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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껌

익명
2026-10-02 23:53

1. 

최근 매운 음식에 맛을 들였다. 

모처럼 강원도에 출장 갈 일이 생겨, 어제 밤에 맛집을 한번 검색해 보았다. 

검색어는 ‘강원도의 매운 요리’.

[매운연탄갈비, 화진매운순대국, 천곡매운순대국, 정말매운집]

몇 가지가 검색되었다. 

그중 눈에 띄었던 것이 춘천시 후평동 소재의 ‘정말 매운 집’이라는 곳이었다. 

심상치 않은 가게 이름이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인지 출장지에서 일하는 내내 그 음식이 떠올라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음식에 대한 호기심만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남들은 ‘타고난 미식가’라며 혀를 차곤 했다. 

오전 업무를 조금 서둘러서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움직였다. 

좋은 요리는 함께 즐겨야 제맛이기 때문에, 

매운 음식은 질색이라고 정색하는 오 주임을 억지로 끌고 갔다. 

생각보다 멀고 외진 곳이어서 억지로 끌려가는 오 주임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 거, 얼굴 좀 펴! 내가 사면 될 거 아냐.”

내가 산다는 말에 오 주임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대리님, 가게는 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여기는 사람이 다니는 길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유명한 집 맞아요?”

“원래 정말 맛있는 집은 이렇게 외진 데 있는 거야.”

반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돌아다녀 본 결과로 보면 말이다. 

“어 저기 있다. 저거 맞죠? ‘정말 매운 집’. 그렇죠?”

외진 곳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낡은 기와집 두 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구멍가게였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정말 매운 집’이었다. 

볼품없이 허름한 외관이었지만 오히려 이 모습이 나는 만족스러웠다. 

물론 오 주임의 표정은 보기 좋게 찌그러졌지만 말이다.

“아! 대리님! 이런 데서 어떻게 밥을 먹어요. 외려 돈을 준다 해도 안 먹겠다!”

“야, 뭐 어때서 그래. 갖출 건 다 갖췄잖아, 옆에 매점도 있고.” 

-꼬르르륵

그때 오 주임의 배에서 밥 달라는 소리가 울린다. 

민망했는지 오 주임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듯한 느낌이다.

“아, 알았어요. 일단 어서 들어가죠. 배고파 죽겠다고요.”

-드르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외관보다 더 볼품없는 내관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갈라져 검은 때가 잔뜩 낀 나무 테이블이 네 개 정도 있었고, 

통나무를 아무렇게나 잘라 만든 의자가 테이블마다 세 개씩 비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시커먼 낙서들로 가득했고, 

전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이며 어둠과 가까스로 싸우고 있었다. 

나와 오 주임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건 그렇고 손님이 왔는데 주인은 인사도 없고, 얼굴도 안 비친다. 

얼마나 음식에 자신 있는지는 몰라도 응대 면에서는 빵점이었다.

“저기요~ 주문 좀 할게요.”

소리를 내자, 

주방 쪽에서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줌마 한 분이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표정은 심드렁했고, 전체적으로 펑퍼짐한 모습이었다.

“두 개 주면 되나?” 

주인이 말했다. 

그것도 반말로.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아, 저기 인터넷 보고 왔어요. 여기가 그렇게 맵다면서요?”

“두 개 주면 되나?”

당황스러웠다. 

아까부터 다짜고짜 두 개를 주겠다는 말만 한다. 

“예? 메, 메뉴... 없나요?”

“여긴 메뉴가 한 가지뿐인데.”

말을 하며 주인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무렇게나 벽에 붙어있는 누르튀튀한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조악한 글씨로 ‘연탄 갈비’라고 적혀 있었다. 

그 외에는 메뉴가 적혀 있지 않았다. 

“아, 예 연탄 갈비만 하는군요. 저걸로 주세요. 소문처럼 매운 맛 기대할게요.”

내 말이 끝나자, 

주인이 대답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아 진짜. 맛집이고 뭐고, 여기는 손님 맞을 자세가 안 돼 있네요.”

말없이 앉아 있던 오 주임이 불쾌한 듯 말을 꺼냈다. 

나 역시도 불쾌했지만 요리만 맛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오 주임,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서비스 좋은 곳치고 참맛을 아는 데가 별로 없어. 이런 데서 먹어야 입이 고급화가 되는 거라고.”

지지난주에는 김해에서 불닭을 먹었고, 

지난주에는 제주도까지 가서 갈치조림을 먹고 왔다. 

이 정도면 음식에 대해 남에게 왈가왈부할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다. 

“아, 알았어요. 대리님이 사 주시는 거니까 참고 먹죠 뭐.”

10분쯤 기다리자 요리가 나왔다. 

특이한 건, 

주방에서 고기를 미리 굽고, 자르기까지 해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주인이 고기가 든 접시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고는 익숙한 솜씨로 밑반찬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콩나물, 김치, 절인 양파가 끝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놋쇠그릇에 담긴 공깃밥 두 개를 테이블에 놓고 주인은 주방으로 돌아갔다. 

“아, 잘 먹으란 말도 안 하네. 정말 뭐야 저 사람.”

오 주임은 주인의 태도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뭐, 일단 음식부터 먹어 보자고. 맛있으면 다 용서가 되는 거야.”

두툼하게 토막난 고기에서 연탄 특유의 향이 허연 김과 함께 올라온다. 

향을 빼고는 일반 고기와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색깔도 평소에 구워 먹던 고기처럼 검었고. 

그렇게 내가 음식을 관찰하는 사이, 

오 주임이 먼저 젓가락을 들이댔다. 

“일단 먹고 보자더니,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 먼저 먹습니다.”

큼직한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입에 넣는 오 주임. 

배가 많이 고팠는지 난폭하게 턱을 움직이며 씹기 시작했다. 

“음, 음, 이런 건 쌈에다 싸서...”

오 주임이 말을 하다 멈춘다. 

그리고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아, 아, 아, 아아아악!! 매워! 매워!!!”

오 주임이 소리를 지르며 씹고 있던 고기를 식탁에 뱉는다. 

그리고 황급히 물을 들이키기 시작한다. 

내 물까지 마시고도 성에 안 찼는지, 

혀를 내밀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아니, 그렇게 오두방정 떨 정도야? 내 살다 살다. 하하하.”

애당초 매운 음식을 싫어한다고는 했지만, 

다 큰 어른이 돼 가지고 어린애가 청양고추라도 씹은 것마냥 오버를 하는 게 우스웠다.

“하아, 하아, 대, 대뤼뉨이 머거 보쉐요.”

오 주임이 내 말에 기분이 조금 상했는지, 혀를 내민 채 억지로 대꾸했다. 

나는 오 주임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오른 쪽 어금니로 조심스럽게 두어 번을 씹자, 

연탄 특유의 향과, 고기의 육즙이 어우러져 입안 가득히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내심 ‘별것도 아니네’ 라는 생각을 하며 씹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한 일곱 번쯤 씹었을 때일까. 

어금니가 약간 얼얼해진 느낌이 나더니 갑자기 혀끝에 강렬한 통각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더 이상 고기를 씹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입안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으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정말 엄청나게 매운 맛이었다. 

지난주에 먹은 갈치조림보다, 

지지난주에 먹었던 불닭보다 몇 배는 더 매웠다. 

나는 “쓰읍” 하고 입 안에 바람을 한 번 집어넣은 다음, 씹다 만 고기를 다시 씹기 시작했다. 

씹을수록 매운맛은 더욱 강해졌고 어느새 내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꿀꺽, 으으윽...”

간신히 삼키는 데 성공했는데, 

왠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거 봐요. 맵죠? 이거 어떡할 거예요.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오 주임이 아까보단 조금 나아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뭐가? 난 오 주임처럼 뱉지도 않았는데. 마, 맛있기만 하구만 뭘.”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한 조각을 삼킨 것만으로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래요? 그러면 남기지 말고 다 드셔야 돼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오 주임이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래 내가 다 먹을 거다. 커리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쯧.” 

그리고는 다음 고기를 향해 젓가락을 움직였다. 

물론 이를 악물고 말이다. 

......

......

“아주머니 여기 얼마예요?”

계산을 위해 주인을 불렀다. 

결국 고기는 반도 못 먹었지만 오 주임은 그것만으로도 놀랍다는 눈치였다. 

“만오천 원.”

여전히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봐요, 아줌마. 무슨 장사를 그렇게 해요.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니에요?”

오 주임이 아까부터 주인의 태도에 불만을 갖더니, 드디어 폭발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주인은 오른손만 내민 채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아, 예. 여기 있습니다. 정말 맵네요.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주인이 내민 손에 돈을 올리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돈을 받은 주인이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돈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식탁을 치우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주인에게 오 주임이 말을 걸었다.

“아줌마. 여기 뭐, 껌 같은 거 없어요? 이렇게 매운 걸 팔면서 입가심거리라도 있어야지.”

거슬리는 말투였지만 맞는 말이었다. 

아직도 입안이 매워서 미칠 것만 같았는데, 

달짝지근한 껌이라도 하나 씹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 그래요 아주머니 혹시 껌 있나요?”

내가 말했다. 

그릇을 한쪽으로 치우고, 막 걸레로 식탁을 닦던 주인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껌?”

주인이 짧은 한 글자를 내뱉고는 표정 없이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요 껌. 없죠? 있을 리가 있나. 에휴.”

오 주임이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였다.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있어.” 

주인이 말했다. 

막 몸을 돌리던 차여서 우리는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아, 그래요? 있으면 하나만 주시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지.”

주인이 대답을 하더니 갑자기 왼팔 소매를 걷기 시작했다. 

팔꿈치까지 올려서 소매를 고정시켰다. 

“갑자기 소매는 왜...... 엇?”

오 주임이 말을 하다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주인의 팔 여기저기에 살점이 뜯겨 나간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살점이 뜯겨 나간 곳에 하얀 뼈까지 보였다. 

불쾌한 표정을 짓는 우리에게 주인이 우리 쪽으로 팔을 올렸다.

“자, 껌이야. 떼서 씹어.”

자신의 팔을 씹으라는 주인. 

입가에는 엷은 미소까지 비친다. 

우리는 잠시 벙찐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가 오 주임이 몹시 흥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난해 지금? 이 가게 신고할 줄 알아! 대리님 나가요. 언능!”

오 주임이 씩씩거리며 문을 나섰다. 

“정말 불쾌하네요.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물론 나 또한 기분 나쁘긴 마찬가지여서 적잖이 인상을 써 주고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는 오 주임이 우두커니 서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기분 풀어, 오 주임. 그나저나 정말 매웠어. 캬~”

오 주임의 어께를 두어 번 두드리며 내가 말했다.

“저는 고기 한 점 먹었습니다. 그것도 먹다 뱉었죠. 이게 뭐예요 정말!”

오 주임이 사납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알았어! 밥 한 번 더 사면 될 거 아냐. 남자가 이런 체험도 해 보고 해야지. 허허, 안 그래?”

“하아. 저기서 껌이나 한 통 사 주셔요.”

오 주임이 체념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는 음식점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구멍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저... 콜록, 콜록.”

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음식점만큼이나 청결하지 못한 내부였다.

“어엉? 손님? 워메 이게 얼마만이나?”

백발이 무성한, 7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이 우릴 맞이했다.

“손님들 뭐 사실 거드래요?” 

음식점 주인보다는 손님 맞는 자세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저기, 껌은 어디 있나요? 지금 너무 매운 음식을 먹어서 많이 단 껌이면 좋겠는데.”

내가 말했다. 

그러자 주인이 자신의 뒤쪽에 있는 선반 윗부분을 뒤적뒤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 보자. 푸라보노, 하이트이, 티스마일, 음... 단 껌은 없는데.”

무설탕 껌 위주로 비치를 한 모양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거라도 달라고 말하려는 참에, 

오 주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그 앞에 하얀 통은 뭐예요. 그 안에, 껌 같은데. 그거 껌 아니에요?”

오 주임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과연 하얀 통이 보였다. 

둥그런 타원형의 통이었는데 뚜껑이 열려 있어서 내용물까지 보였다. 

약간 볼록한 정사각형, 흔히 씹는 껌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려는데 그 앞을 주인이 막고 섰다.

“이건 안 돼. 껌이지만 껌이 아니네. 이건 안 돼.”

“아~ 그거 한 번만 보게 해 주시면 안 돼요? 그러니까 괜히 궁금하잖아요.”

괜히 호기심이 발동한 내가 말했다. 

하지만 주인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쳇, 뭐야 파는 게 아니면 어디 숨겨 놓던가. 음식점 주인은 자기 팔이 껌이라지 않나. 참 이상한 동네네 여기.”

오 주임이 툴툴거렸다. 

순간 주인의 눈이 부릅뜨이는 것이 보였다.

“이보서! 아까 전에 무얼 봤나?”

호령에 가까운 주인의 소리에 오 주임이 화들짝 놀란다.

“에, 예? 무, 무슨...?”

“봤나? 옆집 주인 팔 봤나?”

오 주임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봤어요. 혹시 껌 있냐고 물어봤더니, 자기 팔이 껌이라고 떼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나 참.”

그 말을 들은 주인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할아버지. 그냥 푸라보노 한 통 주세요. 오백 원이죠?”

내가 말했다. 

왠지 요상한 분위기가 생기는 것 같아 어서 나가고 싶었다.

“아니다. 그냥 이 껌 줄게. 이 껌이 무지 단 껌은 맞다.”

주인이 말하며 흰 통에서 껌을 한 움큼 움켜쥐고는 우리에게 내밀었다. 

나와 오 주임은 얼떨결에 그 껌을 손에 받았다.

“괜히 이러시니까 오히려 씹기 싫어지잖아요. 그냥 푸라보노 주세요.”

선뜻 내키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주인이 내 말을 무시한다.

“그 껌, 절대 삼키지 말고 단물 빠지면 뱉어. 이것만 명심하면 된다.”

“아니 그냥 푸라보노...”

“아, 이거 진짜 단데요. 대리님? 매운맛이 싹 가시네. 와, 이 껌 뭐야.”

내 말을 끊고 오 주임이 말했다. 

이미 껌 하나를 입에 넣은 모양이었다.

“오 주임! 지금 할아버지가 이상한 말 하는 거 못 들었어?”

“대리님도 그냥 그거 씹으세요. 푸라보노보다 백 배는 낫겠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주인을 바라보았다.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껌 씹기를 권하는 표정이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어차피 공짜로 받은 껌이니만큼 나도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그작.

껌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입안 가득 단맛이 퍼진다. 

포도 향 같기도 하고, 사과 향 같기도 한 청량한 맛이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 가득 단맛이 가득 찼고, 어느새 입안을 지배하던 매운 느낌도 싹 사라졌다. 

“명심해야 돼. 절대 삼키면 안 된다.”

정신없이 껌을 씹는 우리에게 주인이 재차 경고의 말을 해 왔다. 

뭐 충분히 알아들었고, 껌을 삼키는 취미도 없었다. 

“예 알겠어요. 저희 그럼 가 볼게요. 껌, 감사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조금 수상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기똥차게 단 껌인 것은 분명했다.

달다. 달다. 달다. 

씹을수록 단맛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단맛이 강해진다. 

껌이 아니라 사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탕과는 달리 그 부피가 줄어들지 않는다. 

실로 놀라운 껌이었다. 

일터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 신기한 껌을 음미하느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언젠간 단물이 빠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각자의 턱만 바쁘게 움직였다. 

대체 무엇으로 이런 껌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연신 감탄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우리가 그나마 대화다운 대화를 시작한 것은 일터에 도착해서부터였다.

“아, 아. 와. 이거 정말. 미치겠네요, 이 껌. 대박이네.”

오 주임이 말했다. 

황홀감에 빠져 있는 목소리였다.

“질겅, 질겅, 응. 이건 진짜. 질겅, 질겅, 와, 말을 못 하겠네. 질겅, 질겅.”

정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내 턱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몸 자체가 이미 껌에 푹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단물이 씹는 족족 흘러나온다. 

미식가라고 자부하던 내가, 구멍가게에서 우연찮게 얻은 조그만 껌 따위에 매료될 줄이야. 

괜한 위화감 때문에 이 껌을 끝내 거절했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리님, 음, 음, 몇 개에요? 저는 열두 개인데.”

아까 받은 껌의 개수를 묻는 모양이었다. 

쥐고 있던 손을 펴 껌의 개수를 헤아린다. 

“음, 열두 개. 나도 열두 개네.”

내 말과 동시에 오 주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또 다시 서로가 침묵을 지켰다. 

단지 일정한 리듬의 껌 씹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단맛에 취하며 우리는 각자의 업무를 시작했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찌나 껌을 씹었는지 턱이 아파 올 정도였다. 

잠시 기지개를 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오 주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껌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퉤.”

손바닥에 껌을 뱉었다. 

그런데 뱉자마자, 껌을 달라고 아우성치듯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조금 있으니 현기증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가 점점 몸 전체에 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오한에, 발열 증상까지 오는 것 같았다.

결국 살펴보는 것을 포기하고, 황급히 뱉었던 껌을 다시 입에 넣었다. 

이쯤 되자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혹시 마약이라도 들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에는 오 주임도 있었다. 

내가 느낀 불안감을 오 주임에게도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 오 주임, 이 껌...”

하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다. 

오 주임과 함께 들어온 두 명도 뭔가 씹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오 주임, 너 설마... 껌 줬어?”

내 말에 오 주임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줬어요. 아까 전에 오 부장님이랑, 박 대리님한테도 줬답니다. 다들 난리가 났어요. 하하.”

오 주임과 함께 들어온 두 명은, 오 주임의 입사 동기인 양 주임과 이 주임이었다. 

셋이서 자주 뭉쳐 다니는 편이었다. 

“와, 이거 진짜 끝내 줘요. 어떻게 이런 껌이 있을 수 있죠?”

방금 내게 말을 꺼낸 사람은 양 주임이었다. 

덩치가 아주 컸고, 파마머리를 하고 있다. 

“오 주임. 이 껌 혹시 뱉어 봤어?”

내가 물었다. 

나와 같은 증상을 겪었다면 그렇게까지 낙천적일 수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뇨. 아직 뱉은 적은 없었어요. 

 아, 삼킨 적은 있어요. 곧바로 새 껌을 입에 넣었지만.” 

오 주임이 말했다. 

순간, 

그 구멍가게에서 주인이 한 말이 떠오른다.

-명심해야 돼. 절대 삼키면 안 된다.

“오 주임! 아까 그 주인이 삼키지 말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오 주임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아~ 맞다. 그랬었죠, 하하. 뭐 그런데 별일 있겠어요? 그래 봐야 껌인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왠지 심각하게 생각한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거는 있어요. 씹다 보면 진짜 미친 듯이 삼켜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거 말이에요.

 식도를 넘어갈 때는 어떤 느낌일지, 위 안에서도 계속 단맛이 생겨날지, 괜히 막 느껴 보고 싶더라고요.”

마치 신앙 간증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오 주임은 이 껌에 깊이 빠진 것 같았다. 

물론 나 역시도 삼키고 싶은 욕망은 있었다. 

그때 나를 막아준 것은 다름 아닌 미식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니까 음식의 요구 사항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라면은 절대 생으로 먹지 않고, 게 요리의 껍질은 반드시 벗겨서 먹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껌은 씹어서 단물을 즐기는 음식일 뿐, 

절대 삼켜서는 안 된다는 게 내 법칙이었다. 

“그럼 몇 개나 남은 거야?”

오 주임에게 물었다.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으니 이제 많이 줄어들었겠지.

“여섯 개 남았어요. 이건 다른 사람 안 주고 저만 먹으려고요. 히히.”

“어? 그런 게 어디 있어. 적어도 우리한테는 하나씩 더 줘야지!”

이 주임이 말했다. 

비교적 덩치가 작고, 피부가 검은 친구였다.

“하는 거 봐서 줄게. 크큭.”

“알았어. 잘 할 테니까 하나만 줘. 나 방금 삼켰단 말이야!”

양 주임이 애원하듯 말한다. 

그러자 오 주임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껌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아아아, 고마워 으읍, 질겅, 질겅, 질겅.”

껌을 받자마자 양 주임이 게걸스럽게 씹기 시작한다. 

산만한 덩치가 껌 하나에 집착하니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여전히 마음속의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지만 별일 없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껌을 삼킬 마음은 없었지만 말이다. 

......

......

퇴근 시간.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 오 주임. 먼저 올라갈 테니까, 이 부장님 말 잘 듣고, 마무리 잘 해. 다음 주에 보자고.”

당일치기 출장이었기 때문에 저녁 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가야 했다. 

같이 내려온 사람들 중 나만 그런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3일이나 더 있다가 올라온다. 

이것은 순전히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진 까닭이었다. 

“헤헤헤, 대리님 피곤하시겠어요. 내일 오전에 바로 출근하셔야 할 텐데.” 

오 주임이 웃으며 얘기한다. 

“얄밉기는, 하여튼 난 간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아, 대리님 잠깐만요.”

오 주임이 나를 부른다. 

“저, 껌 하나만 주고 가시면 안 돼요? 어느새 바닥이 나 버려서...”

“응? 그 많은 걸 벌써 다 씹었다고?”

“아 뭐, 제가 네 개쯤 삼키고... 사람들 나눠주고 하니까 벌써 바닥나 버렸어요.

지금 입안에 있는 게 마지막이에요.”

나는 처음 씹었던 껌을 여태 씹고 있었는데 오 주임은 벌써 껌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역시 미식가와 일반인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가볍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주머니에서 껌 한 개를 꺼냈다. 

“혹시 말이야. 껌이 다 떨어진다고 새벽에 전화하거나 하지는 마. 나 오늘 엄청 피곤할 것 같으니까.”

말을 마치고 오 주임에게 껌을 휙 던졌다. 

오 주임이 활짝 웃으며 그 껌을 받는다.

“예, 그럼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히히. 대리님 수고하셨슴다!”

껌 한 개에 저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이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빨리 도착해도 밤 10시는 훌쩍 넘길 것 같았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주임과 양 주임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가을 공기가 물씬 느껴진다. 

그리고 껌을 씹는 턱은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

......

“여보세요? 어 나야. 

 

 그래 지금 차 기다리고 있어. 은비는? 숙제는 다 했대? 

 

 그래, 어 바꿔 줘. 

 

 음... 어, 은비니? 그래 아빠야. 숙제는 다 했니? 

 

 그래. 착하다 우리 딸.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치킨? 

 

 밤중에 기름진 거 먹으면 별로 안 좋은데.

 

 아, 그래, 그래 알았다. 아빠가 치킨 사 갈게, 

 

 대신에 아빠 조금 늦게 들어가도 엄마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야 해. 

 

 그래 그래, 우리 딸 아빠가 최고로 사랑한다. 

아, 은비야 지금 기차 왔다. 아빠 끊을게. 이따가 봐요~”

......

......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다보는 창밖의 야경이 아름답다.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 든다. 

아마 곧 잠이 들겠지. 

서서히 눈꺼풀이 감겨 온다. 

그 순간, 

불현듯 오늘 오후의 일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 아줌마는 왜 자기 팔을 껌이라고 한 걸까?’

‘그 할아버지는 왜 껌을 삼키지 말라고 한 걸까?’ 

......

'BBQ를 사 갈까, 교촌을 사 갈까.'

하지만 이내 내 마음은 딸에게 사 줄 치킨을 생각하고 있었다.

2.

10시 10분. 

예상대로 10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눈이 빠져라 나를, 

아니 치킨을 기다리고 있을 딸을 위해서라도 서둘러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 택시!”

역 앞에 늘어서 있는 택시 중에 하나를 붙잡았다. 

“문래동이요.”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 

기사는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부쩍 추워졌어요. 그렇죠? 문래동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게요. 밤 되니까 더 춥네요. 문래역 1번 출구 쪽으로 가 주세요.”

내 말이 끝나고, 택시가 움직였다. 

서울역 앞이라 비교적 차량이 많은 편이었다.

“저 아저씨, 신촌 로타리 말고, 후암동 쪽으로 가 주세요. 급해서 그런데 조금 빨리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죠. 어디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나 봐요?”

“예, 당일치기로 강원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정말 피곤하네요.”

택시가 남대문 경찰서를 끼고, 후암3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상대로 차량이 거의 없는 한산한 도로였다.

“그래도 어떻게 저녁은 드셨나 보네요. 껌을 씹고 계신 걸 보니.”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않았다. 

점심 먹고 씹은 껌을 여태 씹고 있었으니 말이다. 

갑자기 출출함이 느껴진다. 

집에 가면 무슨 요리를 먹을지 생각해 봐야겠다.

“무슨 껌 씹으세요? 향이 참 좋네. 방금 씹으신 것 같은데, 저도 하나만 주시죠. 허허.”

기사가 넉살 좋게 웃는다. 

하지만 선뜻 건넬 수 있는 껌이 아니었다. 

“음... 이 껌은 웬만하면 권해 드리기 힘드네요. 마치 마약 같은 껌이라.”

“아, 그런 껌 좋아합니다. 운전장이에게는 껌이 참 중요한데, 그런 껌들이 졸음 운전도 방지하고 좋죠.”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계속 씹게 만드는 이 껌의 중독성이 운전수와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까 전에 껌을 뱉었을 때 느꼈던 그 이상 증세, 

그리고 찝찝한 가게 주인의 경고, 등을 생각했을 때 이 껌을 주기는 힘들었다.

“허허허. 드리고 싶어도 제 입에 있는 게 마지막 껌입니다. 강원도에서만 파는 것이니, 어디 구하기도 힘들 거고요.”

내 말을 들은 기사가 살짝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한다. 

차는 어느새 영등포 로타리를 타기 시작했고 문래역까지는 10분도 채 안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끼이익.

차가 급정거를 했다. 

몸이 크게 휘청거린다.

“저 새끼가 신호도 못 보나! 야 이 개새끼야!!”

안전벨트가 아니었으면 다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목이 약간 뻐근했지만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아, 괜찮으신가요? 요즘 하여튼 자전거 때문에 미치겠다니까요.”

“아, 예 괜찮습니다. 늦은 밤에 자전거는 조금 위험하죠.”

기사가 다시 엑셀을 밟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딸에게 사 줄 치킨에 관한 생각이었다. 

역에서 가까운 교촌치킨 쪽으로 많이 기울긴 했지만 말이다.

-아그작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석에서 난 소리였다. 

난 기사를 쳐다보았다.

“질겅, 질겅.”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아, 아저씨 설마?”

내 시선을 느꼈는지 기사 멋쩍게 웃기 시작한다.

“아아, 밑에 떨어졌던 거예요. 어차피 버릴 거, 제가 그냥 손으로 털고 입에 넣었습니다.”

차가 급정거하면서 주머니에 있던 껌 하나가 밑으로 떨어졌었나 보다. 

용케 그걸 기사가 주운 모양이고. 

“아, 뭐 떨어진 거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정말 맛있군요, 이 껌.”

“후우... 뭐 어쩔 수 없죠. 단, 뱉을 때 고생 좀 하실 겁니다.”

“... 질겅, 질겅, 질겅”

기사는 대답하는 대신 연신 껌만 씹어 댔다. 

내가 처음 껌을 씹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

......

“아, 여기서 세워 주세요.”

-끼이익

문래역 1번 출구 앞에서 택시를 멈췄다.

“질겅, 질겅, 예. 7000원 나왔네요. 질겅, 질겅, 와, 이거 단물이 계속 나오네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받은 후 문을 열었다. 

“아 참, 그 껌 삼키지는 마세요.”

“예? 왜요?”

“처음 껌을 준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삼키면 안 된다고.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허허허. 알겠습니다. 그러죠 뭐. 감사합니다, 손님~.”

반응이 그저 그렇다. 

오 주임처럼 씹다가 삼킬 게 눈에 훤했다. 

어쨌든 택시는 제 갈 길로 갔고, 나 또한 몸을 움직였다.

......

......

-딩동, 딩동

“은비야 아빠 왔다~”

10시 30분. 

결국 예상했던 시각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놈의 치킨이 나오는 데 10분이나 걸릴 줄이야.

“자기 왔어?”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나를 반긴다. 

“아빠~~~ 치킨, 치킨!”

아내 바로 뒤에서 내 딸 은비의 소리가 들린다.

“은비 너~ 맨발로 현관에 나오지 말랬지! 어서 들어가.”

아내가 딸을 나무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겨운 집 냄새가 물씬 풍겨 온다.

“후우. 오늘 정말 피곤했어. 재수 없게 당일치기 출장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피곤할 텐데 어서 씻고 나와.”

“아빠, 치킨, 치킨!! 무슨 치킨 사왔어?”

귀여운 여덟 살배기, 내 딸 은비가 다리에 매달린다. 

누굴 닮았는지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다. 

“짠~ 은비가 좋아하는 교촌치킨~”

은비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번지기 시작한다.

“와아~ 교촌이다. 아빠 짱!”

“은비야. 손 씻고 먹어야지. 잘 밤이니까 콜라는 조금만 마셔야 해. 알았지?”

“응응, 알았어.”

귀여운 딸의 모습을 보니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자기 밥은 먹었어?”

아내가 내게 물었다. 

“아, 밥 아직 못 먹었어. 집에 뭐 맛있는 거 있어?”

옷을 벗으며 내가 말했다. 

왠지 어제 마트에서 산 ‘3분 정통 스파게티’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웬 껌을 그렇게 씹고 있어?”

“아아, 그냥. 나 어제 산 스파게티 좀 해 주라. 물은 조금만 넣는 거 알지?”

껌에 대한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 받아 놨어~”

문 밖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빨리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밥을 먹으려면 껌을 뱉어야 할 텐데, 

아까처럼 몸에 이상이 올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밤새 껌을 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물 밖으로 손을 내밀어 아까처럼 퉤 하고 껌을 뱉었다. 

“......”

괜찮았다. 

침이 고이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오한이 나지도 않았다. 단순히 과민했던 탓이었을까? 

아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 뱉을 때는 단물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

......

목욕을 마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은비가 즐거운 표정으로 신나게 치킨을 먹고 있었고, 아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그, 은비야, 옷에다가 닦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니.”

“으응, 알았어.”

먹는 모습을 보니 배가 몹시 고파 온다. 

“자기야, 어서 와. 배고프겠다.”

아내가 자신이 있는 식탁 쪽으로 손짓을 한다. 

식탁에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스파게티가 눈에 들어온다. 

“와, 마트에서 산 것치곤 엄청 먹음직스럽네. 거 봐 잘 샀지.”

식탁 앞에 의자를 빼 앉았다. 

치킨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은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은비가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입 주위가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은비의 귀여운 볼을 손으로 살짝 꼬집어 본다.

“세 개에 만 원이나 하는데 이 정도 때깔은 나와야지. 어서 먹기나 하셔~”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를 움직여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유별나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나쁘진 않았다.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살짝 미소 짓는다. 

행복하다.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

......

“은비야 이빨 닦고 자야지.”

“에에? 아까 닦았는데 또?”

“콜라 마셨잖니. 또 치과 가고 싶어서 그래?”

“아앗, 알았어, 닦을게. 이잉.”

......

......

침대에 몸을 뉘이자 마자 잠이 쏟아진다. 

이미 시각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시에 일어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밀려온다. 

“피곤하지? 자기 밥 먹고 바로 자서 배 나오겠다.”

“으응... 뭐... 배 나오면 나랑 이혼할 거야?”

“어휴. 말 하는 것 좀 봐.”

아내가 나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나 먼저 잘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내일 해 줄게.”

“알았어요. 낭군님. 어여 주무셔요.”

애교 섞인 아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살짝 입 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왠지 껌이 꿈에 나올 것 같다.

......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

......

-따르르르르릉

“......아, 뭐야......”

-따르르르르릉

“자기야, 전화 좀 받... 아 내 핸드폰이구나.”

-따르르르르릉

“오 주임이잖아? 이 새끼가 분명히 새벽에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오.”

-따르르르르, 딸칵

“여보세요? 너 미쳤어? 지금 몇 시야!”

- ......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졸려 죽겠는데. 빨리 용건 안 말해?”

- ...... 껌...... 좀 주세요.

화가 난다기보다, 

혹시 이게 꿈인가 싶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 다시 말해 봐. 뭐라고?”

-...... 껌...... 껌이요. 껌 좀 주세요.

매우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였다. 

“너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그런 소릴 해?”

나는 그저 황당하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생각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건만.

-...... 제발요. 저 지금 미칠 것 같아요. 제발, 제발요.

나 보고 대체 어쩌라는 건가. 

지금 이 시각에 강원도까지 내려오기라도 하라는 건가. 

내려갈 수 있다손 쳐도 출근 시각인 6시까지는 이제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오 주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당부했잖아. 혹시라도 새벽에 전화할 생각 말라고. 그런데 기껏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뭐, 껌 주러 강원도까지 오라고?”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말을 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긁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봐 오 주임. 장난친 거라고 생각할 테니. 이만 끊자고. 몹시 불쾌했다는 것만 알아.”

-딸칵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아끼던 오 주임이었지만, 

이런 예의 없는 전화 한 통으로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사람이 미워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인 모양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단단히 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따르르르르릉

또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오 주임. 

나는 한숨을 깊이 쉬며 전화를 받았다.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다짜고짜 욕을 했다. 

이제 명백히 화가 났다고 선언할 수 있다. 

-...... 껌, 좀, 제발......

“야 오승원! 이 새끼가 좋게 봤더니, 완전 깨고 있네.”

나는 몹시 흥분했다. 

새벽에 전화를 안 받아 본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너무 경우가 없었다. 

무언가 부탁하는 자세도 전혀 안 돼 있었고, 자세가 되었다고 해도 억지 부탁이었다. 

아니, 

세상에 어떤 마음 좋은 회사원이 후배 직원에게 껌을 주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단 말인가. 

그것도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 대리님. 제발......

그나저나 정말 절박한 목소리였다. 

언제까지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없어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후우. 대체 왜그래. 껌 못 씹으니까 그렇게 미치겠어?”

-...... 씨,발! 껌 갖고 오라고 개새끼야!...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오 주임이 욕설을 내뱉는 게 아닌가, 

그것도 매우 심한 욕설이었다.

나는 심한 충격으로 말없이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 버렸다. 

불쾌한 건 둘째치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대체 그 껌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미치도록 만들었을까.

“자기야... 무슨 일이야. 이 새벽에 누가 전화한 거야?”

아내가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내게 물었다. 

“어, 아니 뭐. 알잖아. 저번에 집에 한 번 데려왔던, 오 주임이라고.” 

아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 주임? 그 사람이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술이라도 마셨대?”

그러고 보면 술 취한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오 주임의 주사는 사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 술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응, 아마 그런 모양이야. 내일 혼쭐을 내 줘야지. 미안해 자기야. 자자.”

......

......

“자기야 일어나. 늦겠어. 6시 10분이야, 10분. 어서 준비해야지!”

6시 10분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킨다.

“알람이 왜 안 울렸지? 아... 어제 배터리를 빼 놨지 참.”

침대 옆, 탁상 위에 핸드폰과 배터리가 분리되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것들을 조립하고 핸드폰을 켰다. 

로딩 화면이 지나자 은비의 사진으로 꾸민 대기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캐치콜이 38건 있습니다.]

캐치콜. 

통화 중이거나, 핸드폰을 꺼 놨을 때 걸려 왔던 전화를 문자로 보내 주는 서비스였다. 

4시에 오 주임의 전화를 받고 핸드폰을 껐으니, 

약 2시간 만에 38건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뭐 해 자기야. 아침 차렸으니까 어서 씻고 나와!”

방 밖에서 아내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잠시 침대맡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38건의 부재중 전화가 모두 오 주임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었다.

......

......

“은비야 아빠 나가시는데 인사해야지.”

“하암...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우 졸립다.”

“자기 오늘 나 동창회 있는 거 알지? 저녁 차려놓고 나갈게.”

“엄마, 나는?”

“은비는 엄마랑 같이 가야지.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오자.”

“정말! 와 신난다!! 아빠 나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올게!”

......

......

“하아암.”

대체 몇 번이나 하품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턱이 안 빠지는 게 용할 정도로.

“김 대리는 하루 종일 하품만 하는구만. 어제 그렇게 피곤했나?”

두툼한 서류 뭉치를 책상에 탁탁 두드리던 박 과장이 내게 말했다. 

40대 초반으로, 안경을 쓰고 앞머리가 조금 벗겨졌다. 

지극히 샐러리맨답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아, 예. 조금요. 가뜩이나 힘든데 새벽에 오 주임이 술 먹고 전화까지 했거든요.”

내 말을 들은 박 과장이 잠시 손을 멈춘다. 

“응? 오 주임이?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전화를 안 받은 거구만.”

“아, 예. 뭐... 다른 사람들도 안 받던가요?”

“내가 건 사람들은 다 안 받았어. 이 주임이랑, 양 주임이랑, 양 대리까지.”

단체로 전화를 안 받는다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 오 부장님은요? 오 부장님께는 해 보셨어요?”

박 과장이 고개를 젓는다.

“상사한테는 안 했어. 뭐 중요한 전화는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지만. 기획서 오늘 오후까지 내는 거 알지?”

“예, 지금 쓰고 있어요. 아 그런데 너무 가혹한 거 아닙니까. 당일 출장 바로 다음날에 기획서라니.” 

내가 말하자, 박 과장이 눈을 부릅뜬다. 

나는 그 모습에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미리 미리 해 놓으면 좋잖아. 질질 끈 게 누군데 그래. 김 상무님 결재니까 깔끔하게 해야 된다.”

“예, 예.”

골치가 아파 온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김 상무한테 급조한 기획서가 통할 리가 만무했다. 

갑자기 어제 씹었던 껌 생각이 났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왠지 그 껌을 씹고 있으면 일이 잘 될 것만 같다. 

주머니를 뒤져 껌 하나를 빼 입에 넣었다. 

-아그작

황홀한 단맛이 마치 전기가 흐르듯 온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왠지 껌의 개수가 줄어든 느낌이었다. 

주머니에서 껌들을 빼내어 개수를 세어 보았다.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개? 

내가 둘, 오 주임이 하나, 그리고 어제 택시 기사가 하나. 

그런데 왜 여섯 개가 남은 거지? 

열두 개를 받았으니 여덟 개가 남아야 되는 거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껌 두 개의 행방을 추측할 수가 없었다. 

결국 택시에서 흘릴 때 두 개를 더 흘린 모양이지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

...... 

기획서를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쯤 되면 늘 즐거운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정리한 서류들을 파일에 끼워 보기 좋게 꾸며 놓는다. 

기획서와 함께 김 상무에게 보여 줘야 할 중요한 서류들이었다. 

그런데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박 과장이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요란스럽게 문을 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김 대리, 김 대리. 아직도 전화 안 받는데, 이거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출장 간 사람들 얘기인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엔 급한 용무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안 받아요?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었는데, 오 부장님도 안 받던가요?”

“응, 다 안 받아. 그런데 자네 오늘 시공 계획서를 나한테 줬던가?”

“예? 아니요. 그건 강원도에서 팩스로 직접 보내기로 했잖아요.”

박 과장이 잠시 숨을 골랐다. 

“김 상무님이 지금 확인 좀 하자고 난리신데 큰일이네. 이것들이 뒤통수를 칠 줄이야.”

박 과장이 매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의 실권을 쥐다시피 한 김 상무에게 밉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오 주임한테 또 연락 오면 알려드릴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박 과장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리고 기획서 완성됐으면 상무님께 가 보라고. 안 그래도 찾으시던데.”

올 것이 왔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준비한 파일을 옆구리에 꼈다.

......

......

“......”

“......”

“자네......”

“예, 상무님.”

“이걸 지금 기획서라고 가져온 건가? 이렇게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종이 쪼가리를?”

“아...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나름대로? 나는 그딴 말 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나름대로라니. 그게 대체 무슨 염병할 놈의 기준이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기껏 회사 돈 들여서 강원도 여행도 시켜 줬으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김 대리?”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기획부가 쓸모없는 부서라는 소리를 듣지. 과장이란 인간은 여태 시공 계획서도 안 보여 주고 있고, 부하 직원은 기획서를 이 따위로 써 오고. 나 원 참.”

“죄송합니다. 원래는 부장님께 보여 드리고 최종적으로 상무님께 보여 드려야...”

“그래서 뭐. 부장용으로 썼다 이거야? 말이면 단 줄 아나 이 사람이!”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듣기 싫으니까 나가 봐. 박 과장이나 들어오라고 해.”

......

......

-아그작

입에 껌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두 개의 껌이 입안에서 합쳐져 덩치 큰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나는 그것을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질겅, 질겅, 질겅, 김 상무. 개새끼. 질겅, 질겅, 질겅”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퇴근 하고 한참 지났는데도 기분이 풀리질 않는다. 

분을 삭힌답시고 청계천을 거니는 중인데, 꼴불견 연인들의 모습에 오히려 울화통만 더 치미는 것 같다. 

한숨만 푹푹 쉬며 걸음을 옮기다가, 아무도 없는 벤치를 발견하고 그곳에 앉았다. 

여러 색의 조명을 이용해 알록달록한 물줄기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은비와 함께 왔다면 어지간히 신기해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잠시 그 물줄기를 쳐다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지나간 문자나, 사진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오 주임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하면 어떨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 

지체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역시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두 번만 더 기다려 보고 끊어야지.

-뚜우우우우

-뚜우우, 딸칵

받았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져 말문이 막힌다.

-예 대리님.

오 주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새벽의 긴박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아닌 평소의 목소리였다.

“어, 어 그래 오 주임. 조금 괜찮아?”

-예? 뭐가요?

“어제 술 좀 많이 마신 것 같던데, 괜찮아진 거야?”

-술이라니요. 술 마신 적 없어요.

“뭐? 그런데 너 새벽에 왜... 아니 그보다 과장님 전화를 왜 계속 안 받은 거야?”

-아...... 그건, 사정이 조금 있었어요. 단체로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어디를 좀 다녀와서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단체로 핸드폰을 두고 어딘가를 가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아니, 왜 핸드폰을 두고 어디를 가? 핸드폰 반입이 금지된 곳이라도 있어?”

-음...... 뭐 그런 비슷한 거예요. 이젠 괜찮아요. 안 그래도 시공 계획서 지금 팩스로 넣고 있습니다.

이걸로 과장도 다행히 한시름 놓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정상적인 말투와 목소리라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새벽에는 다른 오 주임과 통화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 주임, 오늘 새벽에 나한테 전화했던 거 기억나?”

내가 물었다. 

내심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네, 기억나요. 새벽에는 죄송했어요.

순순한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이 대답이 나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마디로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껌 달라고 떼쓰던 게 다 기억난다는 말이지?”

내가 재차 물었다. 

그 말대로라면 나에게 심한 욕설을 했던 것도 기억날 것이었다.

-네. 하지만 이제 다 해결됐어요. 대리님의 껌이 없어도 괜찮아요. 

오 주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마치 ‘이제 껌을 충분히 구했으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일 없을 거다’ 라는 말로 들렸다.

“껌을 구했다는 거야?”

-구했다기보다는.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아 대리님,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잠깐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있...”

-딸칵

오 주임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껌만 소리 내어 씹었다. 

내 귓가에는 오 주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계속 맴돌고 있다.

-깨달았다고 하는 게 맞겠죠. 

대체 무슨 뜻일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추측할 수가 없다.

3. 

아내가 재 놓은 안심 고기를 이용해 돈까스를 만들었다. 

슈퍼에서 사 온 빵가루를 묻히고, 식용유를 잘 둘러 놓은 프라이팬에 고기를 튀긴다. 

튀겨지는 동안 다지기를 이용해 참깨를 갈았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온다. 

소스는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꺼냈고, 밑반찬은 간소하게 차렸다. 

방울토마토와 양배추, 오이 등이 담긴 샐러드를 가운데에 놓고, 

김치와 오이지를 작은 접시에 담아 양 옆에 두었다. 

자, 이것으로 세팅은 끝났다. 

이제 튀겨진 고기를 접시에 담아 오는 일만 남았다.

......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딸칵

“여보세요?”

-아 자기 집에 들어왔어?

“응, 지금 밥 먹는 중이야. 고기 잘 재 놨네. 맛있어.”

-신경 좀 썼지. 나 지금 막 동창들 만났어. 늦지 않게 들어갈게.

“그래, 모처럼이니까 재밌게 놀다 와. 은비 때문에 안 불편해?”

-은비 지금 잠들었어. 식사 나오면 깨워야지. 동창들이 귀엽다고 좋아하네.

“역시 우리 딸은 어딜 가도 환영을 받네. 알았어. 끝날 때쯤 전화해. 끊어~.”

-딸칵

......

......

한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나머지 손으로 리모컨을 이용해 티비 채널을 돌린다. 

마침 푸드 채널에서는 태국 고추를 이용한 놀랍도록 매운 요리가 소개되고 있었다. 

열시가 넘으면서 부쩍 시계를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지금도 시계를 쳐다보며 10시 15분인 것을 확인했다.

방금 전에 입에 넣은 껌에서 씹는 족족 넘치도록 단물이 흘러나온다. 

이제 껌은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

......

-여보세요? 자기야 나야. 미안해. 많이 늦었지? 응. 어 아니. 

동창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밥을 먹다가 쓰러져서 지금 응급실에 와 있어. 

응? 어 어. 은비는 옆에서 자고 있어. 자기 먼저 자. 어.

동창들 아무도 집에 안 갔는데 혼자만 집에 간다 그러기가 좀 뭐해서. 

그래도 이따가 슬쩍 먼저 나오려고. 아무래도 은비도 있으니까. 어 어.


아 무슨 떡 종류를 먹다가 식도에 걸린 것 같아. 

얘가 조금 급하게 먹는 버릇이 있거든. 아휴. 걱정이야. 응. 

그렇게 됐으니까 계속 기다리지 말고 시간 늦으면 먼저 자라고. 

응. 사랑해 자기야~

......

......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벽에 걸린 시계의 작은 바늘이 숫자 12를 약간 넘기고 있었다. 

아내는 어떻게 빠져나오겠다더니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밖에 없는 집은 상당히 조용했다. 

일정의 소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적막하고 쓸쓸한 기분에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탁상 위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치익, 치익 네 김... 기자. 거... 치익, 치익

뉴스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맑은 소리를 듣기 위해 천천히 주파수를 조절해 본다.

-치익. 네, 부산 해운대구에서 신종 마약 사범이 잡혔다는 속보입니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껌을 통해 마약을 판매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껌 얘기였다. 

왠지 귀가 솔깃해지는 뉴스였다.

-껌을 씹으면 마약 성분이 흘러나와 우리 몸의 중추신경으로 퍼지고, 이내 다른 마약과 같은 증세를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같이 껌을 매개로 해서 마약이 등장한 것은 처음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반인들까지 마약의 마수에 걸려들 수가 있으니 국가적으로 대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약이 함유된 껌. 

그러니까 마약 껌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씹고 있는 껌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껌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약을 할 때처럼 환각이나 환청이 생기진 않았다. 

대신에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약이라기보다 담배에 가까웠다. 

뭐, 담배도 마약의 한 종류라면 종류겠지만.

그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껌의 근원지는 부산이지만, 내가 가진 껌은 강원도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대충 합리화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쨌건 뉴스는 내가 잠드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주파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파수에서 손을 멈춘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때, 푹 빠져 지냈던 빌리 홀리데이의 슬픈 재즈였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조금씩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껌을 뱉는 것도 잊은 채.

......

......

“커억, 컥, 컥.”

잠에서 깨어났다. 

목구멍에 뭐가 걸린 느낌이 나 헛기침이 계속 나온다.

“커억, 퉤.”

껌이었다. 

뱉지 않고 자는 바람에 목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뱉어낸 후에도 몇 번 더 기침을 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래도 삼키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시계를 확인한다. 

5시 40분.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없었다. 

외박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핸드폰을 열어 보니 아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자기야, 자는 중일 것 같아서 문자로 보내. 동창이 결국엔 죽고 말았어. 이제 막 가족들 불렀고, 오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네? 모처럼 만난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라 다들 슬픔이 커. 그래서 나도 아침까지는 같이 있기로 했어. 미안해 자기야.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은비는 대기실에 있는 침대에서 잘 자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어. 늦지 않게 출근 잘 해. 미안해 자기야♡]

......

......

새벽 공기가 무척이나 차갑다. 

아침을 차려 먹기가 귀찮아 일찌감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매장에 들어가 카푸치노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갓 구운 토스트 안에 잘 으깬 계란과, 야채들이 알차게 들어 있었다. 

입가에 카푸치노 거품을 잔뜩 묻히며 허겁지겁 아침을 해결했다. 

물론 다 먹은 후에 껌을 입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김 대리, 김 대리. 잠깐 이리 와 봐.”

박 과장이 일찍부터 나를 찾는다. 

잠시 자리에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박 과장에게로 갔다.

“기획서 이야기는 들었어. 뭐 직장 생활이 다 그런 거잖아. 너무 담아 두지 말라고.”

“예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가 보다 해야죠.”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아, 그건 그렇고. 김 대리 하루만 더 수고해야 할 일이 생겼어.”

역시 용건은 따로 있던 모양이었다.

“예? 하루만이라는 건...”

“오늘 점심 먹고, 강원도에 한 번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랐다. 

강원도를 내려가라니. 

불과 이틀 전에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않았던가.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말어. 상무님 지시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아니, 이유가 대체 뭐예요. 뭐가 또 빠졌어요?”

“우리 쪽 확인서를 팩스로 보내야 되는데, 팩스가 고장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상무님이 직접 다녀오라고 지시하셨어. 

 그런데 너를 지목하시더라고.”

미칠 노릇이었다. 

이건 단순한 응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팩스가 고장났으면 다른 데서 양해를 구하고 받으면 되잖아요.”

박 과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박 과장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아 요즘 상무님한테 기획부가 별로 안 좋게 찍혀서, 

 출장 가 있는 사람들한테도 잘 믿음이 안 가는 모양이야. 

 더군다나 어제는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됐잖아. 

 가서 업무 상황도 체크해 보라는 이유도 있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업무 상황 체크를 대리밖에 안 된 내가 왜 해야 하며, 

당장 다시 써야 하는 기획서는 어쩌라는 말인가. 

스트레스 때문인지 난폭하게 턱이 움직인다.

“당일치기로는 죽어도 못 갑니다.”

“누가 당일치기로 가랬나. 내가 간신히 설득해서 내일 하루 빼 주기로 했으니까. 

 하루만 수고 좀 해 줘.”

다행히 당일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획서의 압박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획서는 어떡합니까. 김 상무님이 당장 갖고 오라고 난리인데.”

“아 그것도 말 다 끝났어. 일단 다녀오는 것을 우선으로 해. 

 기획서는 조금 천천히 써도 되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어쩌겠는가. 

위에서 하라면 하는 게 직장 생활인 것을.

아내와 딸을 또 못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제도 내내 혼자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껌도 세 개밖에 안 남았으니, 

내려간 김에 다시 그 가게를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열 통 정도는 사 와야지.

......

......

“은비는 학교 잘 갔어?”

-어, 거기서 곧바로 보냈어. 조금 늦게 갔는데, 미리 학교에 전화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안 피곤해? 자고 있는데 내가 깨운 건가?”

-아예 꼬박 밤을 샌 것도 아닌걸 뭐. 집 좀 치우고 자려고. 

“으응. 어쨌든 나는 그렇게 됐어. 내일 회사 쉬게 해 준다니까, 늦어지면 하루 자고 갈게.”

-아휴... 우리 자기 힘들어서 어떡해. 은비도 아빠 보고 싶다고 난리일 텐데.

“이러다가, 나 강원도 사투리까지 쓰는 거 아냐? 하하. 아무튼, 도착하면 전화할게.”

-추우니까, 단추 잘 잠그고 다녀. 감기 조심하고. 끊을게~

......

......

점심식사는 박 과장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유명한 게장 집에서 먹었다. 

늘 주문하던 매운 게장무침을 시켰는데, 

박 과장은 매운맛에 별로 소질이 없는지 버벅거리며 잘 먹지 못 했다. 

“매운 거 좋아하나? 간장게장은 먹을 줄 아는데, 게장무침은 너무 매워서 못 먹겠어.”

먹느라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다리 한쪽을 입에 넣고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말랑말랑한 속살이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매콤짭짤한 맛이 입에서 사라지기 전에 숟가락에 밥을 가득 담아 입에 넣었다. 

“에이. 이것도 못 먹어서 어쩌려고 그래요. 강원도에는 여기랑은 상대도 안 되는 매운 가게도 있는데.”

“아후. 됐네, 됐어. 매운 거 좋아하면 빨리 죽는다는 말도 있잖나. 

 자극적인 건 피해야 돼.”

박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어쩔 수 없지. 

박 과장 몫까지 내가 먹는 수밖에. 

식사를 마치고, 

아무래도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계산은 박 과장이 했다. 

가게를 나서자 매운 음식에 입이 뜨거워진 탓인지 벌써 하얀 입김이 나온다. 

박 과장은 서울역까지 나와 함께 가 주었다. 

“이번에 고생하면 상무님 시선도 조금은 좋아질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전화 오면 꼭 잘 받으라고. 알았지?”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박 과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박 과장은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예 알았어요. 제 밑으로 집합시켜서 기합 한 번 주고 올게요.”

“그래. 그럼 내일 모레 보자고.”

“예. 다녀올게요. 밥 맛있게 먹었습니다.” 

말을 마치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늘의 날씨를 알려드립니다. 먼저 서울은...

......

-강원도 지역은 서울과 비슷한 기온으로, 약간 쌀쌀한 날씨가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단 강원도 춘천 지역의 경우 저녁에는 영하까지 떨어질 정도로 추워질 전망이니, 외출하실 때 겨울옷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틀간 후평동 쪽에 안개가 많이 낄 전망이니 운전자들은 각별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다음은 영남지방입니다...

......

......

“으으 추워라.”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서울에서는 그럭저럭 견뎌 주던 가을 자켓이 여기서는 힘없이 추위를 허락한다. 

이틀 전만 해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는데 정말 이상한 날씨였다. 

춘천은 여름에는 무지 덥고, 겨울에는 또 엄청 춥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덜덜 떨면서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4시 45분. 

애매한 시각이었다. 

일단 거래처로 가서 확인서를 주고 와야 할 것 같다. 

6시 전에는 가겠다고 말했으니까 말이다. 

추워져서 그런지 부쩍 턱 운동이 심해진다. 

그만큼 단물도 많이, 빨리 빠지겠지. 

자켓의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유난히 희뿌연 안개가 눈에 거슬린다.

......

......

“아, 이거 하나 주려고 서울에서 내려온 건가? 팩스야 아무데서나 받으면 그만인 것을.”

“아, 뭐. 저희 회사의 정성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건물이 참 좋네요, 내부도 좋고.”

“하하. 올해 초에 지사가 들어왔으니까. 비교적 새 건물이지.”

“아 그렇구나. 네 사장님. 더 필요하신 건 있으세요?”

“아니 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혹시 시간 괜찮은가?”

“예? 아. 예. 뭐 시간이야 괜찮습니다만.”

“그럼 같이 저녁이나 들지. 춘천의 매운맛을 보여 주겠네. 허허.”

“저야 좋죠.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

......

......

얼떨결에 저녁식사까지 했더니 시간이 벌써 7시였다. 

거래처 사장은 춘천의 매운맛 어쩌고 하더니 결국 닭갈비를 사 주었다.

다른 데보다 확실히 맵기는 했지만 춘천을 대표하는 매운맛이 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틀 전에 이 동네에서 이보다 열 배는 매운 맛을 맛보지 않았는가. 

생각난 김에, 식사 중 사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사장님 혹시, 정말 매운 집이라고 아세요?”

사장은 허겁지겁 고기를 건져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 음식의 풍미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매운 집?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춘천에는 유명한 매운 집이 많은데.”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뇨. 가게 이름이 정말 매운 집이에요. 이틀 전에 점심을 거기서 먹었거든요.”

사장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매워선지, 뜨거워선지 반쯤 입을 벌리고 ‘쓰읍’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음. 이 근처에 유명한 집은 내가 거의 다 아는데 말이야. 

그런 상호명은 처음 들어 보네. 그런 독특한 이름을 잊어버릴 리도 없을 테고.”

그다지 의외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일단 워낙 외진 곳에 있었고, 메뉴도 하나뿐인데다가, 

그런 매니악한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은 드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봉내산 쪽으로 들어가는 외진 길에 있는 가게인데 잘 모르시겠어요?”

“봉내산이라... 그쪽 길이면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을 텐데 음식점이 있단 말이야?”

소수의 등산객들은 있겠지만 이런 날씨에 굳이 산을 찾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정식 등산로가 아닌 외진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적이 드물 것이었다. 

사실 그런 곳에 가게를 차린다는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다. 

굳이 고생해서 갈 만큼 서비스가 좋거나 내외관이 훌륭했던 것도 아니고. 

“다 쓰러져 가는 건물 두 개가 있더라고요. 하나는 음식점, 하나는 구멍가게.”

“아! 혹시 그 집을 얘기하는 건가.”

사장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예? 그 집이라는 것은...”

사장이 씹고 있던 닭갈비를 꿀꺽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봉내산 쪽에 낡은 기와집이라면 알고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역사적인 집이지. 

 그런데 거기가 음식점이 되었단 말이야? 전혀 몰랐는데. 

 자네는 어떻게 알고 간 건가?”

원래는 음식점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인터넷에 검색되던데요? 약도도 나오고. 그런데 예전에는 그냥 일반 집이었어요?” 

사장이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톡톡 치며 말을 꺼냈다.

“그게 조금 기구한 사연이 있는 집이야. 나도 어릴 때라 나중에 아버지에게나 들었었지.”

어떤 사연일까. 

사장이 다시 한 번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자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고 알고 있나?”

국민보도연맹 사건. 

물론 알고 있었다. 

6.25 때, 이 연맹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아닌가.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예 알다마다요. 살인마 이승만의 이름을 드높인 사건이었죠.”

“말 한 번 잘 했네. 살인마 이승만.

허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임당한 대부분이 그냥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지.”

말 그대로였다. 

국가는, 보도연맹에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신고하는 사람들에겐 쌀과 음식을 나눠줬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알 게 뭐였겠는가.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신고하고 음식을 얻기 바빴던 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참담했다. 

전쟁이 터지자 국가는 제일 먼저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무려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

“30만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자기가 연맹원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도 짧은 시간 안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어.”

“음... 이 사건이 그 음식점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아, 그 기와집. 그 집 주인이 그 당시 연맹원들을 밀고하는 일을 했었네.”

"예에!?"

“그도 연맹원 소속이었는데, 애당초 그는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 들어간 거였다네. 

새로운 인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몰래 기록을 남겼었지. 

물론 그런 사람은 각 지역마다 있었을 거야. 

그는 후평동만을 맡은 걸로 아니까. 

어쨌든 그의 명단 덕분에 이쪽에서의 처리는 손쉽게 끝났다고 하네.”

충격적인 얘기였다. 

그 정도면 거의 학살의 주범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알다시피 그 당시 강원도에서의 삶이란 건 정말 끔찍했다고 하네. 

가난과 기근이 너무 심했다고 하지. 특히 이 근방은 더 심했지. 

그러니까 그가 넘긴 명단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야. 

그들은 단지 배가 고플 뿐이었다고.”

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왕이면 오늘 내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슬 마무리하고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왠지 이 이야기만큼은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연히 사람들에게 원망을 샀지. 

오죽했으면 그를 죽이기 위해 사람들이 결사대까지 만들 정도였네.”

“용케 죽지는 않은 모양이죠? 버젓이 가게도 차렸으니.”

“그는 영악한 사람이었네.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재빨리 잠적을 해 버렸다네. 

 하나뿐인 어린 딸을 데리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래, 그 잠적한 곳이 자네가 갔다던 그곳일 걸세. 

 사람의 발길이 없는 외진 곳. 그곳에 있는 낡은 기와집 말일세.”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야기를 듣느라, 남은 닭갈비가 점점 식어 가는 것도 잊는다. 

그만큼 나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아예 못 찾을 만한 곳은 아니던데요. 

약도를 보긴 했지만 저도 어렵지 않게 찾아갔으니까요.”

사장이 고기 하나를 입에 넣는다. 

“맞네. 시간은 걸렸지만 여기저기서 그를 찾았다는 소문이 들려왔었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이제야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해.”

“그런데 왜 죽지 않은 거죠?”

“그건, 마을에 갑자기 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네.”

......

......

그렇게 늦은 시각도 아닌데 주의가 온통 컴컴했다. 

익숙하지 않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탓이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서 시야까지 좁아지니 그다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 

물론 심기가 불편한 데는 거래처 사장의 거북한 이야기도 한몫 했지만 말이다.

이왕이면 오늘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두 가지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첫 번째는 지사에 들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제 한 개밖에 안 남은 껌을 충원하는 것이다. 

우선 지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주임이 껌을 잔뜩 얻어 놨으면 좋겠다. 

웬만하면 그 기와집에는 가고 싶지 않으니까. 

방금 입에 넣은 껌에서 넘치도록 단물이 흘러나온다.

......

......

낡은 건물. 

우리 지사의 건물이었다.

아까 전에 봤던 거래처 건물이 워낙 새 건물이라 그런지,

유난히 낡고 허름해 보인다. 

“사장은 돈 벌어서 어디다가 쓰는지 모르겠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 30분. 

서울에서 출장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퇴근했을 시간이다. 

고개를 올려 보니, 

역시나 4층만 불이 켜져 있고 나머지는 꺼져 있다. 

야식으로 산 보쌈과 족발의 양이 많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손에 쥔 봉지를 열어 젓가락 개수는 충분한지 다시 한 번 세어 보았다. 

열한 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끼이익

문을 열었다. 

온통 컴컴하다. 

1층 현관 정도는 불을 켜 놓는 게 좋을 텐데 말이다. 

불 키는 곳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현관문 근처를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울퉁불퉁한 벽면뿐이었다. 

그냥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하기로 했다. 

-딸칵

핸드폰 액정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너무 컴컴한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많이 밝게 느껴졌다. 

벽면을 비춰 1층의 전등 스위치를 찾을 생각이었는데, 

그냥 이것만으로도 4층까지는 그럭저럭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발 앞으로 핸드폰을 비추고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발에 툭툭 하고 살짝 걸리는 것들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현관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끝에 계단이 있었는데, 

나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가운데 보폭을 좁게 움직이니 꽤나 길게 느껴지는 거리였다. 

혹시라도 넘어지진 않을까 한 손으로는 벽면을 짚어 가며 걸었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뚜벅, 뚜벅

얼마나 걸었을까. 

정적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이 도드라지고 있다.

그러던 중,

-물컹

벽면을 짚은 손에 뭔가 이질적인 게 만져졌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웠지만, 뜨끈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났다. 

뜨거운 설탕물에 담가 놓은 찰흙 같다고 할까? 

핸드폰을 그쪽으로 비춰 보았다. 

밀가루 반죽 같은 둥그런 흰 덩어리가 보인다. 

찰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껌에 더 가까워 보였다.

4.

덩어리에서 손을 떼자 손에 닿았던 일부분이 마치 치즈처럼 쭉 늘어졌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별다른 향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손에 붙은 잔해를 대충 털어 내고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불쾌한 찐득거림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단물이 덜 빠진 씹다 만 껌을 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안 돼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핸드폰을 좀 더 가까이 비추면서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른다. 

그렇게 세 계단쯤 올랐을까.

-물컹.

이번엔 발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어떤 물컹한 것을 밟아 찌그러뜨린 느낌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걸음을 떼려는데,

-찌이이익

신발 바닥으로부터 뭔가가 쭉 늘어지는 느낌이 난다. 

혹시 이것도 방금 전의 그 덩어리랑 비슷한 것일까? 

허리를 숙여 발 가까이 핸드폰을 대 보았다.

“윽!”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까와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색이 달랐다. 

하얀 덩어리가 아니라 시뻘건 덩어리였다. 

물컹한 느낌이 없었다면 응고된 피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신발 바닥에 들러붙은 잔해를 떼어 내야 했지만, 차마 이번 것은 손대고 싶지 않았다. 

쓱쓱 땅바닥에 몇 번 발을 문지르고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혹시라도 비슷한 덩어리를 다시 밟을까 꼼꼼히 바닥을 비추며 걸었다. 

효과적이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덩어리의 분포가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뻘건 덩어리, 흰 덩어리, 거기에 구불구불하고 긴 덩어리도 있었다. 

어두운 덕에 낱개로 이것들을 보고 있었지만, 

불을 켜 놓고 한눈에 본다면 결코 유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모두 오르고, 

3층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투욱

뭔가가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 복도 어디쯤 같은데 도무지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는다. 

잠시 복도 쪽으로 핸드폰을 비춰 보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굳이 그것을 확인하러 복도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 

느슨하게 걸어 놓았던 옷 따위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불을 안 키고 온 것이 조금은 후회된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다행히도 덩어리들은 없었다. 

그것들을 피하면서 걷는 수고로움이 없어지자 아까보다 두 배는 빨리 오르는 것 같았다. 

대체 그 덩어리들은 뭐길래 2층 계단에만 있던 걸까? 

-쿠웅

3층에 오르자 이번엔 2층에서 들었던 소리보다 더 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랄 정도의 소리였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칠흑 같은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쓰윽, 쓰윽

무언가 복도에 끌리는 소리. 

-쓰으윽, 쓰으윽

그리고 그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비춰 보면 그만이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왠지 그곳을 비추는 순간 엄청나게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 탓이었다. 

-쓰으윽, 쓰으으윽

소리는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우당탕!

다급한 마음에 계단을 비추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몇 계단도 못 오르고 걸려 넘어져 버렸다. 

계단에 부딪쳐 몸 곳곳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으윽. 씨팔...”

욕을 중얼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어, 핸드폰?”

넘어지면서 핸드폰을 놓친 모양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움직였지만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난간 사이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아마도 온전하진 못하겠지. 

그나저나 큰일이었다.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단 한 계단도 제대로 오르기가 힘들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몸을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손을 더듬어 가며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히 오르는데도 팔꿈치나 무릎을 모서리에 부딪쳤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씨팔. 불 좀 켜 놓으면 덧나나.”

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씨팔. 김 상무 개새끼. 좆같은 새끼.”

이번엔 김 상무 욕이 나왔다. 

“씨팔. 오 과장. 찐따 같은 새끼.”

생각나는 모두에게 욕을 하며 그렇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이라고 느껴지는 곳에 손이 닿았을 때 몸을 약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덥썩!

무언가가 발목을 잡았다. 

잡았다기 보다는 휘감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콰당!

살짝 일으키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계단에 코를 박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큰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려 잡힌 발 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다. 

단지 어떤것의 윤곽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덩치가 큰 것 같았다. 

붙잡힌 발에 힘을 주어 보았다. 

“으읍...”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발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좀처럼 이 상황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단지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감만이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었다. 

“후... 우... 후... 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뭔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불과 몇 계단 위로 불이 켜진 4층이 있었고, 그곳에는 야근 중인 사원들이 있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더 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오 주임! 오 주이임!”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배에 힘을 주었다.

“오. 주. 임!!”

방금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로 소리를 질렀으면 누군가 달려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가득 마셨다.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 주. 우우우아아악!!”

살면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었던가.

-쿵쾅 쿵쾅 쿵쾅

‘그것’이 엄청난 힘으로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계단 모서리에 온몸이 부딪치는 것도 잊은 채, 순수한 공포감만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씨팔, 오 주임! 으아아악!!”

-콰다당!

사정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어느새 3층까지 되돌아와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우쉬추우후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낸 소리인가?

-우쉬추우후휘히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입안에 있는 껌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단물이 많이 빠져 있다. 

떨리는 손으로 자켓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렸다.

-우쉬추우후후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붙잡힌 발목에서 조금씩 통증이 생기는 걸로 보아 뭔가 다른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 

“퉤!”

비록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저항의 일환으로 씹던 껌을 ‘그것’에게 뱉었다. 

그리고 방금 빼낸 껌을 입에 집어넣어 난폭하게 씹었다. 

그런데,

-우쉬추우후우우히!

뭔가 아까보다 격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발을 붙잡던 힘이 사라졌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시적으로 풀려난 것은 확실하다.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모서리에 부딪히든 말든 미친 듯이 계단을 기어 올랐다. 

아마 온몸이 멍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간신히 계단 끝에 손을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우... 후우...”

4층! 

4층에 올라왔다. 

나는 잠시 계단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의 윤곽조차도.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마음이 들어 급하게 복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사무실마다 켜진 불빛이 복도까지 밝히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오 주임이 있는 402호 사무실로 향했다. 

우습게도, 족발과 보쌈이 든 비닐봉지는 무사히 내 손목에 걸려 있었다.

걸어가면서 401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람이 있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때 나와 보는 것이 정상이다. 

생각해 보니, 401호는 입사 동기인 천 대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 앞을 천천히 지나며 내부를 살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딱히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도 비어 있는 모양이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퇴근하고 남은 직원이래봐야 한 사무실에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뿐일 것이었다.

적게는 한 명인 곳도 있을 것이고. 

전체를 둘러보라는 임무를 맡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일개 대리에 불과했고,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우선 핸드폰을 저 어둠 너머에서 분실했다. 

게다가 3층에서는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입에 있는 껌이 마지막 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401호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 발은 급격히 빨라졌다. 

사무실 간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순식간에 402호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시 계단 쪽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지옥의 경계선이라도 되는 양 계단이 있는 복도 끝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점점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거슬리는 낡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휘이이이잉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맞바람이었다. 

춘천의 싸늘한 밤공기가 몸을 훑자 나도 모르게 몸을 감싸며 추위에 반응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이 반쯤 열려 있던 게 원인인 것 같다. 

난로를 켜 놔도 모자랄 날씨에 창문을 열어 놓다니 정말 생각이 있는 건가?

“오 주임! 오 주임!”

그 자리에 서서 오 주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쓰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늘한 공기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우선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은 후에는 히터도 틀 생각이었다. 

걸으면서 슬쩍 책상들을 살펴보았다. 

“이건 뭐 개판이구만...”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책상들은 하나같이 아수라장이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죄다 땅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필기구들과 이면지 따위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당장 부도가 나도 이것보단 나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며 앞으로 걷다가 오 주임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질러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면지에 크게 적어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큼직하게 써 놓긴 했지만 휘갈겨 쓴 글씨라 멀리서는 식별이 힘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허리를 굽혔다. 

[김 대리 개새끼. 저주할 거다.]

내 욕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자리에 서서 오 주임 책상 위를 뒤적거려보니 글귀가 적힌 종이 세 장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손에 쥐고 한 장씩 읽어 내려간다.

[껌을 씹고 싶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다.]

[깨달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대체 뭘 깨닫고, 어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일까? 

“이 새끼, 혹시 여기 없는건가...”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끼이이익, 탁

창문을 닫으니 웅웅거리던 바람소리가 가셨다. 

손목에 걸고 있던 봉지를 아무 책상에나 던져 놓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둘러보니 훨씬 더 난장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납득이 안 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출장을 마치고 올라와야 할 사람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니. 

왠지 이 건물에 나 밖에 없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자,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이 또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신경이 곤두선 내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잡혔다.

-쿵.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쿠웅.

좀 더 명확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미친 듯이 책상들의 서랍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오 주임의 책상, 이 주임의 책상, 그리고 양 주임의 책상.

“차, 찾았다!”

양 주임 책상 두 번째 서랍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손전등이었다. 

오른 손으로 손전등을 잡고, 왼 손으로 이 주임의 서랍에 있던 대형 콤파스를 들었다. 

-쿠웅.

소리로 미루어보아 아직 사무실 앞까지 오진 못한 것 같았다. 

당장 문을 열고 왼쪽 계단 쪽으로 뛰어간다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씨... 씨팔...”

왼쪽 계단을 통해서도 뭔가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로 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 

-스르륵, 쿵

하지만 나는 더욱더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미 401호 앞 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쉬우후우취우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에게 소리를 냈다.

“야... 양 주임!?”

‘그것’은 바로 양 주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양 주임의 얼굴이 ‘그것’에 붙어 있었다. 

몸 전체가 헐렁한 옷처럼 바닥으로 축 쳐져 있었고, 팔이나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려서 붙어있었다. 

그리고 몹시 덩치가 크다. 

양 주임의 덩치가 원래 컸다고 해도 이건 그보다 두 배 이상은 커 보였다. 

거기에 손과 발의 갯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눈에 보이는 손만 네 개였는데 붙어 있는 위치도 제 각각이었다.

-우쉬우우후위우

또 한 번 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슴팍에 붙어있는 양 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왼쪽 옆구리쯤에 붙어있는 이 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으, 으,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양 주임과 이 주임의 얼굴을 가진 ‘그것’은 아랑곳 않고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 이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스르륵 쿵

‘그것’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축 쳐진 몸이 바닥을 ‘스르륵’하고 쓸었다.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뒤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 살짝 보이는 ‘또 다른 그것’의 일부분이 보인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 

이 괴생물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스르륵 쿵

뒷걸음으로 어느덧 403호 앞까지 왔다. 

하지만 무의미한 걸음이었다. 

나는 그저 협살 당하는 주자에 불과했다. 

저것들에게 붙잡히면 대체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극에 달한 공포가 점점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빠. 치킨 사 올거지~?’

그러던 중, 

문득 은비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불 타 오르기 시작했다.

“누, 누구 없어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전등을 입에 물고 403호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덜컥, 덜컥

잠겨있었다. 

나는 앞을 향해 콤파스를 휘두르며 계속해서 문을 흔들었다.

“읍! 으읍!! 으으으읍!”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 덕분에 명쾌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거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누가 있어줘야 한다. 

제발.

-스르륵, 쿠웅.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내가 휘두르는 콤파스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커다란 건축 설계용 콤파스도 이 괴물 앞에서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씨, 씨팔. 꺼져 꺼지라고!!”

소리를 내자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떨리는 왼손을 더욱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다가오던 ‘그것’ 아니 괴물의 움직임이 조금은 멈칫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 움직임을 계속한다.

-스르륵, 푸우욱. 쿵

콤파스가 보기 좋게 괴물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콤파스를 빼려고 손을 당기자 엉겨 붙은 살이 쭈욱 하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껌처럼. 

“아, 아, 아아아아악 씨팔!!”

-투욱!

엉겨 붙은 살 때문에 더 이상 콤파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게 끝이다. 

가까이 다가온 양 주임의 얼굴에서 왠지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으, 은비야. 미안해. 미안해.”

-철컥!

죽음 앞에서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세요!!”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리는 403호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다시 힘을 넣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우이쉬휘위추휘

괴물의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시간이 없다. 

몸을 던져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콰악

“으아아악.”

하지만 보기 좋게 괴물에게 발을 붙잡히고 말았다. 

고개를 내려 보니 다리춤에 붙어 있던 손이 뻗어져 나와, 기괴한 모양으로 내 발목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아마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고 갈 것이 뻔했다. 

“껌, 그 씹고 있는 껌을 뱉어요!”

403호의 사람이 소리쳤다. 

“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거의 조건반사 식으로 껌을 뱉어버렸다. 

입에서 나온 껌이 포물선을 그리며 괴물의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양 주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몹시 흥분한 표정이랄까.

-우쉬이위우취이추이!!!

그리고는 3층에서처럼 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목을 감고 있던 손도 풀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와요! 어서!”

나는 이번에야 말로 몸을 날렸다.

-쿠당탕!

몸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급하게 몸을 추슬렀다.

“저, 저것들은 대체 뭐요!”

“일단! 문부터 잠그죠. 문 좀 잡아주세요.”

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허겁지겁 문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까치발을 들고 문 위로 손을 올렸다. 

“문이 움직이지 않게 잘 잡아 주세요.”

투명한 문 앞으로 그 괴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내가 뱉은 껌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런지, 이쪽에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겐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그 등에도 얼굴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 씨,발. 천대리 아니야.” 

당장이라도 이 손을 놓고 싶었다. 

괴물의 등짝에 달려있는 동기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으로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빠, 빨리 잠가요. 더 이상 못 견디겠어!”

“자꾸 손을 떠니까 균형이 안 맞잖아요. 잘 좀 잡아 봐요!” 

짜증 섞인 말투였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최대한 집중해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우쉬추우후후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나를 노려보던 천대리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제 내 쪽으로 관심을 돌릴게 분명하다. 

-스르륵, 스르륵

그리고 예상대로, 

괴물이 굽히고 있던 몸을 펴서 조금씩 내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씨, 씨파알.”

떨면 안 된다. 

떨면 안 된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굵은 식은땀이 발밑으로 떨어진다.

-쿵.

5. 

“이, 이봐요. 지금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말 했다. 

눈 앞에 보이는 양 주임의 입가가 유난히 실룩거리고 있었다.

“지금 빨리 잠그지 않으면...”

“후우, 문이 워낙에 낡아서... 엿같네. 정말.”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돌리기만 하면 돼요. 조금만 더.”

대체 아까부터 그놈의 조금만을 몇 번이나 말 하는 건가. 

이제 괴물이 손만 뻗으면 모든 게 끝날 지경이었다. 

-스르륵, 쿵

괴물이 문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였다. 

거기에 공교롭게도 양 주임의 얼굴이 내 얼굴과 거의 비슷한 높이였다. 

그러니까 시야 전체를 양 주임의 얼굴이 차지하기 시작했단 말이다. 

몇 가닥 있는 흰 머리와, 땀구멍까지 보일 거리가 되자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나는 고개를 최대한 뒤로 빼고, 가능하면 눈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시선을 내렸다.

-우쉬위우후위휘

괴물이 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슴팍에 붙어있던 손을 앞으로 내민다.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콰앙!!

-철컥

두 가지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콰앙! 콰앙!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후아. 진땀 뺐네요. 한 번 잠그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그가 까치발을 풀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도 손에 넣었던 힘을 풀었다. 

“돌아가면 당장 이것부터 보고해야겠군.”

그는 문 너머에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저 괴물들 말인가요?”

나는 문 위쪽에 잠금 장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이 엿 같은 문 말이에요.”

내 말에 그가 "훗"하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책상 쪽으로 가나 싶더니 의자 두 개를 집어 들고 돌아왔다.

“이 문, 안심할 수 없어요. 우선 이 의자들로 막아놓고 같이 책상을 끌고 오죠.”

그가 바퀴가 달린 낡은 사무용의자를 문 앞에 눕혀 놓았다. 

-위휘시위시후이

괴물의 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콰앙! 콰앙!!

아까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둘러요! 3층도 이런 식으로 당했다고요!”

그가 그렇게 말 하며 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 쪽 끝을 잡고는 나에게 소리쳤다.

“어서 반대쪽을 잡으세요. 이것만 막아놔도 안심할 수 있을 거예요.”

달려가서 그가 하라는 대로 책상의 끝 부분을 붙잡았다. 

그와 마주선 자세가 되었다.

“셋 하면 들어요. 자 하나, 두울, 셋!”

“으읍...”

엄청나게 무거웠다. 

결국 지면에서 5센치도 못 든 채 문으로 움직여야했다. 

-콰앙!!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 의자들 좀 치워주세요. 여기서는 손으로 밀어서 붙이죠.”

아까 놓아두었던 의자를 치우라는 말 같다. 

책상을 내리자마자 재빨리 의자로 달려갔다. 

의자를 옆으로 빼면서 힐끗 문 쪽을 쳐다보았다. 

재수 없게 또 다시 양 주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젠장. 의자 다 뺐으니까 어서 밀라고!”

그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륵

책상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나도 재빨리 그의 옆에 붙어 함께 책상을 밀었다.

-드르르르 쿠웅.

그리고 문 앞에 책상을 붙이는데 성공했다.

-콰앙! 콰앙!

여전히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쉽게 뚫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책상이 견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거친 숨을 고르며 멍하니 문 밖을 쳐다보았다.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함께 서 있던 그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흐읍... 푸후...”

길게 빨은 만큼 길게 내뱉는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털썩하니 주저 않는다.

“대리님. 한 대 피실래요?”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덕에 담배와는 예 저녁부터 인연을 끊고 살아왔다. 

게다가 미식가인 나에게 담배는 어울리지 않는다. 

껌이라면 모를까.

“아, 괜찮아.”

대답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머리에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몸이 떨리고, 열도 나는 것 같다. 

아마 단물이 다 빠지지 않은 껌을 억지로 뱉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남은 껌도 없으니 정말 큰일이었다.

“괜찮으세요? 아. 잠깐만요.”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엄지손가락 한 마디정도 크기의 울퉁불퉁한 덩어리를 꺼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그것을 나에게 건 낸다.

“이거 씹으세요. 조금 괜찮아 질 거예요.”

얼떨결에 그 덩어리를 받았다. 

자세히 보니 웬 털 같은 것들이 숭숭 나 있다. 

입에 넣기 상당히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래 뵈도 껌이랍니다. 맛은 별로 없지만. 어서 씹으세요, 몸부터 챙기셔야죠.”

정신 차리기 힘들 정도로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눈 딱 감고 그 덩어리를 입에 넣었다. 

-아그작.

단물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조금 비릿하다. 

하지만 역겨울 정도는 아니어서 무시하고 씹을수 있었다.

“어때요. 조금 괜찮아졌죠? 저도 그것 때문에 고생 엄청 했죠.”

묵묵히 덩어리, 아니 껌을 씹었다. 

다행히 몸이 괜찮아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가 어디서 봤었지?”

불현듯 내가 말을 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외모만으로 보면 내 나이가 위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초면이라면 실례가 되는 부분이다.

“아, 대리님. 저 기억 못 하시는구나. 기억 안 나세요. 오티 때?”

입사한 지 5년이 되었으니 총 다섯 번의 오티에 참가한 기억이 있다. 

재수 없게 그때마다 장기자랑의 사회는 꼭 내가 보았었다. 

두 번째 까지는 순전히 제비 뽑기였는데, 

세 번째부터는 하던 사람이 해야 재미있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 때문에 하게 되었다. 

말솜씨가 좋거나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어서, 매 해 오티 시즌이 되면 신입사원들 보다 더 긴장하곤 했었다.

“언제 적 오티를 말 하는 거야?”

“아, 올해요. 기억 안 나세요? 저 필승 불러서 1등 먹었는데.” 

“필승... 아! 김, 필...중? 맞나?”

필승이란 말에 갑자기 기억이 났다. 

“하하하. 맞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비슷한 노래를 하겠대서 곡명을 물어봤더니, 

“필승이요” 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심하게 망가지며 열창을 했던 터라 모두가 필중이 1등을 할 거라 생각했고, 

결과도 그렇게 되었다.

“오랜만에 보네 정말. 자네도 이쪽으로 출장 나온 건가?”

내 말에 필중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저는 원래 근무지가 여기에요.”

“그래? 어쩌다가 강원도로 배정받았어?”

필중이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그리고 시선은 문 밖의 괴물에게로 돌렸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실력이 없던 탓이죠. 동기 중에는 벌써 주임 단 애도 있는데...”

말끝을 흐렸다. 

평소 같았으면 측은한 마음이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대화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문 밖에는 여전히 괴물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나에게는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후배 직원 앞이라 그런지,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이 놀라웠다.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미칠 것 같은데 말이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원래 제 부서는 3층이니까요.”

4층은 기획부, 3층은 영업부였다. 

하긴 장기자랑 때를 생각하면 영업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긴 하다.

“1층에서 뭔가 이상한 거 보지 않았어요?”

1층이라. 

계단 쪽에 있던 괴상한 덩어리들이 생각난다.

“봤지. 이상한 덩어리들 말하는 거지?”

필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콰앙!!

그리고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소리가 문에서 들렸다. 

괴물의 흥분상태가 절정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래도 강화유리니 쉽게 깨지는 못 하겠지만. 

소리에 반응하느라 필중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있었다. 

“어이 어이. 계속 말 해봐.”

“아, 아. 죄송해요. 근데 저 새끼 제법 끈질기네요.”

필중이 이제 꽁초가 다 된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후우... 그거, 오 부장님이에요.”

“뭐?”

순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뭐가 오 부장님이라고?”

“그 덩어리들이 오 부장님이라고요.”

“대체 무슨 말이야... 덩어리가 오 부장님이라니?”

상식 밖의 이야기어서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했다. 

“좀 더 쉽게 말 해봐.”

필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저는 정말 재수가 없었죠.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봤으니까요.”

필중이 담배를 바닥에 문지르며 담뱃불을 껐다.

“터졌어요. 콰앙~ 하면서. 대단했죠 정말. 여직원들은 기겁해서 소리를 지르고.”

“그게 대체 무슨...”

“껌 때문이래요. 오 주임 그 재수 없는 인간 말로는요.”

오 주임에게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덩어리는 오 부장의 산산조각 난 몸이에요. 시뻘건 건 핏덩이고, 길쭉한 건 내장이죠.”

소름이 끼쳐 왔다. 

손과 발에 닿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여전히 내 신발 바닥에는 시뻘건 잔해가 붙어 있었다. 

이게 오 부장의 피란 말인가?

“이, 이해가 안 돼. 피는 액체잖아. 어떻게 그런 덩어리가 된단 말이야? 마치 껌처럼 물컹거리고 끈적거렸는데.”

“말 그대로 껌이니까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묘하게 머릿속에 뭔가가 정리 되고 있었다.

괴물로 변한 양 주임과, 이 주임. 그리고 몸이 폭발한 오 부장. 

이들의 공통점은 한가지였다. 

바로 그 껌을 씹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떠오른 것이 그 구멍가게 주인의 말이었다.

-명심해야 돼. 절대 삼키면 안 된다

“껌...을...삼켰겠지.”

“저 대리님?”

왠지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필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 아냐. 계속 말 해봐.”

필중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아, 예. 오 부장님이 그렇게 되고나서 직원들은 거의 패닉상태에 빠졌어요. 저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죠. 그때 오 주임이 나타나 모두에게 소리쳤어요.”

“그 새끼가 뭐라고?”

“경찰에 신고했으니 진정들 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대부분이 1층, 2층 사람들이었죠.”

필중이 계속 말을 이었다.

“걔 중에는 저와 같이 그냥 사무실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어요. 미친 짓이었죠.”

“그게 언제 일어난 거야?”

필중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 그게, 어제 오전인데 음. 한 열 시정도였을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그렇게 안 받은 건가?

“그래서 경찰은 왔어?”

“아니요. 안 왔어요. 오 주임이 경찰을 불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거든요.”

-우쉬위무이휘취

괴물의 소리가 들린다. 

언제부턴가 문을 두드리는 것은 그만두고 있었다. 

대신, 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끈적끈적해 보이는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후엔?” 

필중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4층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 들리긴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죠. 그리고는 뭐, 보시는 그대

롭니다. 저렇게 생긴 놈들이 나타났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도 있었다. 

필중이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리님은 어떻게 껌을 씹게 되셨나요?”

필중의 말에 나도 모르게 당황을 했다.

뭔가 캥기는 생각을 해서 그런 모양이다.

“아, 아니, 뭐 어쩌다보니... 그러는 넌?”

대답이 애매해서 그런지 필중이 고개를 갸웃 거린다.

“저는 오 주임에게 받았어요. 저 말고도 대부분이 오 주임에게 받았죠.” 

“대부분이라고?”

“예 맞아요. 대부분이요. 그리고 대부분이 껌 때문에 고생을 했죠. 아까 대리님처럼요.”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오 주임에게 껌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두 눈으로 확인했던 일인데.

“오 주임, 오 주임은 어떻게 됐어?”

“글쎄요. 마지막으로 본 건 오늘 새벽이에요. 그때는 괴물들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뭔가 말이 안 맞는 게 있었다. 

“괴물들에게 얘기를 했다고? 오 주임은 괴물이 되지 않은 거야?”

“예? 아 예. 4층 사람들 모두가 괴물이 된 건 아니니까요.”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 나니, 그런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내 예상은 껌을 삼킨 사람이 괴물이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왜 오 주임은 괴물이 되지 않은 걸까? 

그리고 오 부장은 왜 괴물이 되지 않고 폭발을 한 거지? 

그리고 오 주임은 왜 괴물에게 당하지 않은 걸까? 

그리고 필중이 나에게 준 껌은 대체 어디서 난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증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든 것이 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말이다. 

“너 대체 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아는 껌과 필중이 아는 껌이 서로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씹고 있는 껌은 처음에 내가 아는 그 껌이 아니었다. 

모양새도 그렇고, 맛도 그랬다. 

다만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특유의 중독성은 닮았다. 

대체 어떻게 이 껌을 구하게 된 것일까?

“글쎄요. 씹지 않고 있으면 무척 괴롭다는 정도?”

필중이 말했다. 

“오 부장님이 껌으로 변했다는 건 무슨 말이었어?”

하나씩 의문을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오 부장의 일은 단연코 미스테리였다. 

현재로서 가장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치를 따질 상황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거야 지금 씹고 계시니 알 거 아닙니까.”

순간 턱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라고?”

필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엑? 껌에 대해서 잘 아는 거 아니었어요?”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건가. 

지금 내가 씹고 있는 껌이 오 부장이라도 된다는 건가?

“이 껌 정체가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상이 틀리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오 부장님이에요. 아마 허벅지 부분일 거예요.”

“퉤!!”

필중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껌을 뱉어 버렸다. 

“씨팔. 왠지 비리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내가 생살을 씹어대고 있었다는 거야?”

필중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새삼 왜 이러냐는 듯 했다.

“전혀 모르는 것처럼 하시니 당황스럽네요.”

“내가 이 껌이 오 부장인 걸 어떻게 알겠어. 나는 오 부장이 그렇게 변한지도 몰랐는데!”

그렇게 말 하며 바닥에다 마른침을 연신 뱉어냈다. 

점점 역겨운 기분이 올라왔다.

“아. 그럼 아까 씹던 껌은 어디서 구하신 거죠? 다른 껌인가요?”

필중이 알고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짐작이 갔다. 

내가 맨 처음 가져왔던 껌에 대해 필중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껌을 삼키지 말라고 했던 경고도, 그 음식점 주인의 괴상한 말조차도 말이다.

“우선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나머지 아는 것들을 내게 말 해줘. 잘 들어야 해.”

“예? 아 예. 알겠어요.” 

이제 내가 아는 것들을 말할 차례다. 

그래봐야 그곳에서의 짧은 체험담에 불과하지만.

......

......

-콰앙! 콰앙!!

잠자코 있던 괴물이 또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 나도 이야기를 끝내고 있었다.

“내 예상은 그래. 삼키지 말란 말을 무시하고 삼켰기 때문에 지금 저렇게 변한거지.”

필중은 잔뜩 표정이 굳어있는 상태였다. 

“그럼 대리님과 오 주임이 가져오신 껌이 문제가 된 거군요?”

싸늘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작정으로 꺼낸 말이었다.

“내 탓이 없다고는 못 하지만, 정확히는 오 주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껌을 주었기 때문이지.”

“그 껌은 제가 드린 것 하고 다른가요?”

그 껌을 떠올려봤다. 

그 넘치도록 흐르던 단물과, 삼키고 싶은 욕망이 간절해지는 식감, 계속해서 씹게 만드는 엄청난 중독성 등등.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흘렀다. 

모양 또한 시중에서 파는 껌과 비슷했다. 

그런 점에서 필중이 줬던 껌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중독성만 빼고 말이다.

“다르지 엄청. 자 이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지?”

필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믿기 힘들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그럴싸하네요.”

여전히 거슬리는 말투였다. 

어쨌든 껌을 삼켜서 괴물이 되었을 거라는 나의 말에 수긍은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의문은, 오 주임도 껌을 삼켰는데 왜 괴물로 변하지 않았냐는 거지.”

내 말을 들은 필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러네요. 오 주임도 삼켰다면 뭔가 변화가 있어야 맞는...”

말하던 중 필중의 표정이 갑자기 변한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뭔데?”

필중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킨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오 주임을 빼고 나머지 4층 사람들은 괴물이 된 것만 봤으니까.”

내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 주임 팔에, 뭔가 뜯긴 자국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구멍이 숭숭 나 있었어요.”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비슷한 모습을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 그리고 또?”

“예? 음... 일단 그게 다에요.”

“아니, 괴물에게 얘기를 했다는 건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을 습격하는 것 아니었어?”

사실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이었다. 

오 주임은 대체 무슨 수로 괴물과 이야기를 했다는 건가. 

다른 동료들의 얼굴이 붙어 있지만 이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괴물과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필중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음. 글쎄요. 저는 단순히 같은 4층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원하던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그러면 오 부장...윽...”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껌을 뱉었던 탓일 것이다. 

“아. 거봐요 대리님. 비위 상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라고요.”

필중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예의 그 덩어리를 하나 또 꺼냈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시뻘겋다는 점이었다.

“제가 씹으려고 남겨둔 건데 대리님 드릴게요. 맛이 아까보단 나을 거예요.”

이제 껌이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시뻘건 덩어리. 

아까전의 말대로라면 오 부장의 피가 아닌가? 

살점도 비위가 상해 뱉어버렸는데, 지금 핏덩이를 내 입에 집어넣으라는 얘긴가? 

두통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으... 너는 비위도 안 상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씹으란 말을 하는 거야?”

필중이 억지로 내 손을 펴 그 덩어리를 올려놓았다. 

“대리님이 뭘 모르셔서 그래요. 선입견을 버리면 그렇게 이상한 맛도 아니에요. 평범하죠.”

필중이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저도 처음엔 꺼려했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살고 싶으면 씹어야 하는데.”

손에 놓인 덩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시뻘건 덩어리는 정말 백 번 양보해도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피라는 걸 몰라도 말이다.

“이걸 씹지 않으면 죽기라도 한단 말이야?”

귀에서 우웅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통과 오한이 더 심해진 느낌이었다.

“맞아요. 그러니까 어서 씹으세요.”

“뭐? 죽는다고? 으으윽...”

필중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굳은 것 같다.

“눈앞에서 더 이상 사람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어서 입에 넣어요!”

필중의 닦달에도 나는 감히 이 덩어리를 입에 넣지 못 하고 있었다. 

나는 말 그대로 미식가다. 

이런 것을 입에 넣었다간 아마 제정신으로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후우... 고집하고는. 힘으로라도 해야겠군요.”

필중이 말하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에든 덩어리를 빼앗아 난폭하게 내 입을 벌렸다. 

“윽, 으으윽 이게 무..우읍..”

그리고 태 턱과 머리를 붙잡고 강제적인 상하운동을 시키고 시작했다. 

어떻게든 씹지 않으려고 혀로 이리저리 굴려봤지만 결국 어금니 사이에 정확하게 껌이 걸리고 만다. 

-아그작

단 한 번 씹었을 뿐인데 엄청난 양의 단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것은 다 피겠지.

“흡, 어때요. 막상 흡, 씹어보니 흡, 괜찮죠?”

필중이 계속해서 내 턱을 움직였다. 

“읍, 읍, 이제 됐으니까 이거 읍, 놔!”

말하면서 필중의 몸을 밀쳐냈다. 

필중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걸로 보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맛 괜찮죠?”

나는 매섭게 필중을 노려보았다. 

하긴 그렇게 나쁜 맛은 아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비렸지만 단물이 훨씬 더 풍부했고, 식감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오 부장의 피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할 뿐이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따지고 보면 대리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순순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필중이 잘못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때문에 필중이 이런 상황을 당하게 된 것이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흠, 흠.”

표정을 풀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누가 뭐래? 단지 상사에게 예의 없게 군 것 때문에 그렇게 본 거야.”

필중이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증세는 다시 좋아졌다.

“그런데 그 말 무슨 말이야. 껌을 씹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

“아아. 봤으니까요. 대리님처럼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껌을 거부하다가 죽은 사람들을요.”

“죽어? 이 증상이 계속 심해지다가 결국 죽는다는 얘기야?”

슬슬 필중의 표정에서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니까요. 대부분은 여자들이었어요.

곧 죽어도 이것만은 못 먹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죽어 버리더군요.”

정리해보면, 

껌을 씹다가 뱉은 것만으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럼 애당초 처음부터 안 씹었으면 됐잖아. 대체 그걸 왜 씹은 거야?”

갑자기 필중이 무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기억에서, 참기 힘든 무언가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오 주임이 개새끼인거에요.”

필중이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하나를 핀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대부분이 괴물들에게 당했지만, 3층에서 4층으로 도망간 사람들도 꽤 있었어요. 저를 포함해서 음, 아홉, 아니 열 명이었던 것 같네요.”

필중이 연기를 한 번 내 뱉고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이곳이 아니라 405호였어요. 다른 사무실보다 크고, 쾌적했죠. 물론 지금은 끔찍하게 변했지만.”

-콰앙!!

그때 들리는 괴물의 소리. 

하지만 이제 이 소리에도 심드렁했다. 

여전히 저주스러운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오 주임이 유유히 들어왔어요. 웃고 있었죠. 그리고 자신은 괴물에게 당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그게 껌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껌들을 내밀었어요.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그대로였죠.”

이 들이 오 주임에게 속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로 내가 껌을 씹고 있었는데도 괴물에게 끌려갈 뻔했지 않은가.

“그 새끼가 또 거짓말을 한 거군.”

필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맞아요. 거짓말이었죠.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어요. 그리고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그 덩어리들을 입에 넣고 씹었죠.


그때는 이것이 오 부장의 몸인지 뭔지 알 턱이 없었어요. 그냥 이상하게 생긴 껌이구나 할 뿐이었죠.”

“어떻게 그것이 오 부장의 몸이라는 걸 알아낸 거야?”

“예, 계속 들어보세요. 그렇게 우리는 껌을 씹었어요. 그리고 이제 괴물에게 당하지 않을 테니 나가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죠.


그래서 아마 그때 네 명 정도가 먼저 밖으로 나갔을 거예요. 하지만 결과는 뭐 대충 예상하실 거예요.


세 명은 괴물에 끌려가고, 한 명만이 겨우 겨우 도망쳐 돌아왔어요. 그때 우리는 알게 된 거죠. 오 주임에게 속았단 것을“ 

여기까지 말 하고 필중이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그리고 길게 연기를 내 뿜은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 돌아온 한 명이 402호에서 오 주임의 모습을 본 거에요. 오 부장의 덩어리를 손으로 뜯고 있는 모습을요.


그리고 그 뜯은 덩어리는 우리가 입에 넣었던 것과 일치했고요.”

말을 듣다보니 필중이 얼마나 끔찍한 하루를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시각각 죽음과 맞서서 겨우 살아남은 게 아닌가. 

“껌이 오 부장의 몸이라는 걸 안 순간 우리 모두가 껌을 뱉어 버렸죠. 아까 대리님처럼요.

그리고 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정말 영문도 모른 채 말이죠. 오 주임은 그 이후에도 몇 번씩 찾아왔어요.


하지만 이제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껌을 씹으면 나아질 거라는 말조차도 말이죠.”

필중이 어느새 다 핀 담배를 바닥에 눌러 불을 끈다.

“뭐 별수 있나요. 도저히 참을 수준이 아닐 정도가 되었을 때, 딱 한 번만 더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단순한 자기 합리화였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엔 진짜였어요. 껌을 씹으니 나아진 거예요. 저를 비롯해서 네 명 정도가 그렇게 살아났어요.


하지만 나머지는 그러지 못했죠. 끝까지 그 껌을 거부했기 때문이에요.”

“그래. 그러다 결국 죽었다는 말이군.”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왠지 오 주임이 “깨달았다”라고 말했던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오 주임은 정말 개새끼에요! 이것만은 확실하죠.”

여전히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필중이 말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주임과 눈이 마주칠까봐 시선은 밑으로 내린 채로 말이다. 

“그런데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아무리 오 주임의 거짓말 때문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면 재차 신고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신고는 몇 번이고 했습니다. 제가 한 것만 여섯 번도 넘을 거예요.”

“그런데 왜 안 와?”

“그걸 모르겠어요. 안개 때문에 대원들이 길을 헤맨다니 어쩐다니 이상한 말만 해대고.

지금 사람이 몇 명이 죽었는지 아냐고 따지니까, 되려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안개가 꽤 자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에 경찰이라면 길을 찾을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말로는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대한민국 짭새들 수준이 낮은 것은 알지만, 이렇게 신고를 많이 했는데도 늑장 대응을 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다시 한 번 해 보지 그래?”

필중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말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쩌면 ‘대리님이 직접 하시죠’ 같은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중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사무실 전화로 하지 뭐 하러 핸드폰으로 해?”

“해 보세요 한 번.”

필중이 핸드폰을 귀에 댄 상태로 말했다. 

책상 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 보았다.

-지지직,,지지직,,지지직

잡음이 너무 심해서 전화기가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저 경찰서죠. 여기가 ...

필중에게 전화가 왜 이런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때마침 통화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직접 다른 책상들을 돌며 하나씩 전화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지지직, 지지직,

모두다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유선전화는 불통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떨어뜨렸던 핸드폰이 자꾸만 생각난다. 

아내와 은비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예 빨리 좀 와주세요 제발. 예 예~

필중의 통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통화 끝났어? 뭐라든?”

필중이 통화가 영 불쾌했는지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순찰차만 네 대를 보냈다고 하는데. 기다려보란 말 뿐이네요. 하아. 진짜 짜증나네.”

“그렇게까지 말 했으면 오겠지. 

 그나저나 나 핸드폰 한 통화만 쓰면 안 될까? 우리 딸내미한테 오늘 못 간다는 말을 해 줘야 하는데.”

필중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핸드폰을 건 냈다.

“핸드폰 없으세요?”

필중에게 핸드폰을 받자마자 슬라이드를 열어 아내의 번호를 눌렀다.

“아아. 여기 올라오다 떨어뜨렸어. 주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 높이면 아마 망가졌을 테니까.”

필중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내일은 갈 수 있다고 말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은비에겐 치킨을 두 마리나 사 가겠다고 얘기 해야지. 

교촌과 비비큐를 각각 한 마리씩 말이다.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뚜우우우우, 찰칵,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6.

-여보세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은비를 혼낼 때는 조금 날카로워 지지만 말이다.

“후우...”

아내의 목소리에 마음이 놓인 탓인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아내가 재차 물었다. 

처음 보는 번호인데 걸자마자 한숨부터 쉬어서 그런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나야.”

짧게 한 마디 했다.

-어? 자기야?

단번에 알아챘지만 역시 의아해 하는 목소리였다.

“어. 은비는 자?”

-아니 아직. 음음. 이 번호는 뭐야? 음음. 

밥이라도 먹고 있는 걸까. 

손목을 올려 시계를 봤다. 

열시 이십 분. 

저녁을 먹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아아. 후배직원 전화야. 내 게 지금 고장 났거든.” 

-음음. 음음. 아휴 어쩌다가. 그런데 밥은 음음 먹었어?

“어. 뭐 대충. 그건 그렇고,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

-왜? 음음 많이 바빠? 음음 은비가 자기 때문에 안자고 있는데. 음음.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할게. 은비 어서 자라 그래.”

-음음. 음음.

아까부터 우물거리는 소리가 계속 거슬린다. 

대체 뭘 먹길래. 

“대체 입안에 뭐야? 통화할 때는 삼키든지, 뱉든지 하라고.”

-음음. 아아. 알았어. 잠깐만. 음음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꿀꺽’하는 소리가 들린다. 

삼킨 모양이었다.

“뭘 먹은거야?”

-아. 별 거 아니야.

“뭔데? 맛있는 거면 나도 내일 해줘.”

-후후. 은비 바꿔줄게~

‘은비야 아빠야~’ 하는 아내의 소리와, 

‘어 정말?’ 하는 은비의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빠!!

은비였다. 

방심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자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필중이 말했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요?”

“아, 아냐. 그냥 딸내미가 소리를 좀 질러서 흐흐흐.”

어색하게 웃어주고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그래 아빠야. 깜짝 놀랐잖니.”

-아빠! 아빠! 음음. 오늘 음음. 왜 안 와~?

“아빠가 오늘 너무 바빠서 그래. 내일 일찍 갈게.”

-아아아아~ 치킨 치킨~ 음음. 치킨~

“은비 너~ 아빠보다 치킨이 더 보고 싶구나.”

은비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냐. 아빠가 훨씬 보고 싶어. 음음

가만히 듣고 있으니 은비도 뭔가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은비야. 그런데 지금 엄마랑 뭐 먹고 있었니?”

-응~ 음음 나 지금 껌 먹어~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껌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반응을 하는 모양이다. 

“어, 어 그래. 은비야. 아빠가 며칠 전에 사준 치약껌이니?”

-아냐 그거~ 음음 엄마가 대빵 맛있는 껌 줬어~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든다. 

“치,치약껌이 아니면 무슨 껌이야?”

-우웅~ 치약껌보다 음음. 훨씬 훨씬 음음. 백만배 달아 히히

치약껌보다 달다니. 

살면서 수많은 껌을 씹어봤지만 어린이용 치약껌 이상 단 껌은 맛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단 껌을 찾기 힘들 거고. 

그 껌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껌. 

그 껌? 

순간 어제 잃어버렸던 껌 두 개가 떠오른다.

“은비야! 그 껌 어디서 낫니!”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은비가 깜짝 놀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아~ 깜짝 놀랐잖아! 아빠 바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안 좋은 쪽으로 일부러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시중에 파는 껌일 것이다. 

어쩌면 껌처럼 생긴 츄잉캔디일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 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은비야~ 그런데 엄마가 무슨 껌을 줬어~?”

-아빠랑 말 안 해 흥!

“은비야~ 아빠가 내일 치킨 두 마리 사갈게~ 교촌하고 비비큐. 어때?”

-저엉말?

“그럼~ 아빠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와아아아! 음음. 아빠 내일 꼭 와야 해! 음음. 꼭이야 꼭!

치킨 두 마리에 겨우 은비의 마음을 풀 수 있었다. 

“그럼 아까 아빠가 물어본 거 대답해줘야지~”

-응? 아아 껌 뭐냐구? 

“그래. 엄마가 무슨 껌을 줬어?”

-음~ 

잠시 은비가 말을 멈추었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모양이다. 

우물거리는 소리만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대리님. 너무 오래 쓰시는 거 아니에요~”

필중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필중을 향해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수화기 멀리서 ‘엄마 이 껌 아빠가 준 거 맞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사준 치약껌은 분명히 아니라고 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사다준 껌이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반드시 생각해내야만 한다. 

잠시 후, 

‘어 맞어.’ 하는 아내의 소리와 함께 다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이거 엄마가 세상에서 두 개 밖에 없는 껌이라고 했었어.

“응? 은비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가 우리 주려고 세상에 두 개 밖에 없는 껌을 사왔다고 했어.

“아빠가?”

-응 아빠가 음음.

“대리님. 왜 그러세요. 껌 뱉으셨어요? 표정이 왜 그렇게...”

내 표정을 보던 필중이 말했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아마 처참하게 일그러진 것이 분명하다.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맹렬히 뛰는 것 같았다.

“으, 은비야. 호, 혹시. 그, 그, 그거 아빠 주, 주머니에 있던 거냐고 어, 엄마한테 물어봐” 

입이 덜덜 떨린다.

-으응 알았어~ 엄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 입술은 바짝 마른다. 

혓바닥으로 연신 입술을 축이지만, 임시 처방일 뿐 순식간에 다시 말라버린다. 

잠시 후 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여전히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으, 응. 으, 은비야. 뭐, 뭐래?”

-응. 맞대. 음음

“......”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대리님? 대리님?”

필중의 소리가 마치 스테레오처럼 울려서 들린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어긋난 모양이다. 

-아빠! 아빠! 

하지만 은비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은비야. 은비야. 아빠 말 잘 들어. 은비야. 은비야.”

-알았어 아빠. 음음. 왜 똑같은 말 해. 음음.

“하아. 하아."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은비야. 후욱. 지금 씹고 있는 껌. 절대로 삼키면 안 돼. 알았지?”

-응? 왜에. 음음. 이 껌 너무 맛있어서 이제 삼키려구 했는데. 음음

절대 이 껌을 삼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삼키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겨우 여덟살짜리한테 그런 인내심을 바랄 수 있을까? 

“이건 아빠랑 게임하는 거야.”

-응? 무슨 게임~?

절대 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절대 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아, 아빠가 올 때까지 은비가 껌을 계속 씹고 있으면. 아빠가, 아빠가 똑같은 껌을 또 줄게!”

일단 되는대로 말 해 버렸다. 

-어? 정말? 세상에서 두 개 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은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 하며 말이 나왔다.

“아, 그, 아, 뭐. 아, 아냐. 은비야. 이건 그 껌보다 더 맛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껌이야~”

그래도 겨우 임기응변은 해냈다. 

-흐음~ 

잠깐 뜸을 들을 들이더니,

-알았어 아빠. 나 안 삼킬게.

은비가 말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와 버렸다. 

“은비야. 꼭이야. 아빠랑 게임하는 거니까. 꼭 지켜야 해. 알았지? 약속~”

-응응 알았어.

“은비야. 그럼 이제 엄마 좀 바꿔줄래?”

은비보다 아내가 더 문제였다. 

아까 전에 분명히. 

분명히. 

분명히, 삼켰다.

-여보세요?

“너, 너!! 아까 삼킨 거 뭐야. 뭐냐고!”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내 예상이 맞다면, 

내 예상이 확실하다면.

“뭐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은비한테 안 들었어? 

문에 몸을 비비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처참하게 찌그러진 몸뚱이에 세 사람의 얼굴이 붙어 있다. 

팔과 다리는 아무렇게나 붙어서 너덜거리고 있고, 괴상한 소리를 연신 내뱉고 있다. 

저 들도 이틀 전에는 사람이었다. 

껌을 삼키기 전에는 말이다. 

“야 너!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어!?”

-응?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껌 삼킨 것 땜에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그런데 그냥 껌이 아니지. 

삼키면, 괴물이 되는 껌이지.

“내 주머니서 뺐어? 확실히 그 껌 맞아?”

정신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자꾸. 무섭게. 그 껌이 그렇게 중요한 껌이었어?

확신이 확실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되고 시작했다.

“야! 왜 남의 주머니에 손을 대! 너가 도둑이야?”

마음에도 없는 말이 막 나온다. 

-대, 대체 왜 그래. 그 껌이 그렇게 아까워? 그 많은 것 중에 두 개가 그렇게 아까워?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따지기 시작했다. 

미여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억지로 침을 한 번 삼킨 후 말을 꺼냈다.

“씨팔! 너 정말 삼켰니? 아 맞다. 토하면 되겠다. 자기야. 소금물 마셔. 어서 토하라고!”

-자기 정말 갑자기 왜 이래... 나 무서워. 무섭다고.

이미 껌을 삼킨 마당에 대체 무슨 말을 해 줘야 한단 말인가. 

거기에 나 역시 괴물에게 습격당해 밀실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자기야.. 흑흑, 자기야.. 흐, 흐흑”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 기야... 나, 나 무서워. 왜 울고 그래...흐, 흐흑.

아내도 덩달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대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필중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음, 흐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끅, 흐음. 금방 끊을게. 미안하다 필중아.”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요! 무슨 일이에요? 집에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참으려 해도 이 흐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후배직원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들썩이는 어깨를 억지로, 

억지로 멈추고 필중을 향해 말을 꺼냈다.

“흐읍. 필중아. 나 마누라한테 딱 이십 초만 얘기하고 끊을 테니까. 잠깐만 떨어져 줄래?”

필중이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필중이 충분히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 수화기에 입을 대었다.

“자기야.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학교 동아리에서 말이야. 흐읍. 그때도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던 놈들 엄청 많았잖아. 흐읍.”

-그 얘기를 갑자기 왜, 왜 하냐고! 으아아앙.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울었었는데 기억나? 뉴스 보고 울었잖아. 흐읍. 우리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어린 아이가 죽었다고 그렇게 울었었잖아. 흐읍. 나 그때 자기 참 푼수라고 생각했었어. 하하. 흐읍.”

-으아아앙!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흑흑.

“자기야, 아니 은영아. 내 말 잘 들어.”

-흑흑. 흐흐흑. 

“지금부터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만 믿고 견뎌야 해. 알았지?”

-흑흑, 흑흑흑

“어서 대답해! 알았지?”

-흑흑... 알았어.

“그래. 그래야 내 마누라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으아아앙!

나는 아무 말도 해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됐다. 

이 말만 빼고는.

“사랑해.”

-자기야, 자기...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슬라이더를 거칠게 닫은 후, 물기어린 눈가를 오른 팔로 쓰윽 닦아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필중이 다가왔다.

“통화 다 끝나셨어요?”

굳은 표정으로 필중을 바라보았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필중에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자.”

나가야 한다. 

무조건 나가야 한다. 

방법 따위는 모르겠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나가야 한다. 

나가서 아내와 은비를 구해야 한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집에 무슨 일 있어요?"

"필중아."

"예?"

"나가자."

이때 필중에게 비치는 내 모습이 어땠을까. 

아마 갑자기 정신이라도 나간 것처럼 보였을 거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 하셔도, 대체 무슨 수로 여길 나가자는 거... 어? 대리님?"

필중이 계속 말했다

"우... 세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이 나온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우, 울긴 새끼야. 누가 울어."

"아까 통화중에도 우시는 거 봤어요. 무슨 일이에요? 뭐 삼켰느니, 어쨌느니 하시던 것 같던데."

필중의 말에 안으로부터 용솟음치는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순간 울컥하나 싶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만다. 

"씨팔. 흐흑흑흑."

"이제 아예 대놓고 우시네. 참나..."

모르겠다. 

아직 아내도, 은비도 어떻게 된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아내가, 아내가, 그 껌을 삼켰어."

"뭐라고요?"

"그리고 내 딸은 그 껌을 씹고 있고.. 크흑...씨팔. 그러니까, 나가야 한다고!"

은비를 떠올리니 또다시 감정이 격해졌다. 

나는 도무지 그 아이가 괴물이 된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 아이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는 것도, 그 아이의 얼굴이 이상한 곳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니, 아니 어쩌다가 그걸 씹었대요?"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 껌을 가져오면 안 되는 거였어. 차라리 내가 삼켰으면 삼켰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가족이... 니미! 씨팔!"

흥분한 나에게 필중이 손을 내밀어 한 쪽 어깨를 붙잡았다.

"진정하세요. 마음은 알겠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요."

"흐흐흑..."

필중의 말이 맞았다. 

우선은 이성을 찾아야 한다. 

아내에게는 나만 믿으라고 해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억지로 침을 삼켜가며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나를 필중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고, 어느 정도 뜸을 들인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용케 나가서 집으로 갔다고 쳐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무슨 해독제라도 있나요?

눈앞에서 부인이 괴물로 변하는 걸 보고 싶으신 건 아니잖아요."

직설적이라 거슬리긴 했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당장 집에 간다고 아내를 구할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괴물이 되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은비는 어쩌란 말인가. 

은비까지 껌을 삼킨다면 나는 아마 미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충분히 정상은 아니었지만.

"후우. 그래 너 말이 맞다. 후우, 후우. 쪽팔리게 씨팔. 후우 후우."

숨을 골랐다. 

이성을 찾는 데도 역시 은비 생각이 최고였다. 

"후우. 후우. 아? 아. 그 집! 그 집으로 가 봐야겠어!"

"예? 무슨 집..."

"처음 이 껌을 받았던 곳 말이야. 그 집 주인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이 일의 장본인이니까."

필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사이 나도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특히 그 음식점 주인의 모습, 

분명히 팔 여기저기에 살점이 뜯겨져있었다. 

잘은 몰라도 정황상 그 껌의 영향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중의 말로 볼 때, 오 주임도 그 주인과 비슷한 모습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껌을 삼킨다고 해서 꼭 문 밖의 괴물처럼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 상황에서는 팔에 구멍을 뚫는 상태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아내가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괴물로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일단은 그 가게로 가야한다. 

그 주인장을 만나서 모든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 

“음...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일단 저 괴물은 어쩔 겁니까.”

생각을 마친 필중이 말했다.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였다. 

그나저나 정말 저 괴물이 문제이긴 했다. 

문 앞을 딱 막고 서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저 녀석을 어떻게 돌파한단 말인가.

“그, 약점 같은 거 없을까? 가령 불에 약하다든지.”

“약점이 있었으면 제가 여기 갇혀 있게요?”

“음.”

괴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다행히 흥분상태는 많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가슴은 뛰고 있었지만.

“저 놈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3층에는 저런 녀석들이 득실득실하다고요.”

“응? 득실득실?”

아까 전 좌측 통로에서 비치던 실루엣이 떠오른다.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껌을 삼킨 사람만 괴물이 되었다면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득실 득실이라니. 

“우리가 4층으로 도망 온 이유가 그거에요. 저 녀석들은 3층을 거점으로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한 놈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수가 많아지더라고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기 전에 사람들과 함께 나왔죠. 

그때는 저렇게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럼 나온 김에 밖으로 나가지 그랬어.” 

필중이 고개를 젓는다.

“이미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저 놈들이 지키고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이 4층으로 가게 됐는데,

3층과는 달리 한 녀석만 그곳을 배회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비교적 손 쉽게 우리는 405호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405로 들어간 이유는 내부가 크기도 했지만, 잠금장치가 2중이라 좀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잠깐만. 그런데 그 한 놈은 어떻게 피한거야?”

“예?”

“그러니까. 그 4층에 있던 한 마리의 괴물은 무슨 수로 피할 수 있었냐고.”

“아아.”

필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리쯤은 피할 수 있어요. 아까도 비슷했잖아요.”

그 말에 문득 떠올랐다. 

괴물에게 잡혔을 때 빠져나왔던 순간이 말이다. 

두 번이나 괴물에게 붙잡혔고, 그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은, 

바로 껌을 뱉는 것이었다.

“껌을 뱉으면 괴물의 관심을 잠시 돌릴 수가 있어요. 일반껌이 아니라,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오 부장 껌? 

이것으로 말이죠.”

굳이 오 부장 껌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내가 뱉은 껌은 오 부장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건 긍정적인 정보였다. 

필중이 우려했던 문 앞의 괴물을 돌파할 최적의 수단이 분명했다. 

“그럼. 여기서 나갈 수 있겠네. 껌을 뱉으면 되잖아.”

필중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조금 달라요. 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껌을 뱉기 위해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위험해요.”

“문을 열자마자 껌을 뱉으면 되잖아. 그게 뭐가 위험해?”

“잠금 쇠를 돌리면 저 괴물은 바로 들이닥칠 거예요. 행여 뱉기도 전에 얼굴을 붙잡히면 어떡할 거예요?”

“얼굴을 꼭 잡힌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껌을 뱉는 것은 순식간이야.”

“그것뿐이 아니에요. 용케 껌은 뱉었지만, 급하게 뱉느라 문 바로 앞에 떨어진다면 어떡할 거죠?”

가만 보니 얼마 안 되는 확률에 계속 연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기우쯤은 굳이 괴물이 없더라도 널려있는 게 현실이다. 

“한 명이 잡히더라도 우린 둘이니까, 남은 한 명이 껌을 뱉으면 되잖아.”

“그...”

필중이 약간의 시간차를 주며 말을 했다.

“그 한 명은 누, 누가 할 건데요?”

“뭐? 무슨 한 명?”

“괴물에게 잡히는 사람 말이에요. 전 못해요. 저 괴물에게 절대 잡히고 싶지 않다고요.”

“괴물에게 잡히는 거, 내가 하면 되잖아.”

“하지만, 동시에 잡힐 수도 있죠.” 

아무래도 필중은 여기서 나가는 것에 회의적인 모양이었다. 

경찰도 불렀겠다, 

괴물이 문을 열지도 못하겠다, 

필중으로서는 아무리 확률 좋은 도박이라도 꺼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나가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경찰을 기다릴 수 없고, 온다고 해도 저 괴물을 대체 어떻게 상대할 건지가 의문이었다. 

헛기침을 한 번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나 혼자라도 나가겠어. 단,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줘.”

필중은 긍정도, 부정도 취하지 않았다.

“제 정신이에요? 혼자서 여길 어떻게 나가요.”

“그러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하잖아. 들어줄 거야, 말거야?”

필중이 노골적으로 내 눈을 피했다.

“뭐, 뭔지 말이나 해 보세요.”

“내가 괴물에게 잡히면, 늦게라도 좋으니까 껌을 뱉어줘.”

필중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보다 내가 먼저 말을 했다.

“알아. 동시에 잡힐 수 있는 위험 충분히 알아. 그러니까 내가 잡히는 걸 확실히 본 다음에라도 껌을 뱉어 달라고. 뒤늦게나마.”

“문은요? 문은 누가 열어요?”

“문도 내가 열께. 내가 열고, 내가 잡히면 되잖아. 넌 멀찌감치 보다가 내가 끌려가기 전에만 와서 껌을 뱉어 달라고.


그리고 내가 빠져나가면 그때 다시 문을 잠그면 되잖아.”

정말 최소한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필중은 여전히 나의 눈을 피하며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괴물 앞에서 문까지 열어 나를 구했잖아. 이제 와서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고 보니 그때도 필중은 껌을 뱉어주지 않았다. 

잡혀 있는 내게 껌을 뱉으라고 소리만 쳤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껌을 뱉는 것은, 그 행위로만 본다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어쩌면 뭔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말했잖아요. 눈앞에서 더 이상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그럼 말 다했네. 이번에도 내가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것 아니야?”

“그, 그런.”

필중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문 쪽으로 성큼성큼 가기 시작했다. 

내게는 더 이상 필중을 설득할 시간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 그러지 말아요! 안 돼. 안 된다고. 이 껌은 뱉을 수 없어!”

필중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이 껌은 뱉을 수 없다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일 뿐이었다.

“갑자기 그 장기자랑이 떠오르네. 필승 말이야, 정말 대단했었어.”

필중에게 농담을 한 마디 건 냈다. 

그리고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앞에 서자 괴물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되었다. 

다시 봐도 끔찍한 모습. 

특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양 주임의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괴물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까치발을 들고, 손을 잠금쇠 위로 가져갔다. 

그러자 뒤에서 필중의 소리가 들려온다.

“안 돼! 안된다고!”

-끼익, 철컥.

잠글 때는 그렇게 안 잠가졌으면서, 열 때는 얄미울 정도로 손쉽게 풀린다.

“필중아. 너만 믿는...”

-벌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괴물이 들이닥친 것이다. 

-콰악!!

그리고 껌을 뱉을새도 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괴물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다. 

그것도 얼굴을.

“끄으으으으읍!!”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동안의 기다림으로 한이라도 서린 탓일까? 

괴물이, 붙잡은 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우쉬치이추히우추”

괴물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씨팔" 하고 욕을 내뱉는 필중의 소리도 들린다.

7.

“씨팔! 이것만은 안 된다고. 이것만은, 씨파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내가 여기서 당하면 필중 또한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무슨 사정으로 주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우쉬히우히취히

참기 힘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얼굴 전체에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가득하다. 

“끄으으윽.”

아귀힘이 조금 더 강해진다 싶더니, 급기야는 지면에서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필중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 

필중이 껌을 뱉어주지 않는다면 나를 비롯해 내 가족까지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내와 은비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이대로 죽어선, 이대로 죽는다면...... 

안 돼. 안 돼! 

제발 껌을 뱉어줘! 

“퉤!!”

내 염원이 닿았던 것일까?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효과음이 귀에 꽂혔다. 

그리고,

-우쉬히우히취히퀴퀴!

괴물의 격양된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손아귀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털썩.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물에게 풀려난 것이다. 

“흐읍, 흐읍, 흐읍!”

나는 그 상태로 격하게 숨부터 몰아쉬었다. 

비릿한 냄새가 계속 코 주위를 맴돌고 있는 탓이었다. 

“어서 나와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일그러진 표정으로 필중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다시 고개를 조금만 틀어보았다. 

껌에 정신이 팔려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괴물이 보인다. 

어째, 아까보다 더 심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지금 여유부리는 거예요? 어서 나와요!” 

“알고 있어!”

다리가 후들거려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후배직원에게 쪽팔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씨팔. 일을 저질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잡아요!”

어느새 필중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 그런 건 아니야. 흐으읍.”

머쓱한 변명을 하며 필중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줌까지 쌀 정도였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시네요.” 

이런. 

찔끔 지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티가 날만큼 지린 모양이다. 

그러니까 바지에 오줌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상사 거시기나 쳐다 보냐?”

“됐으니까 어서 가요. 어서!”

필중의 도움을 받으며 문 밖으로 달렸다. 

그리고 곧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좌측이냐, 우측이냐. 

“어, 어디로 갈까요.”

잠시 생각한 후에 필중의 말을 받았다. 

“우측. 우측으로 가자.”

“음.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저 괴물이 그 쪽에서 온 거거든.”

“다른 괴물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 득실..” 

내가 말을 끊었다.

“알어. 그래도 확률적으로 그나마 낫잖아.”

필중이 딱히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든 마찬가지잖아. 우선 가자고 어서!”

“알았어요. 알았어.”

필중과 함께 우측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402호 앞까지 도달했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춰야만했다. 

“잠깐만!”

갑자기 걸음을 멈추니, 나를 부축하고 있던 필중의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아 뭐에요 갑자기!”

“손전등! 손전등을 주워 와야 해!”

아까 전에 문 앞에서 떨어뜨린 손전등이 생각난 것이었다. 

“제 핸드폰으로 비추면 되잖아요. 지금 어떻게 다시 가요!”

아니, 핸드폰 불빛만으로는 힘들다. 

괴물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야 확보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있어야 해. 나 이제 괜찮으니까 내가 갔다 올게.”

필중의 목에 걸쳐있던 오른팔을 제자리로 가져왔다. 

그리고 몸을 돌려 403호 앞을 향해 뛰려는 순간, 

필중이 내 팔을 붙잡았다.

“후. 제가 갈게요. 이번엔 대리님이 껌을 뱉을 차례잖아요.”

말을 마친 필중이 몸을 움직였고, 어쩔 수 없이 내가 그 뒤를 따랐다. 

필중은 403호 문 앞으로 되돌아가 신속하게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을 주웠다. 

“자, 됐죠? 그럼 어서 가...커헉!”

터져오는 필중의 신음소리. 

그의 발을 휘감은 이형적인 모습의 손이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부, 붙잡혔어요 으아아악”

필중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문 안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상황 보고 있을 겨를이 없다. 

어서 필중을 구해야 한다.

“퉤!”

급하게 뱉은 껌이 원호를 그리지 못하고, 직선으로 뻗어나가 지근거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괴물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모양이었다. 

필중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 가자. 어서, 어서!”

“받아요, 손전등.”

필중이 건 낸 손전등을 손에 쥐고 다시 우측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필중이 예의 그 오 부장 덩어리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두 개를 꺼냈는데 하나는 자기 입에 넣고, 하나는 나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입에 넣으며 슬쩍 필중의 바지를 쳐다보았다. 

볼록 튀어나온 주머니에는 적어도 덩어리가 세 개 이상은 더 있어 보였다.

“껌이 다 떨어진 것도 아닌데, 아까는 왜 그렇게 뱉기 싫어한 거야?”

“......”

돌아오는 필중의 대답은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우측 복도 끝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괴물과 조우했던 공포의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면서 왔다니. 

-딸칵

손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화악하고 빛이 뿜어져 나온다. 

핸드폰 불빛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세기였다. 

그 불빛이 어둠을 향해 둥그런 영역을 남기기 시작하자,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핏자국이나, 역겨운 잔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잠시 이리저리 손전등을 비춰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적어도 3층 계단에는 괴물이 없다는 확신이 든 후 필중에게 말했다. 

“내려가자.”

필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한 계단씩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까 그 껌 말이죠.”

중간쯤에서 필중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괴물 때문인지 매우 작은 목소리였다.

“그거. 오 주임이에요.”

“뭐?”

내 되물음을 무시하고 필중이 계속해서 말했다.

“자신의 살을 씹으면 괴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절대 뱉지 말라고 그랬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필중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 사이 어느새 3층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리고 2층 계단으로 몸을 돌리기 전 잠시 복도 쪽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다.

“흡!”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손전등에 비친, 그야말로 득실거리는 괴물들의 모습을 본 순간 말이다.

“이런! 돌려요 어서! 빛을 보면 반응한다고요!”

“뭣?”

순간 한녀석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위휘쉬이위휘

그리고 그 특유의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속속 몸을 돌리기 시작한다.

“씨, 씨,발 뭐야!”

“괜히 불을 꺼놓은 줄 아세요? 뛰어요!”

손전등으로 2층 계단을 확인할 새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스르륵, 쿵

괴물이 우리를 좇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제가 뭐랬어요. 3층에는 득실득실 하다고 했죠?”

정신없이 달리느라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이윽고 2층까지 내려왔다. 

뒤쪽으로 들리는 괴물들의 소리가 여전히 우리를 쫓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1층 계단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산재하게 널려있던 오 부장의 덩어리가 떠올랐다.

“마지막 계단이야. 여기부터는 발조심 좀 해야할거야!”

“알았으니까 어서 계단이나 비춰요.”

이제 이 계단만 내려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화악

1층계단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뭐에요! 어서 내려가요!

필중이 외치며 내 어깨를 잡아 옆으로 재꼈다.

“갑자기 왜 멈추고 그…”

잠시 말을 멈춘 필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씨,발.”

내가 멈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계단을 떡하니 막고 있는 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지체하는 사이, 뒤를 쫓아오던 괴물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일단 제가 뒤 쪽에 껌을 뱉을게요. 대리님은 앞에다 뱉어 보세요.”

일단 필중의 말에 고개는 끄덕였지만 쉽지않아 보였다. 

워낙에 덩치가 큰 괴물이 좁은 계단을 딱 막고 서 있으니 딱히 껌 뱉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앞에다 뱉자니 관심은 끌지 몰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 같았다.

괴물을 넘어 계단 밖으로 껌을 뱉는 것이 최선이었는데, 아무래도 괴물의 육중한 몸에 걸릴 것 같았다. 

-퉤!

뒤 쪽으로 간 필중이 껌을 뱉은 모양이다. 

쫓아오던 괴물의 속도를 조금은 늦췄으리라. 

하지만 앞에서 오는 이 괴물에게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괴물의 뒤 쪽으로, 웬만하면 계단 바깥으로 껌을 뱉어내야한다. 

최대한 입에 힘을 주고, 호흡을 골랐다. 

“퉤!"

그리고 뱉었다. 

단언컨데 지금까지 중 가장 만족스러운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환상곡선도 괴물을 지나치지는 못했다. 

괴물의 몸 근처에 맞고 떨어져버린 것이다. 

우려대로 괴물은 그 자리에서 몸을 쭈그려 자신의 발밑에 있는 껌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계단 한 가운데를 막아선 채로 말이다.

“이… 이런.”

막 내게 다가온 필중이 그 광경을 봤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 일단 내려가자. 저 놈을 밟고서라도 건너가자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필중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무, 무리에요. 저렇게 막고 있는데.”

“방법이 없잖아. 그나마 지금이니까 가능한 거야.”

“무리에요. 하지만.”

필중이 잠시 눈을 지그시 감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 그게 무슨 말이야?”

필중이 눈을 떴다. 

그리고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세요. 제가 미끼가 될 테니.”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무, 무슨 말이야! 지금 같이 내려가면 돼. 어서 가자!”

먼저 한 걸음 내려가 뒤를 돌아봤다. 

필중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저는 어차피 괴물로 변할 거예요. 사실, 아까 그 껌을 뱉으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무, 무슨!”

괴물이 될 거라는 말에는 깜짝 놀랐지만, 미끼가 될테니 나만 살아 남으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필중을 사지로 모는 꼴 아닌가.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어서 가세요! 놈 들이 다시 움직일 거라고요!”

“같이 가야해! 나만 살 순 없어!”

필중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더니, 

주머니에서 남은 껌 모두를 꺼내 입에 넣는다. 

그리고 양 볼에 가득 찬 껌을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질겅, 질겅, 질겅"

"너, 갑자기 뭐하는 거야?"

"질겅, 질겅, 질겅"

필중은 한동안 계속 껌을 씹는 데만 집중을 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질겅, 질겅, 질겅. 만약에 오 주임을 만나면 전해주세요. 퉤!”

필중이 껌을 손에 뱉으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뱉은 껌을 꾹꾹 뭉쳐 손바닥 반 만한 크기로 만들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고.”

-우쉬이우히위히치

계단에 있던 괴물이 소리를 냈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이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팍에는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표독스러운 눈매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리님 잘 들으세요.”

필중의 말과 거의 동시에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가 아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있어요. 앞으로 대리님에겐 꽤 중요한 이야기일수도 있죠. 그러니까 음, 음.”

필중이 바지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더니 핸드폰을 빼내,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버렸다. 

어떤 도움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절실한 도움이었다.

“너, 대체 뭘 할 작정이야?”

“사실 방금 전까지 대리님을 원망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 주임 그 새끼가 나만 멀쩡하게 둘 리가 없어요.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죠. 그러니 나한테만 지 살을 준 것이고.”

“너, 너 지금 무슨 말이야. 오 주임이 또 뭔가 한 거야?”

-우쉬히이위히취이

괴물이 불과 세 걸음이면 닿을 정도까지 다가왔다. 

거기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괴물의 소리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세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필중이 소리치며 나를 옆쪽으로 밀었다. 

그렇게 계단 난간 쪽에 몸을 붙인 자세로 필중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필중은 껌을 든 손을 정면으로 내밀면서 괴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김필중!”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필중은 괴물과 마주섰다. 

그리고 내 쪽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어서 가라고!!”

-우쉬이히위취이!!

-콰악!

괴물이 필중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그저 필중의 바람대로 나라도 살기 위해 뛰어야 한다. 

“씨, 씨팔. 김필중!!”

나는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껌을 세 개나 뭉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괴물은 몸을 비집고 지나가는 나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나는 손쉽게 괴물을 피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필중을 미끼로 말이다. 

“대리님!”

괴물에게 벗어나 몇 계단을 더 내려갔을 때, 필중이 나를 불렀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손전등을 비추었다. 

하지만 괴물의 등에 가려 필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말소리만이 아직 필중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장기자랑 때. 대리님 사회 죽여줬던 거 아시죠?” 

“...별말씀을. 너야말로 필승 죽여줬다.”

“하하하. 고마워요 대리님. 정말 고마...”

-위쉬위휘이휘치

괴물의 소리가 들리면서, 필중의 소리가 끊어졌다. 

아마 방금 전 고맙다는 말이 생 전 마지막 말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누가 누구보고 고맙대.”

끓어오르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기 전에 떨어뜨렸던 나의 핸드폰도 발견했지만 줍지 않았다. 

예상대로 망가져 있었는데, 괴물이 밟기라도 했는지 거의 산산조각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벽에 붙어있는 덩어리 하나를 떼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씹어야 하니까 말이다. 

내 주먹만한 덩어리의, 일부분을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느새 친숙해진 비릿한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진다. 

그렇게 나는 한 손에는 오 부장의 덩어리를, 

나머지 한 손에는 필중의 핸드폰을 쥔 채 1층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손전등의 범위 안에 괴물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고, 그것은 문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문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제 이 문만 열면, 

이 문만 열면 이곳을 나갈 수 있다. 

핸드폰과 덩어리를 왼 손에 쥐고, 오른 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았다. 

- 아. 아. 동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주민 여러분, 안개가 심하게 껴있습니다. 차량 운행은 삼가 주시

고, 밤길을 걸으실 때는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

“후우우. 김필중... 나쁜 새끼.”

나는 잠시 문앞에 앉아 있었다. 

괴물이 문을 열고 나올 확률도 배재한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개새끼. 상사 엿 먹이는 것도 가지가지지. 지가 죽으면, 지가 죽으면. 하. 하. 하.”

웃음이 나오는 가 싶더니.

“큭, 큭, 크흑. 흑흑. 씨,발.”

갑자기 울음이 나온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가 된다는 전설은 있다지만, 웃다가 울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따위 썰렁한 생각이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은 진정 될 것 같았다. 

“좆같은 새끼. 웃냐?”

핸드폰을 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필중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면의 윗부분에는 ‘기다리면 열린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볼 요양으로 슬라이드를 열었는데 감히 다른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화면을 넘기면 왠지 필중을 두 번 죽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말 쓸데없이 거룩한 고정관념에 빠진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런 고착은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 띠띠리리리 띠띠, 띠띠리리리 띠띠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젊은 놈 핸드폰 벨소리가 ‘잘했군, 잘했어’라니. 

- 띠띠리리리 띠띠, 띠띠리리리 띠띠 

핸드폰 액정에는 필중의 사진대신, ‘발신자 표시 없음’ 이라는 글자만 크게 나타나 있었다. 

선뜻 통화버튼을 누르기가 꺼려졌지만, 

혹시라도 가족이라면 나에겐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가 있다. 

물론 얼마나 믿어줄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딸칵

통화버튼을 누르고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김필중씨 핸드폰입니다.”

- 치이이-

말은 없고 거슬리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적어도 실내는 아닌 모양이다.

“말씀하세요. 김필중씨 핸드폰입니다.”

- 치이이이ㅡ 

- 치이이이ㅡ

“말씀 없으시면 끊겠...”

- 치이이- 누구?

막 핸드폰을 끊으려는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에 묻혀서 또렷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예. 말씀하세요. 김필중씨 직장 동료입니다.”

- 치이이이- 동료? 아, 하, 하하하.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난 영문을 몰라 마냥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치이이이- 하하하.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그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수화상태는 좋지 않지만, 절대 잊지 못할 그놈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귀에 박혔다.

“너, 너 이 씨,발 오 주임이지?”

- 치이이이- 큭큭. 다짜고짜 욕을하세요. 그나저나 필중이 핸드폰을 왜 대리님이 가지고 있습니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혔다. 

이 인내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겠다.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 치이이이- 무슨 짓?

“몰라서 물어!? 이 씨팔...”

- 치이이이- 필중이는요?

“필중이 죽었다. 너 때문에 죽었다!”

- 치이이이- 이거 왜 이러시나. 따지고보면 저도 대리님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요?

“뭐, 뭐? 이 개새끼가.”

- 치이이이- 크큭, 뭐 괜찮아요. 저는 나쁘지 않으니까. 

“너, 너, 너 어디야!”

- 치이이이- 필중이 불쌍해서 어쩌나.

“어디냐고 이새끼야!”

- 치이이이- 그건 보셨어요, 제 책상에서?

“어디야!”

- 치이이이- 대리님을 저주하겠다고 쓴 글 말이에요.

“봤어. 봤다고. 그러니까 딴 말 하지마. 나하고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고. 당장!”

- 치이이이- 큭큭큭. 큰 소리 치기는. 자기 처지도 모르면서.

“뭐라고?”

- 치이이이- 행운을 빕니다.

“뭐? 야. 오 주...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씨,발.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오 주임은 예전의 오 주임이 아니었다. 

비꼬는 말투야 예전에도 비슷했지만, 말 하는 내내 흘리는 그 기분 나쁜 조소가 거슬렸다. 

오 주임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내게 행운을 빈다는 말을 한 걸까. 

어쨌든 오 주임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이렇게 슬퍼하고 있을 새가 없다. 

필중에 이어 아내와 딸까지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굳은 마음을 먹으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수월했다. 

막상 걸음을 떼려하자 아까보다 훨씬 짙어진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전등에 의지하면 그럭저럭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안에는 여전히 그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겠지.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또 다시 필중의 웃는 모습이 나를 괴롭혔지만, 다행히 이번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

......

- 여...보세요.

“나야.”

-자, 자기야?

“응. 몸은 좀 어떤 것 같...?”

- 꺼, 껌. 껌! 껌 좀!

“은영아...”

- 제, 제발. 껌 좀 줘. 나, 나 미칠 것 같아. 나, 나.

“곧 갈 거니까. 조금만, 조금만 참아.”

- 모, 못참겠어. 나, 나, 꺼, 껌. 껌 좀. 제발. 제발.

“은비는 아무 이상 없지?”

- 제발, 제발...

“진정해!”

- 제, 제발, 제...

- 딸칵.

......

......

- 아. 아. 한 번 더 알립니다. 후평동 일대에 심한 안개가 껴 있으니 통행에 각별한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이상 동사무소였습니다.

......

......

비탈길로 들어섰다. 

손전등에 의지해서 길을 찾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산길인데다, 이곳엔 단 한 번만 왔을 뿐이었다. 

- 바스락, 바스락.

그나마 낙엽소리가 아니면 산길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잔가지나 돌 같은 장애물들을 효과적으로 피하기도 힘들어, 걸음 속도가 무척이나 느렸다.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안개 때문에 말이다. 

기억하기론 비탈길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갈래 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외진 곳과, 등산로로 나뉘었는데 그 가게는 분명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야가 막혀서야 구분이나 가능할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근처에 있던 바위에 걸쳐 앉았다. 

그리고 시계라도 볼 양으로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아홉 시 십오 분. 

안개 낀 산길을 오밤중에 거니는 내 신세가 왠지 한스럽다. 

물끄러미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다가 메뉴를 눌러 보았다. 

여러 가지 메뉴가 나오고 그중 내 눈에 띈 것은 ‘메시지 보관함’이었다. 

[오늘도 야근이야?

11/05 20:30 러브]

[미안해 일 하는줄 

몰랐어

11/05 20:10 러브]

[전화 왜 끊어?

11/05 20:06 러브]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과 문자를 주고받은 모양이다. 

[전화 좀 받아

11/05 19:50 러브] 

[내가 잘못 했어

그런데 너가 오해

한거라고 

11/05 19:30 러브]

[남자가 자꾸 소심하

게 그럴래?

11/05 19:28 러브]

밑으로 몇 개의 문자를 더 읽어보니 여자 친구가 확실한 것 같았다. 

내용으로 보아 한창 사랑싸움 중이었던 것 같다. 

문득 연애시절에 아내와 다퉜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닭살 커플이었지만, 가끔씩 심하게 다툴 때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내 까탈스러운 입 맛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결혼 후에도 가끔씩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관음증이 발동한 변태 성욕자마냥 나머지 문자들도 빠르게 훑어나갔다. 

[아직도 화났어?

11/05 18:00 러브] 

[안 끝났어?

11/05 18:50 러브]

[니 여자친구도 생각

해야지? 명심해 

11/05 18:40 개새끼]

아는 사람이 여자친구뿐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문득 이질적인 문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니 여자친구도 생각

해야지? 명심해 

11/05 18:40 개새끼]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SK뷰 아파트 201동

1003호 맞지?

11/05 18:37 개새끼]

[말 들어 살려준 은

혜도 모르고 여자친

구 예쁘더라?

11/05 18:34 개새끼]

[안하겠다고? 

11/05 18:34 개새끼]

[김 대리한테 그걸 삼

키게 해 방법은 너가

알아서 생각하고

11/05 18:32 개새끼]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정황상, 직감상, 이건 틀림없는 오 주임이었다. 

필중에게 뭔가를 요구했지만, 그것을 거절하자 여자 친구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이렇게 최악으로 변할 수가 있는 거지? 

[그건 알 거 없어 너

만 괜찮으면 됐잖아

11/05 18:30 개새끼] 

........

[쓸쓸해?ㅋㅋ 

11/05 15:20 개새끼] 

뭔가 중요한 내용이겠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필중의 보낸 메시지를 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저장 해 두지 않은 것 같다. 

중간에 ‘김 대리’라는 말이 나온 걸로 봐서는 나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대체 필중은 오 주임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걸까. 

.......

.......

아까보다 부쩍 심하게 추위가 느껴진다. 

안개가 조금은 거치길 바랐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어차피 길은 두 개 뿐이다. 

그러니까 확률은 반반.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잠시 머뭇하는 것도 잠시, 친숙한 오른쪽 길로 몸을 틀었다.

8.

내가 생각할 때 이 길은 다행히도 외진길이 분명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쩍 늘어난 돌맹이들과 잔가지, 그리고 관리 안 된 나뭇가지까지 가세해 나의 걸음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등산로라면 하다 못 해 나뭇가지 정도는 쳐 놨을 텐데 말이다.

확신이 깊어질수록 한 걸음 떼기가 무서울 정도로 길이 험해진다. 

이대로 가다가 굵은 가지에 눈이라도 찔리면 큰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 손전등을 넓게 비추고 왼손으로 앞을 더듬어가며 걷는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맛 집이고 뭐고 다시는 후평동 쪽에는 얼씬도 안 할 거라는 생각이었고,

둘은, 거래처 사장에게 들었던 그 괴상한 이야기였다. 

......

......

“그건, 마을에 갑자기 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네.”

“괴상한... 일이요?”

“그래. 말 그대로 괴상한 일. 그 집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이었네. 길게 말 하진 않겠네.

그렇다고 길게 아는 것도 아니지만 허허.”

“예,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우선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 중 대부분이 죽었어. 한 사람만 살아남았으니 대부분이란 말도 약간 어폐가 있네만 어쨌든.


그런데 그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다고 해. 뭐 신체가 훼손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고통스러워하며 죽었다고 하더라고.


뭐랄까. 뭐에 중독이라도 된 사람처럼 스스로 온 몸을 쥐어뜯어가며 괴로워했다고 해. 그것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부 똑같이 말이야.”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한 사람만 그렇지 않은 건가요?”

“맞아. 그 사람은 멀쩡했지. 아니 어떻게 보면 멀쩡한 것도 아니었어.”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몸은 멀쩡했지만 성격이 아예 딴판이 되었다는군. 그러니까 몹시 과격하게 변해서 심지어는 지 부모까지 때렸다고 해.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하게 안 좋은 소문이 퍼졌지. 나중엔 정말 죽어야 할 놈은 살아있고, 착하디착한 사람들만 죽어났다라는 등의 말까지 나돌았지.


하여튼 이 모든 게 그곳을 다녀온 이후로 벌어진 일이니 얼마나 괴상한 일이야. 안 그래?”

“정말 그곳에 뭔가가 있군요. 이거 저도 살짝 두려운데요?”

“자네는 왜?”

“저도 거길 다녀왔으니까요. 매점 주인보다 그 음식점 주인, 사장님 말씀대로라면 딸이 되겠죠? 그 사람이 더 이상했어요.


뭐 매점 주인도 이상했어요. 저한테 괴상한 껌이나 주고...”

“껌? 그 사람이 껌을 줬어!?”

“예? 아, 예. 뭐. 맞아요. 처음에는 주기 싫어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주더라고요. 기가 막히게 달다면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아.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내가 말한 그 사람들 말이야. 돌아왔을 때 하나같이 껌을 씹고 있었다고 들었거든.


뭐 그때도 여전히 껌 장사를 한 모양이지 허허.”

......

......

402호에 두고 온 족발과 보쌈은 잘 있을까. 

혹시 괴물들이 그런 것도 먹는 것은 아니겠지. 

손전등만 챙기지 말고 그것들도 챙길걸. 

일부러 비싼 집에서 샀는데 아까워 죽겠네 정말.

대체로 이런 생각들이 가득한 걸로 보아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기 시작한 모양이다. 

저녁은 먹었지만 운동 아닌 운동을 워낙 많이 한 탓에 금방 배가 꺼진 것 같다. 

그나저나 살짝 긁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픔이 오래간다. 

방금 전에 미처 피하지 못 하고 나뭇가지에 베인 내 오른쪽 어깨 죽지가 말이다. 

어깨가 욱신거릴수록 이 맛없는 오 부장 껌을 씹는 내 턱의 속도도 빨라진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상대적으로 덜 외진 길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든 후부터 급속도로 걷기가 편해지고 있었다. 

뭔가 관리를 받는 영역으로 진입한 모양이다. 

조금 지나니 먼발치로부터 안개를 뚫고 보이는 갈색 건물의 외형이 손전등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 가게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내 어깨 죽지를 노릴 나뭇가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속도를 높여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안개는 대체 언제까지 껴 있는 거람. 

걸음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급속도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까지 흐르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뭔가를 얻어내지 못 한다면 아내와 은비는 꼼짝없이 죽거나 괴물이 되고 만다. 

그리고 당장 만나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도 걱정이다. 

'이 망녕 난 늙은이야' 라고 소리칠지, 

'저 기억하시죠?' 라고 점잖게 물어볼지, 

다짜고짜 '씨,발' 하면서 후려갈길지 말이다. 

물론 '저 기억하시죠?' 쪽으로 굳힌 건 두말 할 필요 없었지만. 

-끼이이익

“콜록 콜록.”

자욱한 먼지가 내 기관지를 괴롭힌다. 

내부는 불을 꺼놔서 몹시 어두웠다. 

아니 몹시 어두운 정도를 떠나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흡사 아까 전에 건물에서 느꼈던 어두움과 비슷했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나를 두렵게 만들었던 그 어둠 말이다. 

“콜록, 저기요.” 

문을 닫고 손전등을 앞으로 비췄다. 

안개가 없어서 그런지 손전등을 비추는 곳 마다 불편 없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해도 결코 인상적인 내부는 아니었다. 

일단 며칠 전과 다를 바가 없었고, 

유통기한이 수십 년은 지났을 것 같은 고대 과자들만 잔뜩 쌓여있을 뿐이었으니까. 

“안 계세요? 저기요?”

여기저기를 비춰보아도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좁고 길쭉한 내부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오래된 쪽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가게와 집을 같이 붙여 쓰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오늘 밤은 실례가 되는 짓을 조금 해야겠다. 

그러니까 허락의 유무를 떠나서 이 문을 벌컥 열겠다는 말이다. 

일단 물어는 봐야겠지 들어가도 되겠냐고.

“저기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무로 된 미닫이문의 손잡이를 붙잡아 강하게 옆으로 재꼈다. 

-벌컥!

낡은 문이라 뻑뻑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쉽게 열렸다. 

불이 꺼진 방 안에는 몹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팔을 들어 코와 입을 막고 손전등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억?”

그리고 나도 모르게 뱉어내는 신음소리.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하, 할아버지!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신발을 벗는 것도 잊은 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주인의 끔찍한 모습을 본 순간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가까이서 보는 주인의 모습은 더욱 참혹했다. 

밀가루 반죽을 수제비로 만들기 위해 제멋대로 떼 낸 것처럼, 

주인은 온 몸의 살점이 뜯겨져 나간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딱 널 부러졌다는 표현이 옳을 수밖에 없는 게, 

점잖게 눕거나 엎드린 자세가 아닌, 마치 나치의 기호처럼 팔과 다리를 보기 흉하게 펼쳐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죽었다면, 이 사람이 죽었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채 돌아가야 하고,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어야 한다. 

막말로 살점이 뜯기든, 심장을 파 먹히든 그건 내 알바가 아니다. 

숨만 붙어있다면, 

그러니까 나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 말만 해줄 만큼의 생명력만 가지고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씨, 씨,발! 눈 떠, 눈 뜨라고!”

손전등을 얼굴 바로 앞까지 비추며 소리쳤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씨,발!”

-퍼억!

다짜고짜 씨,발이라고 외치며 후려갈겼다.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저 기억하시죠? 였는데. 

-퍼억! 퍼억!

몇 번 더 후려갈겼다. 

차마 노인의 얼굴은 때릴 수 없어 몸통과 팔을 타겟으로 삼았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퍼억! 퍼억! 퍼억!

“씨,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얼굴을 때릴 찰나,

“으으음.”

주인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주먹의 움직임을 멈추고 주인을 향해 다시 손전등을 비추었다. 

주인이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그가 빛을 인식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으으으. 누, 누기래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우선 나는 손전등으로 내 얼굴을 비추며 노인에게 말했다.

“나에요. 기억하시죠?”

그 상태로 충분히 시간을 준 후 다시 주인을 비추었다. 

주인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때 껌 삼키지 말라고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어? 아아. 자네로기만.” 

기억이 난 모양이다. 

주인의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자넨 삼키지 않았니?”

“삼키지 않았어요. 저는 원래 껌 삼키는 것을 싫어해요.”

“오호. 대단한데. 이 껌을 삼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뭐에요? 그럼 삼킬 걸 예상하고 줬다는 거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주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리 소리를 질러? 껌 삼키면 어떻게 되는지 봤니?”

“봤죠. 아주 잘 봤죠. 잘도 그런 껌을 우리한테 줬습니까!”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쩌다가 다 죽어가는 노인을 윽박질러야 하는 상황까지 되었을까. 

“진정해 진정. 나는 분명히 경고했디. 그리고 니들이 먼저 달라고 했디. 안 그래?”

말을 마친 주인이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전에 왔던 놈과는 반응이 영 다르네. 에헹.”

“아까... 전?”

“니랑 같이 왔던 놈 있잖아. 삐쩍 마른 놈 말이야.”

삐쩍 마른 건 둘째치고 나랑 같이 이곳을 왔다는 것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오 주임이었다.

“오 주임? 오 주임이 여길 왔었어요?”

“그래. 왔었디. 그놈이 내 몸뚱아리를 어떻게 해 놨는지 봐.”

주인이 뜯겨져나간 자신의 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그게 오 주임이 그랬다는 거예요?”

“크, 크, 크큭. 맞아. 그렇지만 내가 원했던 일이야.”

“원하다니. 무슨 말이에요 대체!”

“나는 이제 늙고 힘이 빠졌으니 숙주가 될 수 없디. 젊고 싱싱한 새로운 숙주가 나타났으면 당연히 물러나야 하는 거야.”

주인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 숙주라니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요!”

“그 놈에게 내 딸도 줬디. 내 딸은 숙주를 돕는 데는 최고디. 더불어 예쁘기도 하고. 끌끌.”

“딸? 옆에 음식점 주인 말이에요?”

주인이 약간 놀랐다는 눈초리를 보였다. 

“오잉? 그걸 어떻게 알았디? 그래. 걔가 내 딸이디. 늦게나마 짝을 만나서 출가했으니 난 이제 염원이 없

다. 끌끌끌.”

정리해보면, 

오 주임은 숙주인지 뭔지가 돼서 주인의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사십대는 훌쩍 넘긴 것 같은 그 아줌마를, 그러니까 주인의 딸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 버렸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잘 이해했다고 소문이 날 수 있을까? 

“오 주임이 원한건가요? 그렇게?”

“글치! 그건 숙주의 사명인걸. 내 딸은 숙주 옆에 있어야 하니께. 그건 니가 될 수도 있었고. 끌끌.”

“내가 될 수도 있었다?”

“고럼. 둘 모두가 그렇게 됐다면 한 놈은 나한테 죽었을 거야. 다행힌거디. 끌끌”

이 미치광이 노인내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가. 

온 몸이 뜯어져나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상태로, 정신 나간 소리를 잘도 내뱉고 있었다. 

그 음식점 주인을 데리고 산다는 생각만으로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보세요! 일단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껌을 삼킨 사람을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요. 저는 그것만 들으면 돼요.”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처럼 갑자기 눈동자를 뒤집었다가 정상으로 돌렸다가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온 몸에 살이 뜯겨져 너덜너덜한 노인네가 눈을 뒤집고 있는 모습은 실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봐요! 어서 말해요. 시간이 없다고!” 

순간 노인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껌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니?”

“아, 진짜 딴 말 하지...”

“삼키면 어떻게 되는지 까지만 아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인이 완고한 어조로 내 말을 끊어버렸다. 

아무래도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으면 원하는 대답을 얻기 힘들 것 같았다.

“후우. 알만큼 알아요. 삼키면 괴물로 변하는 것. 껌을 씹다가 뱉으면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한 번 씹으면 미친 듯이 삼키고 싶은 것!”

“끌끌끌 끄윽, 끌끌끌큭큭.”

내 말이 끝나자 노인이 웃기 시작했다. 

“많이 아네.”

“그러니까 어서 말해요.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는지!”

“그런데 껌을 삼키면 무조건 괴물로 변하는 건 아니디. 때로는 그 자리에서 눅눅하게 변하기도 허고, 때로는 뻥 하고 터지기도 허디.


그건 어떤 법칙이 있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삼킨 사람이 껌으로 변한다는 거디.”

오 부장은 폭발하고, 양 주임과 이 주임이 괴물이 된 데에는 딱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인가? 

주인이 계속해서 말했다.

“껌을 씹다가 뱉으면 죽디. 살기 위해선 계속 씹거나, 삼키거나 둘 중 하나 뿐이야.”

“껌으로 변하는 게 죽는 것과 뭐가 다르죠!?”

“끌끌끌. 껌으로 변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싶니?”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할 모양이었다.

“어, 어서 말해요.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아내는, 내 딸은 변하고 있을 거라고요. 그 빌어먹을 껌인지 뭔지!” 

“끌끌끌끌. 가족이 껌을 삼켰나? 경솔했군. 끌끌.”

뭐가 그렇게 웃긴지 계속 끌끌 거린다.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원하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말이다. 

“그 전에. 숙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겄는디 괜찮겠어?”

“제기랄! 괜찮지 않아요.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예요!”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숙주고 나발이고 나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내와 딸만 구할 수 있으면 된다. 

어찌됐건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할 일일 뿐이다.

“어허 성깔머리하고는. 좋아 그것부터 말해주겠어.”

“어서 말해요!”

“끌끌. 숙주의 살을 씹으면 돼. 그러면 껌으로 변하지 않디.”

“씹다가 뱉으면요?”

“그럼 다시 돌아가게 되는거디. 껌을 삼킨 시점으로. 끌끌끌.”

문득 필중의 말이 떠올랐다. 

오 주임의 껌이라서 뱉을 수 없었다는 그 말. 

그렇다면 필중도 껌을 삼켰던 것인가. 

“그럼 일시적인 거잖아요. 좀 더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줘요!”

“끌끌. 그럴려면 내 딸에 대한 이야기와, 숙주의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 듣겠니 안 듣겠니?”

왈가왈부 하며 시간을 허비할 바엔 차라리 듣는 쪽이 나을 것 같다. 

결국 교활한 늙은이의 페이스에 따라가게 되는 모양이다.

“후우... 알았어요. 어서 말해요.”

나는 말이 길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

......

“택시!”

가게에서 나오니 다행히도 안개가 조금 걷혀있었다.

차량들도 제법 통행이 가능할 정도여서 어렵지 않게 택시 한 대를 잡을 수 있었다.

“서울이요.”

“네?”

택시기사가 나의 말에 짐짓 놀란 표정으로 반응을 한다. 

하지만 이내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를 띠기 시작한다. 

곧 있으면 할증도 붙을 테니 그야말로 봉 잡은 기분일게 뻔했다. 

어차피 나도 수 십 만원 깨질 건 각오하고 있었다. 

사실 수 십이든, 수 백이든 돈 따위는 지금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님. 서울까지는 요금이 상당히 나올 텐데 괜찮으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슬쩍 나를 떠볼 모양인가보다. 

“제가 정말 급합니다. 돈은 따블로 드릴 테니 최대한 밟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사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밝아졌다. 

택시 기사 입장에선 정말 엄청난 횡재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타, 타세요. 운전벨트 단단히 메셔야 할 겁니다.”

기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얼마나 걸릴까요?”

“음. 여기 빠져나가는 것만 조심하면 대략 두 시간 내외로 도착할 것 같은데요?”

두 시간 내외도 내게는 너무 길다. 

“더 빨리는 안 될까요? 한 시간 반 정도로.”

“아, 그렇게는...”

“따따블로 드릴게요.”

“아, 뭐. 예. 오늘 정말 미친 듯이 밟아보죠!”

기사가 평소에도 이렇게 환하게 웃어준다면 손님들이 비싼 택시비를 내더라도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따따블을 준다는 말에만 이러지 말고 말이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기사는 엑셀에서 좀처럼 발을 떼지 않으며 능숙한 솜씨로 기어를 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계기판의 화살표가 숫자 100을 지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 밤의 질주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한 쪽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잡고, 

나머지 손에 쥐고 있는, 가게 주인이 죽기 전에 남긴 손가락 두 마디만한 크기의 유리병을 보고 있었다. 

반 정도 차 있는 분홍색 액체가 택시의 움직임이 격해지자 병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트에 머리를 기댄 후, 

나를 무척이나 곤란하게 만들고 죽어버린 그 노인네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그 생각 덕분에 먼 길을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느새 택시가 영동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짙었던 안개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자 이제 선택은 자네가 하는 거네. 세상을 구하고 영웅이 될 지, 당장 가족만 구하고 말 건지 말이야.”

......

......

-끼이이익.

택시가 급정거를 했다.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했지만 다행히 쥐고 있던 유리병은 놓치지 않았다.

“야 이 개새끼야! 운전 좆같이 할래!?”

기사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씨,발. 끼어들기를 할 거면 깜빡이라도 키던가.”

“시속 100킬로가 넘는데 끼어들기를 했다고요?”

기사가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고 다시 기어를 넣으며 말했다.

“요즘 정신 나간 놈들 많아요. 간 떨어질 뻔 했네 진짜.”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 끼어들기를 했다는 차량의 뒷 꽁무니가 확실히 보였다. 

“5..7..7..8 이네요.”

“예?”

“차량번호 말이에요.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러자 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꼼꼼하시네요. 자 그럼 다시 달려봅시다.”

말을 마친 기사가 다시 엑셀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

......

“먼저 숙주에 대해서 말을 허디. 나는 여기로 도망 오면서 내 전 숙주를 만나게 됐어. 그리고 나도 그 껌을 삼켰다.


온 몸이 근지럽고, 열이 나는디. 미칠 것 같더라고. 그때 그 사람이 말 했디, 숙주의 거래를 하지 않겠냐고. 숙주의 거래를 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난 무조건 그러겠다고 했디. 끌끌. 그런데 대가로 내 딸을 요구하더라고.”

......

......

“저 죄송한데요.”

기사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혹시 뭐, 껌 같은 거 있나요?”

“예?"

순간 흠칫 놀라 되묻고 말았다. 

껌이라면 아주 덩어리째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없어요. 저는 껌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기사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에이. 지금 씹고 있는 건 뭐에요 그럼.”

아차. 

껌을 씹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에 애를 먹은 적이 있던 것 같다. 

아마 그때도 택시 안이었지.

“아아. 이건 껌이랑은 좀 다릅니다. 그냥 고무 같은 거예요. 제가 턱이 좀 약해서요.”

아무리 지어냈다고 하지만 이렇게 조악한 변명을 하다니. 

민망한 나머지 껌을 씹는 움직임이 더욱 빨라진다. 

역시나 기사는 영 시덥지않다는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럴 때는 눈을 감아버리는 게 최고지.

......

......

“씨벌 내 딸을 다 늙어빠진 새끼한테 갖다 주려니 야마가 돌디 않겠어? 처음엔 거절했디. 차라리  듁겠다고.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정말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씨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그래서 내 딸이 뭐냐고? 내 딸은 숙주의 씨를 만들디. 숙주가 되려면 내 딸의 살을 먹어야 한다.”

......

......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HBS 자정 뉴스입니다. 첫 소식입니다. 오늘 저녁 서울 강동구에서 택시기사 

박모씨가 가족 모두를 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박씨의 종적은 묘연한 상태이고, 

피해 가족은 아내와 아들 두 명, 그리고 생모까지 총 네 명인 걸로 밝혀졌습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박씨는


아내 유모씨와 생모를 살해한 후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아들 두 명에 대해서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토막을 내어 집안에 방치한 것으로 알려져, 수법의 잔혹성을 짐작케 하는 상황입니다.


경찰은 현재 긴급 수배령을 내리고 전국의 고속도로 및 톨게이트에서 집중 검문을 실시하고 있으니, 청취자 여러분들도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

......

“이제 젊은 놈이 숙주가 됐으니 내 딸도 팔자가 핀 거디. 끌끌. 으음. 이제 나도 가야할 시간이 되었네. 

이제 나는 숙주도 뭣도 아닌 죽어가는 영감탱이일 뿐이다. 전쟁만 안 터졌어도 이런데 쳐 박혀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으으음.


똑같이 껌을 삼켰는데 왜 누구는 숙주가 되고, 누구는 괴물이 됐냐고? 간단허디. 잘 생각해 봐. 모르겠니? 너희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

......

기사가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며 내게 말했다.

“와아. 이거 뭐야. 이러면 택시기사 이미지만 나빠질 거 아니야.”

투덜거리는 기사와 달리, 나는 택시기사 이미지에 대한 염려는 전혀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내 예상이 틀리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침만 꿀꺽 삼키고 있었다. 

기사가 내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표정이 왜 그렇게 굳었수? 거 이상한 생각하지는 마쇼. 저런 택시기사는 소수니까.”

“벼, 별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왠지 제가 아는 사람일수도 있어서 그런 거에요.”

“아는 사람? 강동에 사는 택시기사 박모씨가 한 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안답니까.”

껌을 안줘서 삐지기라도 했는지 기사의 말투가 사뭇 거칠게 느껴진다. 

“그런 게 있어요.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아까보다 속도가 느려진 것 같네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기사가 입을 몇 번 쩝쩝 거리더니 이내 힘차게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서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

......

“먹었잖아 너희들은. 그러니까 내 딸의 살을 말이디. 끌끌. 그래 맞다. 그 음식 말이야. 끌끌끌, 콜록. 

내 딸의 살을 삼키고, 숙주의 살을 삼키면 숙주의 계승자가 될 수 있는 거디. 정자와 난자가 만나듯이 말이디.


너는 그런데 내 딸의 살만 삼킨거디. 씨앗만 안에 품고 있는 거야. 끌끌. 새로운 숙주가 나타나면 그 전 숙주는 숙주 행세를 하면 안 돼.


그래서 새로운 숙주가 온 몸의 살을 뜯어 가는 거야. 이렇게 골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디.”

......

......

유리병을 보았다. 

주인이 만일을 대비해서 지니고 있었다는 샘플, 

그러니까 아내를 구할 수 있는 해독약이었다. 

자신의 피와 딸의 피를 섞어서 배양한 것이라곤 했는데, 

더 많이 만들어놔도 좋았을 것을 하나만 만들어 놓은 주인의 심술이 괘씸했다. 

세상을 구할 것인가, 가족을 구할 것인가? 

주인이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본인도 장본인 중에 한명이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뭐, 숙주의 의무 따위는 이제 자신이랑 전혀 상관이 없다나, 뭐라나. 

나 역시도 세상을 구하는 의무 따위는 나랑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눈앞의 가족을 죽이고 세상을 구해봐야 내게 무슨 이로운 일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우연찮게 언론에 알려주면 얼마간 칭송을 받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은 나를 평생 괴롭게 할 것이 분명하다. 

가족을 구한 다음에도 약이 남는다면 생각해 봐야겠다. 

세상을 구하는 일을 말이다.

......

......

“지랄 같았던 숙주 인생도 이걸로 끝이다. 끌끌끌. 가족을 구하고 싶디? 방법이 있디. 있고 말고. 끌끌끌.


이걸 받아. 콜록. 뭐냐고? 그냥 해독약이라고 보면 돼. 나도 써 본적은 없다. 그런데 될 거야. 나와 내 딸의 피를 섞은 것이니까.


완전히 정상이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괴물이 되거나, 터지거나 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도 그렇고, 내 전 숙주도 그렇고. 이렇게 산에 떨어져 살면서 번식을 멀리했단 말이디. 그런디. 이번 숙주는 그게 아니야.


나는 숙주의 힘을 나와 내 딸을 지키는 데 썼지만, 그 놈은 그보다 더한 곳에 쓸 거란 기분이 든단 말이디.


세상에 아마 큰 위험이 닥칠 것 같아, 나야 뭐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콜록, 콜록.”

9. 

- 뚜우우우우우

- 뚜우우우우우

- 뚜우우우우우

- 뚜우우우우우

-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

......

- 끼이이이이익

“우와아아앗!”

기사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체가 왼쪽으로 급선회한다. 

다행히 난간에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뭐에요, 뭐!”

기사는 눈을 멀뚱거리며 격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아마 당사자가 가장 놀랐을 테지. 

앞을 보니, 이 차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파란색 중형 승합차가 서 있었다. 

갑자기 차를 멈춘 모양인데, 도로 한 복판에 차를 세우는 것만큼 위협적인 것도 없다. 

더군다나 여기는 고속도로고, 우리는 시속 100킬로 이상으로 달리는 중이었으니, 

하마터면 커다란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 아아. 니미 씨,발. 저새끼. 씨,발 뒤졌다 넌!”

기사가 점점 정신을 찾는가 싶더니 이내 흥분상태에 빠져든다. 

난폭하게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돌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한바탕 하려는 모양이다.

“아 시간 없으니까 그러지 마세...”

기사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앞 차를 향해 걸어갔다. 

앞 차의 운전석까지 다가간 기사가 창문을 몇 번 두드렸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손을 올려놓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 

지금 이러고 있을 때에도 아내는 점점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조수석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아저씨! 그냥 오세요!”

“아.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기사가 이렇게 말 하고는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열어! 열라고 씨,발!” 

“아 그냥 납두고 오시라고요! 지금...”

앞 차의 번호판을 보는 순간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내 입에서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오...칠...칠...팔? 어? 뭐야 아까 그 차 아니야?”

“뭐라고요?”

-드르르르르륵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문자메시지가 온 모양이다. 

슬라이드를 열어 내용을 확인한다.

[앞으로10초안에 

이새끼치워주십쇼 

00: 46 개새끼]

발신자 개새끼.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돌아와요 어서! 어서!!”

“열어! 열어! 개새끼야! 열라고!”

기사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문을 발로 뻥뻥 차기까지 하며 오버를 하고 있었다. 

문자의 내용으로 보건데, 저 차 안에는 분명히 오 주임이 있다. 

왜 이곳에서 우리를 식겁하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 주임이 지금 매우 위험한 놈이란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어서요! 위험하다고요!!”

방금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기사는 여전히 독불장군마냥 내 말을 무시한다. 

-드르르르륵

그때 또 들리는 진동 소리.

[분명히경고했습니

다 

00:46 개새끼]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 어서 이리 오라고요!”

드디어 기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절망적이었다.

“아 진짜 조금만 기다리라고요!”

“시간 때문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 위험...”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기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과정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창문이 점점 열리면서, 그의 표정도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보인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불쾌한 무언가가.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운전석에 앉았다.

“으, 어, 어, 으.”

기사가 어버버 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창문 밖으로 어떤 물체가 확 하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기사의 얼굴 전체를 감싸버렸다. 

분홍빛을 띠고 온통 울퉁불퉁한 덩어리. 

나는 저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똑똑히 기억한다.

“씨팔!”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살면서 택시를 몰아볼 기회는 이때 밖에 없겠지.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자. 

기사는 덩어리에 온통 뒤덮여서 이제는 거의 침식당했다는 표현이 옳아 보였다. 

아마 필중도 저렇게 당했겠지. 

차가 막 그곳을 지나칠 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그리고 괴물의 틈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한 사람은 어딘가 낯이 익는 여자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오 주임이었다. 

그리고 뒷자리의 괴물이 팔을 쭈욱 늘어뜨려 기사를 붙잡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괴물이라면 가능하다. 

차끼리 수평이 되는 그 순간, 오 주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소름끼치는 미소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를 악물고, 아까보다 더욱 더 발에 힘을 주었다. 

......

......

“콜록, 콜록. 콜록, 콜록. 그래도 내 마지막을 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콜록, 콜록.

평생 나쁜 짓만 할 줄 알았는데 콜록. 처음 너한테 줬던 그 껌. 그 껌이 세상에 퍼디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다. 콜록 콜록.


그리고 그건 시간문제이기도 하디. 세대가 너모 달라졌어. 내 딸이 함께라면 순식간에 퍼디게 될 거다.


그 후의 세상은, 너도 아마 예측할 수 있겠디. 끌끌, 콜록, 콜록. 나도 왜 이약을 만들어 놨는지는 모르겠어.


나도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는데 말이야. 콜록, 콜록. 뭐, 자식 가진 부모 마음이 다 그렇디. 콜록, 콜록.


적어도 망가진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딘 않으니까. 콜록, 콜록. 언젠가, 아주 우연찮게라도 내 딸을 고칠 방법을 알아낸다면.


콜록, 콜록. 꼭 고쳐주게. 콜록, 콜록. 그리고 세상을, 세상을 구해...주..끄으...” 

......

......

“씨,발, 내 코가 석잔데 무슨 놈의 세상을 구해!”

터널로 들어왔다. 

백미러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아내와 은비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고, 계기판의 숫자는 어느새 120을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정신 나간 질주를 해 본적은 이 전에 딱 한 번 있었다. 

처음 면허를 딴 스무 살의 어느 날, 

새벽에 아버지 차를 몰래 타고 나가 무작정 경부 고속도로로 진입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신났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톨게이트 부근에서 경찰에게 붙잡히기 전까진 말이다. 

차가 드디어 한강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2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핸드폰을 들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 뚜우우우우

- 뚜우우우우

- 딸칵,

“여보세요! 여보세요!? 자기야. 자기야!”

- 아... 빠?

아내가 아니라 은비가 전화를 받았다. 

“어? 은비야. 엄마는. 왜 네가 받았니?”

- 아빠...... 엄마가 조금 이상해. 

“뭐? 엄마가 지금 어떤데?”

수화기 너머로 은비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 흐, 흐흑. 엄마가 이상해. 흐아아앙.

“은비야. 은비야 울지 마. 울지 말고 아빠 말 잘 들어.”

침을 한 번 삼켰다.

“지금 당장 방으로 들어가서 문 잠그고 있어. 어서!”

- 아빠. 아빠. 은비 무서워...

“그러니까 아빠 말 들어. 엄마가 문 열어 달라고 해도 절대 열어 주면 안 돼. 알았지?”

- 으아아아앙. 무서워 아빠. 으아앙.

“은비야. 어서 아빠 말 들어. 아빠 곧 있으면 가니까 조금만 참아.”

은비에게 말이 없었다.

“은비야 아빠 말 듣니?”

- 으응. 알았어. 아빠. 빨리 와야 해.

딸칵

계기판의 화살표가 어느덧 막다른 곳까지 다다랐다. 

......

......

“우아아악!”

너무 놀라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마주 오는 차가 졸음 운전이라도 했는지 중앙선을 살짝 넘어왔기 때문이다. 

살짝만 핸들을 꺾었는데도 균형 잡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난간을 스치며 가까스로 차체를 진정시킨다. 

심장은 요동치고, 식은땀이 뻘뻘 났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이제 대부분의 비밀은 모두 알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다름 아닌 필중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직 말 하지 못 한 것들이 많으니 핸드폰을 보면 도움이 될 거다’라고 했던 말. 

분명히 핸드폰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고, 오 주임의 변화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 그렇구나!’ 할 정도의 비밀은 알아낼 수 없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것치고는 적잖이 시시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필중의 핸드폰을 충분히 살펴볼 여유를 갖지 않았었다. 

그나마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담긴 문자메시지를 읽는 데만 줄 창 시간을 낭비했었다. 

주소록이나, 통화기록, 그리고 메모 같은 것들을 전혀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전력질주로 아내와 은비를 구하는 일만 생각해야 한다. 

핸드폰을 살피는 것은 그 이후로 미루자. 

그러니까 세상을 구할 때로 말이다.

나는 영등포 로타리에 들어서서야 기름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 전부터 분명히 신호를 보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거니와, 정유소에 들릴 틈도 없었다. 

차가 이렇게 멈춰버릴 정도로 기름을 소진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문래동까지는 전속력으로 달리면 15분 정도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15분을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점 차 낯익은 상점들과, 건물들이 시야를 스치기 시작한다.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아직까지는 용케 다리가 버텨주고 있다. 

다시 한 번 오른손에 쥔 유리병과 왼 손에 쥔 핸드폰을 확인한다. 

그리고 뒷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오 부장 덩어리도 잘 있는지 만져본다.

-띠디 띠리리리, 띠디 띠리리리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표시가 안 돼 있다. 

“하아, 하아. 여보세요?”

- 나에요.

오 주임이었다. 

여전히 조소가 섞인 불쾌한 목소리였다.

“하아, 흐윽. 하악. 너, 너 이 씹새끼.”

- 이제는 받자마자 욕이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하아, 하아, 하아, 할 말 없어. 끊는다. 하아, 하아.”

- 아 아. 잠깐만요. 

오 주임이 계속 말을 이었다.

- 그 핸드폰은 두고 가셔야겠어요. 이유는 아마 잘 아실 거에요.

“하아. 하아. 이유 따윈 모르겠고. 하아. 하아. 한 마디 밖에 못 해 주겠다. 하아.”

잠시 숨을 몰아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좆이나 까 잡숴.”

-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병신.”

- 좋아요 그럼, 딸칵

오 주임이 전화를 끊었다. 

열받아할 그놈의 얼굴을 생각하니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기분이다. 

그런데 마냥 좋아하기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통화내용을 곰곰이 되씹어보니 더욱 명확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한 거지? 

설마? 

그 순간 갑자기 뒤쪽이 환해지는 것을 느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차 한 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내게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인도로 차가 침입해 올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빛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나는 중형승합차였다. 

아마 번호판은 5778이겠지. 차량용 라이트가 순식간에 내 온 몸을 휘감았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가족을 구할 수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승합차의 거대한 위용이 내 시야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은비의 모습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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