나.”

3년간 변변한 실적이 없던 연구 C팀이 갑작스레 인류구원방책을 세웠다며 간부들 모두를 불러모은 상태이기에, 그들은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연구팀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 그들이 몇 년간의 실적을 유보하면서까지 만들어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을 테니까.

-벌컥!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회의실의 문을 박차고 안경을 쓴 사내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수첩을 들고 옆에서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는, 보조 연구원도 함께였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따로 챙겨야 할 것이 있어서..”

사내는 어느 짐승의 잘린 왼손을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안은 채였다.

“그럼 연구 C팀의 ‘세계의 항상성과 개연성’ 연구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그는 곧 짐승의 손을 든 팔을 높이 들었고, 간부들 사이에 그 손의 정체를 알아본 몇몇이 수군거렸다.

왜 모르겠는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되 비틀린 방식으로 그것을 이루어주는 괴이.

이뤄줄 수 있는 소원의 범위는 방대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를 예측하는 것이 힘들었기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후 사로잡아 엄격하게 격리하고 있는 ‘원숭이 손’이라는 괴이였다.

헌데 그걸 대체 왜 이곳에?

간부와 보디가드들이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몸을 굳히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원숭이 손은 소원을 들으면 사용자에게 피해가 가는 방식으로 그를 이루어 줍니다.”

그 얼굴의 뒤로 몇 개의 데이터가 스쳐 지나간다.

[실험자 A]

소원: 많은 돈

결과: A는 이틀 뒤 가족의 보험금을 수령함.

[실험자 B]

소원: 죽은 딸을 다시 보는 것

결과: 긴 잠에서 억지로 깨어난 딸이 그를 찾아옴.

[실험자 C]

소원: 전 애인이 자신에게 다시 사랑을 느끼는 것

결과: 그녀는 몇 달 뒤 스토킹 사건의 피해자로 기록됨.

[실험자 D]

소원: 죽지 않는 몸이 되는 것

결과: 몸에서 촉수가 돋아나기 시작함.

전부 원숭이 손이 만들어낸 불행한 사례들이었지만.

연구원은 이런 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듯 데이터를 손으로 휙휙 치우더니 이윽고 씨익 웃었다.

“그 이유가 왜일 것 같나요? 그들이 불로소득을 얻고자 해서?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원을 요구해서?”

“그게 무엇이 됐든, 여러분은 궁극적으로 원숭이 손을 우리에게 조건 없는 악의를 품은 괴이로 여겨왔겠지만.”

“원숭이 손, 그러니까 소원을 빌면 피해를 주는 행위의 경위가 악의가 아니라 사실은 명확한 조건과 근거였다면?”

그는 군중의 수군거림을 무시하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겨 화면을 전환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윽고 프레젠테이션의 화면은 왼쪽에는 천사 링을 한 원숭이, 오른쪽에는 악마 뿔을 단 원숭이를 띄웠다.

“이걸 원숭이 손에게 소원을 빌지 않은 초기의 상태라고 가정해 보죠, 아직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곧 연구원은 천사 링을 한 원숭이에 살짝 손을 대 악마 뿔의 원숭이보다 높은 위치에 놓았다.

“대부분 소원을 빌 때는 본인에게 유리한 소원을 빌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분이 끝내주겠죠?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겼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뭐, 하지만 이 뒤에 올 전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죠.”

악마 뿔의 원숭이도 질 수 없다는 듯, 천사 링을 단 원숭이와 같은 높이까지 올라왔다.

여기까지는 다들 예상한 바였지만, 곧 천사 링의 원숭이의 머리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곧은 직선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저희는 생각했습니다.”

계속, 계속-

“원숭이 손은 우리를 골탕먹이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었다면?”

눈 앞의 모든 것을 자신의 흔적으로 칠하며, 탐욕스럽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수위를 조절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의 상태로 되돌리려던 거라면?”

그렇게 계속해서 뻗어나가던 직선은, 이윽고 악마 뿔을 한 원숭이의 머리에 닿았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주어진 ‘불행'을 먼저 정한다는 전제로, 이를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선은,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화면을 완벽하게 상하로 나누고 있었다.

*

“저희의 가설은 맞아떨어졌고, 여러 번의 실험을 거듭한 끝에 이런 것도 가능해졌습니다.”

-푸확!

말이 끝나자마자 살이 찢어지는 피육음과 함께 연구원의 왼손이 터져나갔고.

10초 정도 뒤에 어디선가 생긴 100달러 지폐 10장이 하늘을 나풀나풀 휘날렸다.

“제 소중한 손이 고작 이 원숭이에겐 1000달러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아까울 따름이지만, 분명히 불행의 종류와 시기를 정할 수 있죠.”

일반인이라면 기겁할 퍼포먼스였지만, 상대는 죄다 재단의 간부들.

“..조금은 놀라 주시길 바랐는데, 다들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아무렇지도 않네요.”

상대를 잘못 고른 연구원은 뻘쭘하다는 듯 하하 웃으며, 화면 하나를 그들의 앞에 띄웠다.

원숭이 손과의 거래 내역, 그렇지만 앞선 사례들과는 달리 좋은 일 대신 불행을 먼저 선택한 거래들의 내용이었다.

[실험자 E]

소원: 자신의 왼손이 치료 불가능한 손상을 입을 것

결과: 기생충 괴이의 습격으로 왼팔이 자의로 사용 불가능한 상태가 됐지만, 근력이 초월적으로 강해짐.

[실험자 F]

소원: 자신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망가뜨릴 것

결과: 먹은 상대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 5정이 그의 노모에게 제공됨.

[실험자 G]

소원: 자신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릴 것

결과: 7개월 후, 정체불명의 우주선에 납치됐지만 살아서 돌아옴.

[실험자 H]

소원: 자신의 중첩된 죽음

결과: 어떠한 경우에도 메모한 내용이 보존되는 수첩이 재단에 전달됨.

“우리는 이러한, 일정 선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균형을 맞추려는 성질에 이름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의 손짓과 함께 뒤에 펼쳐진 화면은 곧 큼지막한 세 글자를 써내려갔다.

항상성.

“자신의 최적화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성인 항상성, 원숭이 손은 그것에 종속됩니다.”

말이 끝난 듯하자,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이 간부들 사이를 쫙 타고 흘렀다.

적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괴이를 사용 방법을 뒤틈으로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이견의 여지 없이 대단한 발견이다.

“..흠.”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게 끝인가? 우리를 불러모을 때는 더 걸출한 이유를 제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는 간부의 전원 소집은 커녕 한 명만 있어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안건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를 불러모을 만한 추가적인 무언가를 원했고, 그에 부합하려면 앞서 얘기한 인류구원방책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리고, 연구원은 당연히 아직 끝이 아니란 태도로 끄덕이더니 회의실 문으로 손짓했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서둘러 들어와 대열을 맞추는 연구원들.

“저건..”

“카두세우스..?”

그런 연구원들 각자의 손에는, 괴이들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안전하다고 여겨져 실질적인 격리 해제를 내린 것부터, 위험하고 변수가 많아 강한 격리 절차를 보유하고 있는 것들까지.

이 중에서도 특히 맨살에 닿는 순간 본인을 ‘헤르메스'라 칭하는 자와 강제로 거래를 진행하게 만든다는 ‘카두세우스’.

저울의 형상을 띄고 있으며, 죄의 무게에 따라 심할 경우 심장을 삼켜 버리는 ‘암무트'.

뚜껑이 열리면 어디선가 재앙이 일어나게 된다는 ‘재앙의 상자’는 격리 가능한 개체들 중 최상위에 준하는 보안 절차를 자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연구를 이어나갔고, 하나의 가설을 증명했습니다.”

연구원은 그러한 것들에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

그제서야 간부들은 만면에 놀란 듯한 표정을 띄웠고.

연구원은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 닿기만 해도 목숨이 위험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도둑과 기만의 신, 약 1만 명에 달하는 사용자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뼛속까지 앗아간 헤르메스는 거래 비용이 될 만한 것을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다 비우고 들어가자 오히려 우리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한 도시 내의 죄지은 자의 심장을 모조리 거두어 갔던 사후세계의 괴수는, 세례와 의식을 통해 실험자를 면죄시킨 후 심장을 적출한 채 들여보내자 기꺼이 자신의 심장을 내어줬으며.”

“열면 한 국가를 가벼이 멸망시킬 정도의 재앙이 깃든 상자는..”

그는 말을 그만두고 상자 앞에 멈추더니, 좌중을 한 번 살펴보고는.

-벌컥!

차마 말릴 새도 없이 휙! 하고 상자를 열어버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는 양, 구김살 하나 없이 당당한 몸짓이었다.

“안 돼!”

“이게 무슨..!”

그럼에도 지난날 재앙의 상자가 무슨 일을 발생시켰는지 알고 있는 간부들은 분노하며 벌떡 일어났으나.

상자는 예상했던 것처럼 재앙을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무해한 상태로 그저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안에 품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재앙을 남기는 것이 아닌, 한 번의 재앙을 흩뿌린 후 달콤한 과실을 안에 남긴다.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재앙의 상자로 명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연구원은 그것을 소중하게 들어올린 후, 헝겊 위에 올려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황금빛의 겉표지로 양장되어 있는 한 권의 책이었다. 

“열린 당시에는 재앙을 흩뿌리지만 끝에는 희망을 남기는, 판도라.”

“이것이 우리가 재앙의 상자에게 내리는 새로운 이름이자..”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다시 재앙의 상자, 이제는 판도라의 안에 집어넣었다.

“괴이들, 나아가 세상이 가지는 항상성의 증명입니다.”

*

“괴이들이 일정한 ‘항상’을 유지하려 든다는 것은 이제 여러분들 모두가 아셨을 겁니다. 근데 그렇다면 모순이 하나 생기죠.”

“정말 괴이나 세상이 일정한 ‘항상'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왜 우리의 세상은 망해가는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주위에는 여러가지 표나 차트들이 어지러이 쏟아졌다.

괴이 현상과 불가사의한 일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고, 인구는 그와 반비례하여 줄어만 갔다.

몇백 년 동안이나 비밀 조직으로서 명맥을 이어 나갔던 재단도 더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인류를 구하기 위해 본인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기에 계산에 따르면 40년 가량이 지난 시점에는 재단마저 유지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세상은 다정한 안락사를 향해 시나브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세상의 항상성이 우하향 그래프를 보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그래프 중, 연구원은 우하향 그래프만을 하나로 모아 합치고는 그 위에 테이프를 붙인 후 ‘항상성’ 이라는 글자를 썼다.

“세상은, 인류는 서서히 멸망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항상성은 우리가 급격한 멸망의 가속이나 문명의 회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흐름이 이 그래프대로 유지되게 만들고자 하는 성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우하향 그래프의 모양은, 아무래도 우리의 대응보다 앞서 정해져 있던 듯 합니다.”

더불어 보조 연구원에게 아까 판도라에 집어넣은 황금색 표지의 책을 돌려받은 후, 이를 펼쳐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항상성'이라는 테이프가 붙은 그래프와 정확히 같은 모습의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중간중간 붉은색으로 무언가의 이름이 적혀 있긴 했지만 개형 자체는 차이가 없었고.

그래프의 끝이 나타내는 것은 엄연한 제로(0), 인류의 완전한 멸절을 예고하고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습니다, 사실상 예언.. 멸망을 예언하니 묵시록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지금, 멸망이 확정되어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 자체의 항상성으로 인해 멸망으로 향하는 길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

“그 말이 정확히 맞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바입니다.”

간부들은 그러한 말에 손을 살짝 떨면서도 태연하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설령 집 앞에 운석이 떨어져도 정원에 대한 푸념이나 늘어놓을 그들이 분노가 아닌 일종의 공포를 보인다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일이리라.

“그 항상성을 벗어날 순 없나?”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말은, 미래에는 돌파구가 생긴다는 건가?”

연구원의 말 속 뼈를 발견한 간부의 말에, 연구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님들, 혹시 11년 전에 했던 회의 내용 기억하십니까?”

*

11년 전, 많은 논의가 오고 갔지만 가장 중요했던 내용을 꼽자면 하나였다.

‘이 세상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인가?’

정말 많은 괴이들을 이용했고, 그것이 나타내는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실험자 A]

“네코야, 네코야.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니?”

“그럴 거야, 네코는 그게 확실하다고 생각해.”

[실험자 A]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니?”

[상당히 높은 확률로 시뮬레이션입니다. 2003년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인류의 세 가지 가능성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 인류가 시뮬레이션을 만들 정도의 기술력이 생기기 전에 멸망한다.

2. 기술이 발전하지만, 인류는 시뮬레이션에 관심이 없다.

3. 인류가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기 시작하며, 누군가는 시뮬레이션 안에서 살게 된다.

만약 인류가 3번 가능성에 도달해 시뮬레이션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실제 우주보다 시뮬레이션 우주의 수가 훨씬 많아지기에 우리가 ‘진짜’ 우주에 살고 있을 확률은 한없이 낮습니다.

또한 플랑크 길이를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과, 광속의 제한을 컴퓨터 하드웨어의 연산 속도 제한과, 양자 역학을 사용자가 보는 화면만 렌더링하는 최적화 기법과 결부시키면..]

-실험자 A

Q1: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니?

A: 확실한 시뮬레이션.

Q2: 이 시뮬레이션에는 목적이 있니?

A: 명백한 목적이 있음.

Q3: 우리를 만든 사람은 우리를 처분할 생각이 있니?

A: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처분할 수 있음.

Q4: 너는 시뮬레이션의 실행과 관계가 있는 존재니?

A: 가장 멀리 떨어진 자의 세 번째 눈으로서, 관계가 있음.

사례자의 선택: Q3

결과: 생환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라는 것.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계속된 교차 검증을 거친 재단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자신들의 전원을 간단히 ‘꺼’ 버릴 수 있는 상위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재단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들은 받아들이고 당장 닥쳐오는 멸망을 위해 고군분투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죠, 정말 많은 이론과 논쟁이 오고 갔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시뮬레이션 우주 안에 속해 있다는 결론을 확고히 하는 데 그쳤습니다.”

“지금 와서 이를 부정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오히려 이것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이용?”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라는 게 여러 자료와 실험으로 검증되었다.

그렇다면 시뮬레이션의 목적, 그들이 우리를 관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에는 앞서 보여준 세상의 시뮬레이션 여부처럼 딱히 예시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몇 번이고 곱씹었던 것이기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소설.. 이었지, 아마.”

“맞습니다, 소설이죠.”

연구원은 세계지도가 꾸깃꾸깃 접혀 하나의 책으로 변하는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준 뒤.

책을 펴 구겨진 세계지도의 붉게 칠해진 부분을 짚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누군지 모를 이 시뮬레이션의 주인은, 그 빌어먹을 소설 한 편 쓰겠다고.”

“중국에 사람을 한낱 식사로 여기는 좀비떼를 풀어 아시아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대륙 크기만한 해룡을, 말 그대로 대륙인 척 바다에 숨겨두는 것도 모자라서.”

“독일에 이미 죽어버린 대총통을 연호하는 군단을 풀어놓았다는 겁니다.”

그 책의 다음 장은 아까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던 우하향 그래프.

아까 항상성이라는 테이프를 붙였던 우하향 그래프가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묵시록의 우하향 그래프였다.

“그것도 모자라 엔딩조차 배드엔딩으로 고정시켜 놓았죠, 이게 말이 됩니까?”

“설령 이렇게 진행된 시뮬레이션을 글로 치환시킨다고 해도, 이런 글을 누가 읽겠습니까?”

그는 흥분한 듯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지만, 이내 진정하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아무튼 이 세상은 하나의 소설을 위한 시뮬레이션이니 묵시록의 그래프를 일종의 시놉시스로 생각해봅시다.”

연구원은 그래프의 부분 중 강하게 아래로 꺾이는 부분만을 짚어나갔는데.

“보면 그래프가 한 번씩 크게 아래로 꺾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분마다 쓰여진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특이하게도 아까 적혀 있던 붉은색 이름은 그곳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긴 ‘가짜 구원자’, 여긴 ‘마담 일레이시아’, 여긴 ‘일렉트로’가 출현하는 부분입니다. 약속된 시놉시스에 따라 멸망을 향해 달려가죠.”

그때, 설명을 듣고 있던 간부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1년 전의 ‘일렉트로’ 사건 당시 제압과 격리를 맡았던 간부 D,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렉트로는 그 정도 피해를 내기 전에 사전에 무력화했을 텐데? 그때 날뛰었던 건 오히려..”

일렉트로는 전기를 타고 퍼질 수 있는 전뇌적 괴이였고, 한없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존재하긴 했으나.

연구 C팀의 사전 제보에 힘입어 한발 앞서 고물 컴퓨터에 봉인함으로서 토벌과 격리를 마무리지었었다.

그런 일렉트로가 그래프에서 보이듯 거대한 피해를 내지는 않았기에 꺼낸 의문이었지만.

“맞아요, 저희 연구 C팀이 묵시록을 기반으로 괴이들을 이용해 일렉트로의 정체와 출몰 시기를 분석해 제공했고 D 간부님은 훌륭하게 괴이를 격리했죠.”

그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연구원은 팔을 뻗어 [Electro]라고 써진 붉은 글씨에 X 표시를 그었다.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하나 생깁니다.”

그리고, 그 위에 [Succubus Queen]이라는 이름을 새로 썼다.

사람들의 꿈을 이용해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었던 인류의 악적.

몽마(夢魔), 서큐버스, 꿈속의 연인, 뭐라고 불러도 좋을 그녀는..

“세계가 시놉시스, 즉 항상성을 지키기 위해 일렉트로에 버금가는 피해를 줄 만한 적을 하나 던져 놓은 겁니다.”

전뇌의 망령, 일렉트로의 대행자로서 세계를 원 없이 짓밟았다.

그렇지만, 세계도 이러한 갑작스러운 충당에 해야만 할 작업이 있었으니.

“꾼 적도, 만난 적도 없던 꿈 속 연인이 갑자기 몇 년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모두의 인식이 개변당하였고.”

“우리는 이것까지가 서큐버스 퀸의 고유 능력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기억의 개변이라니, 참 무시무시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토벌 후 서큐버스 퀸에게 관련해 질문을 했지만.

“그건 정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원래는 몇 년간 꿈 속에서 천천히 관계를 쌓아야 하는데, 내가 뭘 하려고 보니까 이미 머릿속에서 나랑 연애 중이었다니까?”

기억의 개변은 그녀의 소행이 아니었다.

거짓인 줄 알고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괴이도 몽땅 가져와 실험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집단 매혹의 초반 단계는, 정말로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고, 우리는 여기서 이 세계가 하나의 소설이자 시뮬레이션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국 소설도 독자가 필요하고, 독자는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선호합니다.”

“아마 다음에 출현할 괴이인 일렉트로는 시뮬레이션의 주인인 작가 입장에서도 많은 공을 들였겠죠.”

초기 시놉시스인 ‘묵시록'에 이름이 적혀 있을 정도니, 아마 예전부터 구상해온 괴이였을 것.

소설에도 시뮬레이션에도 그에 대한 소위 ‘빌드업’ 이 탄탄하게 짜여져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렉트로는 몇 년간 인터넷에 기생하며 다면적인 혼란을 일으켰기에 전부터 굉장한 골칫거리로 여겨졌다.

“그것이 시뮬레이션 내에서 격퇴당한 셈이었으니, 대체는 무조건 해야 할 텐데.”

“그렇지만 이건 결국 임시방편, 그 일렉트로를 대체하는 괴이의 서사는 한없이 모자라겠죠?”

시뮬레이션 내의 서큐버스 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로, 하지만 출현 시기는 코앞.

“그래서 작가는, 곧 세계는 그 서사를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존재한 적 없던 기억'을 억지로 삽입한 겁니다.”

그 정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세계는 집단 매혹의 초반 단계를 본인이 대신 이행하면서까지 시뮬레이션에 정보를 전달했다.

“우리는 이러한 인과와 서사의 연결성, 그리고 그를 유지하기 위한 작업에도 이름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개연성.

“개연성.”

프레젠테이션의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디.

“우리는 여기서, 돌파구를 찾을 겁니다.”

*

“이러한 갑작스러운 개연성의 충당은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연구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원숭이 손으로 인해 팔목만 남은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위화감을 느껴 버린다는 거죠, 저희가.”

서큐버스 퀸의 증언에서 오는 모순, 존재한 적 없던 기억의 출처에 대한 의심, 시뮬레이션과의 결부.

모두 한 번쯤은 의심해본 내용인 듯, 연구원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연구 C팀은 여기까지 유추해 냈고, 나아가 원숭이 손이 이 세계에서 담당하는 역할도 재고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여기서부터 중요한 부분이라는 듯 연구원이 소리가 날 수 없는 박수를 쳤다.

“원숭이 손은, 작가가 시뮬레이션의 개연성과 항상성을 조정하는 일종의 툴이자 매크로인 겁니다.”

“우리 앞서 보여주었던 다른 괴이들을 생각해 볼까요?”

카두세우스, 헤르메스가 먼저 대가를 요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교환'하는 것이기에 이를 통해 세계에 간섭하기는 어렵다.

암무트, 죄의 무게로 심장을 취할 뿐이지 작가의 의도대로 세상에 간섭할 수는 없는 단순 하트브레이커다. 대놓고 기각.

판도라, 그 자체로 묵시록을 포함한 항상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걸로 할 수 있는 건 재앙 뿌리기 정도다.

“그렇지만 원숭이 손은, ‘소원'이라는 입력값을 넣으면 자동으로 개연성과 항상성을 갖춰 세계에 출력해줍니다.”

“뒤틀린 방식으로 소원을 들어준다는 ‘원숭이 손’ 자체가 첫 번째 개연성, 소원과 결과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두 번째 개연성의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실험자 A]

소원: 많은 돈

결과: A는 이틀 뒤 가족의 보험금을 수령함.

“원숭이 손은 많은 돈이라는 입력값을 받았고, 그것을 보험금이라는 방식으로 수령하게 되면 돈을 받는 과정에 ‘개연성'이 생깁니다.”

“더불어, 돈이라는 행운을 얻었지만 가족이 죽었다는 불행이 온 데에서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항상성’을 충족시키죠.”

[실험자 E]

소원: 자신의 왼손이 치료 불가능한 손상을 입을 것

결과: 기생충 괴이의 습격으로 왼팔이 자의로 사용 불가능한 상태가 됐지만, 근력이 초월적으로 강해짐.

“마찬가지로, 원숭이 손은 왼손이 치료 불가능한 손상을 입어야 한다는 입력값을 받았고, 그것이 기생충 때문이라면 ‘개연성'이 생깁니다.”

“기생충 덕분에 근력이 강해졌으니 ‘항상성'도 만족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연구원은 연구 C팀이 원숭이 손을 처음 취득하게 된 시점을 생각해 보았다.

3년 전 연구 C팀의 연구가 모두 한 곳에 집중되기 시작한 시발점.

“이런 식으로 원숭이 손이라는 매크로를 활용해 개연성과 항상성을 조정하다, 갑자기 그런 것 없이 본인의 방식으로 개연성을 충당하려면 힘들 수밖에 없죠.”

본격적인 위화감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관련 조사에 착수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중심에는 원숭이 손이 있었고.

연구원은, 이후 잠시 말을 멈추더니 본인의 팔을 들고 말했다.

“제 팔도 마찬가지이지만, 살짝 경우가 다릅니다.”

교환을 위한 원숭이 손의 자체의 공격이 개연성, 받은 돈이 항상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손이 터진 이유도 단순 교환 때문에 터진 것이 아니라 별개로 터지기까지의 ‘개연성'이 존재한다.

“제가 팔에 기폭제를 심어놨었거든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아무래도 팔이 어떠한 일로 사라지기까지 마냥 기다리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돈도 마찬가지로 사전에 조율을 거쳐 ‘원숭이 손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돈'을 얻는 상황을 만들었다.

무엇을 숨기랴, 프레젠테이션에 조금 늦으면서까지 준비한 것이 바로 이 트릭이었다.

“뭔가 좀 감이 오십니까?”

핵심은 ‘항상성'과 달리, ‘개연성'은 그들이 얼마든지 유도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막아내거나 최소한 억제할 작가의 매크로는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

연구원은 심호흡을 하고는,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한 문장을 뱉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단은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할 겁니다.”

*

“설명드리겠습니다.”

재단의 모토에 전면으로 반하는 발언에 대한 당황스러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연구원은 설명을 시작했다.

“스크립트에 따르면, 지금 시점의 우리는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시작은, 묵시록의 그래프에서 현재 연도가 위치한 부분을 짚어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갑작스러운 인류의 부흥으로 이 그래프를 위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자원과 기술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항상성도 방해가 될 테고.”

“그러니까 차라리 우리 손으로 이 그래프를 아래로 끌어내리자는 겁니다.”

세상을 최전선에서 지켜왔던 그들의 손으로, 이제는 멸망을 향해.

불온한 문장이었지만, 간부들은 숨죽여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크립트에는 당연히 위배되기에. 작가는 스크립트대로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쓸 겁니다.”

“즉 항상성의 유지죠.”

하지만, 어떻게 항상성을 유지할 것인가?

편리하게 작가의 매크로가 되어주던 원숭이 손은 그들의 손에 들어왔고, 몇백 년간 세계를 지켜왔던 핵심 조직이 변심했다. 

이 상태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와 재단을 막아내야 하는데, 오랜 세월이 쌓인 재단을 막아낼 존재에 대한 개연성을 채울 수 있을까?

항상성을 유지하기에는 개연성이 모자라고, 개연성을 유지하기에는 스크립트라는 항상성이 박살난다.

“딜레마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미 시뮬레이션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떠났다.

따라서 초기화, 세이브 로드, 리셋, 회귀, 뭐라고 불러도 좋다.

“시뮬레이션을 이런 논의가 일어나기의 이전 상태로 되돌린다.”

그런 수를 쓴다면 항상성도 재단이 인류를 공격하기 전이기에 안정되고.

이전 상태로 되돌려야 하는 상황에 대한 개연성도 그들 덕분에 넘치고 흐른다.

다시 말하지만, 항상성과 달리 개연성의 방향은 그들이 유도할 수 있다.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되돌아간 시뮬레이션에서 작가의 공작으로 이런 논의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 상황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났습니다.”

계획의 중심은, 또 다시 원숭이 손.

[실험자 H]

소원: 자신의 중첩된 죽음

결과: 어떠한 경우에도 메모한 내용이 보존되는 수첩이 재단에 전달됨.

“원숭이 손은 자신의 중첩된 죽음이라는 입력값을 받았습니다. 중첩된 죽음이란 한 번 죽는 것도, 부활해서 여러 번 죽는 것도 아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여러 번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중첩(重疊).

일반적인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선에서는 이것이 절대 발생할 수 없기에 모순이 생긴다.

하지만, 만약 시간이 한두 번을 넘어서 사실상 무한하게 돌아간다면?

루프(Loop).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무한한 반복.

“그것을 이용하면, 원래라면 절대로 불가능할 ‘자신의 중첩된 죽음'에 개연성이 생깁니다.”

“그러려면 루프를 유지할 수단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논의를 리셋한 후에도 계속 반복해야 하며 작가가 이를 방해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연구원은 옆을 휙 보더니,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보조 연구원이 계속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던 노트를 뺏어들었다.

보조 연구원은 울상을 지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게 이 어떠한 경우에도 메모한 내용이 보존되는, 실험자 H가 변한 수첩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회의의 내용을 이 수첩에 모두 기록했고 이는 설령 시뮬레이션이 되돌아간다 해도 유지될 것이며, 우리는 이걸 보고 다시 이러한 논의를 거친 후 인류를 공격할 겁니다.”

연구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간부들의 안색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시간은 또 다시 반복되겠죠, 그리고 우리는 그 무한한 루프와 시간 속에서 항상성을 깰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스크립트를 부수고, 예정된 멸망이자 배드 엔딩을 해피 엔딩으로 바꿔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험자 H, 하워드 밴스가 자신이 처할 루프만큼의 죽음을 감수하고서도 하나의 수첩이 되기를 택한 이유이자 꿈, 그리고 행복!”

“..즉, 항상성의 충족입니다.”

말을 마친 연구원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보았다.

그런 그에게, 한 나이 든 간부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혹시 이것까지가 하나의 거대한 스크립트이면 어떡하나?”

“..예?”

“기존 스크립트, 그러니까 묵시록은 스토리의 개연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고, 리셋하여 항상성을 부수고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마저 하나의 스크립트라면 어떡하냐는 말일세.”

“아.. 하하..”

연구원은 허탈하게 웃더니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창문 너머로 본 햇살이, 해가 그날따라 조금..

“그건 비약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기면 작금의 모든 게 다 작가가 정해놓은 의도라는 건데.”

거대한 눈동자처럼 보였다.

어지럼증 때문인지, 해 때문인지, 세상이 자꾸 깜빡거렸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는 휘청거리며 태양에게.

아니, ‘나'에게 가만히 뇌까렸다.

숨이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만 같은, 간절한 태도였다.

“한 방 먹어 주신 거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저 그를 향해.

“나의 개같은 창조자여.”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

어느 날, 재단은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도시에는 인간의 시체로 산을 쌓아올리는 괴물들이 즐비했고.

바다에서는 대륙만한 해룡이 승천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으며.

그림자들은 지면의 속박을 벗어나 제 주인의 목숨을 취하려 들었다.

.

.

.

이윽고 하늘에 뜨인 눈이 한 번 깜빡인 후, 세상이 일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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