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꿈의 수호신 part.2
고양이와 자동차는 커녕, 연구실에는 분명 나뿐이었다.
고장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일단 다른 방에 있는 물건이랑 바꿔놨어.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놈이 당신 연구실에서 총격전이랑 난교파티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하던데. 그 연구실에 뭔가 있어.
'총싸움이랑 ... 뭐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난 유령이나 귀신은 믿지 않는다. 무언가가 날 죽이려고 한다면 그건 내가 초자연적인 존재와 원수졌기 때문이 아니라, 꿈을 연구하는 과학자라서다.
"당신을 이리 데려오고 나서 내가 혼자 거기 있어봤는데 말이야. 의심할만한게 딱하나 있어."'
남자의 말과 동시에 나도 그 의심할만한 것이 뭔지 바로 알아쳤다
'꿈 렌즈."
"맞아. 그 물건 스크린을 가리니까 모션디텍터가 움직임을 보고하것도 바로 멈줬어."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당장 연구실에 가야했다.
불행히도 난 침대에서 채 뛰쳐나오기도 전에 그에게 손목을 잡혔다.
'너 또 가서 책상에 엎어져 자기 전에 나랑 먼저 할 거 있지 않냐?"
"뭐가요.이거 놔요.'
내 경호원은 날 힘으로 제압하다시피 하여 침대에 눕혔다. 아니, 힘으로 제압하다시피 한 게 아니라 정말로 힘으로 제압했다. 매트리스에 뒤통수를 붙인 내게 그는 어느새 챙겨온 것인지 공유몽 중계기를 들이밀었다.
"그 이상한 기계에 내 꿈 담아주는 대가로 이거 한 번 더 하기로 했잖아."
"하...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나한테는 중요하거든.
한바탕 남자의 두꺼운 팔을 두드려대고 단단한 가슴팍에 몇 번 주먹을 박은 끝에 난 그를 내 힘으로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 제기랄."
"앙탈 부리지 말고 기분 좋게 같이 자자고.
"지금 본인이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기는 해요? 어으, 제기랄! 무식하게 힘은 세서!"
센 거 좋아하잖아."
결국 그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관자놀이에 패드를 붙이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 되었다.
한숨 더 잔다고 생각해야지. 눈 깜짝할 새에 끝날 거니까. 그 뒤에는 꿈 렌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살펴볼 거야. 대체 왜 모션디텍터가 꿈 렌즈의 화면에서 온갖 움직임들을 감지했는지 알아볼 거야. 그 하얀 화면이 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 알아낼 거야.
그게 내가 세 번째 공유몽에 임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세번째 꿈은 시작만큼이나 끝도 단순했어야 했다. 함께 꾸는 꿈의 끝에는 개운함과, 아른거리는 몽환의 기억 파편들과, 가소로운 농담거리로 몇 번 쓰이곤 희미해질 추억만이 있어야 했다. 대신 나는 눈물을 흘리며 깨어났다.
"왜 울어?"
나도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그러는 그쪽은요?"
바로 옆에 누운 남자의 똑같이 눈물진 얼굴을 보자마자 난 그의 손을 잡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꾸던 꿈이건만, 내용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온기를 확인해야 한다는 충동이 내 본능마냥 심장을 조였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붙어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떼어내자마자 내가 한 것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일이었다. 그의 억세고 두꺼운 팔이 날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껴안았을 때 난 이 멍청한 근육덩어리가 내 피부에 묻히는 온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가 쓰는 남성용
스킨 향과 열게 말라붙은 땀에서 나는 살냄새가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난 이 멍청한 얼간이와 절대 떨어질 수없었다.
"바보."
"미안.'
짜증이 밀려와서 난 남자를 비난했다. 그리고 그만큼 으스러지도록 그를 껴안았다. 남자는 내 정수리에 대고 연신 사과를 중얼거렸지만, 그도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난 다시 잠들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
채소 수확, 운전, 돌풍에 날아가는 구조물, 도서관을 정리하는 사
서, 우체부. 이게 다 뭐냐고."
나와 남자는 며칠 동안이나 꿈 렌즈의 화면을 주시했다. 장작 가득찬 벽난로마냥 타닥거리는 소리가 이젠 너무나 귀에 익숙했다. 아무 것도 없는 백색 도화지 같은 배경으로부터 모션디텍터들은 잘도 움직임을 읽어냈다. 처음에는 꿈 렌즈의 액정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싶어 전원을 차단하고 모션디텍터를 들이밀기도 했다. 요망한 장치는 화면이 꺼져있음을 안다는 듯, 어떤 것도 감지하지 않았다.
"그냥 막다른 길인지도 몰라."
"막다른 길인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딱 그거에요."
"그럼 이제 그만 포기하는 건 어때?"
나와 남자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뭘 포기해요?'
'전부. 너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어."
지난 몇 주간 남자와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에게 소리라도 버럭 내질렀을 것이다. 저 뺀질뺀질한 기생 오라비 같은 얼굴 아래에 있는 친절함과 섬세함을 겪은 이상, 그러기는 힘들었다.
절대 그렇게는 못해요.
'그, 꿈 지킴이랬나? 걔네가 죽이는 것도 꿈에 관해서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어? 뇌과학이면 한창 뜨고 있는 분야인데 꿈말고 다른 쪽으로 가는 건 어때?'
아,이 멍청이.
"언제부터 내 진로를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네가 나 대신에 히드라에 목줄을 달았을 때부터."
간발의 차로 정신병 있냐는 소리가 입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처음꿨던 공유몽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머리 아홉 달린 도마뱀. 내가 길들여서 마당에 묶어놓았던,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충직한 하수인.
'심심하면 나가서 놀아요."
"나 진지해."
"나는 별로 진지하지 않은 것 같아 보여요?"
'넌 어딜 가든 성공할 거야. 왜 하고많은 연구분야 중 하필 꿈에 매달리는 건데? 쥐도 새도 모르게 다른 과학자들처럼 자살당할까봐 무서워서 나 고용한 거잖아. 그렇게 무섭고, 이제는 답까지 안보이는 문제를 뭐하러 계속 붙들고 있어?"
"입 다물어요."
'싫어. 너가 밖에도 안 나가고 사람 구실 못 하면서 사는 이유가...
내가 요구한 단 한가지를 남자는 들어주지 않았다. 덕분에 내 입에서는 고성이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면 닥쳐!"
그리고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내가 연구를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수백 개는 늘어놓을 것처럼 보이던 그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네가 뭘 안다고! 사람 구실을 못 한다고? 사람 구실을 하려면 오히려 계속해야 돼! 내가 안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난 약속한 게 있어요. 절대 어길 수 없는 약속. 그리고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제와서 내가 그만두면 여태까지 죽은 사람들의 희생이 전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려요."
"당신이 할 일은 날 계약기간 동안 살려두는 겁니다. 조건 기억하죠?"
말을 마치자마자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묘한 불안감이 내 등을 찔렀다
"내 연구에 간섭하지 말기로 했잖아요."
남자는 잠시 날 지켜보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계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널 살려둘 거야. 계약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니 조건도 따르지 않을 거고."
"무슨 소리 하는 거에요. 돈도 받았으면서.."
아. 이거였구나. 잊고 있던 게.
오늘이 며칠이더라?
남자가 몇 번이나 분리수거 날짜에 맞춰 쓰레기를 버리고 왔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와 나의 경호원 고용 계약은 못해도 이미 삼 주전에 끝났을 것이다. 그는 진작에 나를 떠났어야 했다.
내 얼굴에 떠오른 깨달음을 알아챘는지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곤 내 옆에 앉았다.
"왜? 왜.... 안 갔어요?"
서운하네. 너도 나만큼이나 이젠 계약 같은 것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힘출투성이인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조심스레 그의 넓은 어깨로 인도했다. 난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 그의 뼈대에 기댔다.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것 같은 온기가 머리칼을 부드럽게 가르는 그의 손가락을 타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가 다시 질문했을 때 난 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약속했다는 게 뭔지 혹시 말해줄 수 있어?'
교수님하고 약속을 했어요. 그 분 다음에는 제가 물려받기로."
'뭘 물려받기로 했는지는 안 물어봐요? 말할 준비 하고 있었는데.
설명 할 필요도 없지. 네가 밥도 안 챙기고 몰두하는 게 뭔지 떡 하니 보이는데.
남자는 꿈 렌즈를 가리켰다.
"일레나 슈라이버. 이거 만든 사람 이름. 맞지?"
"맞아요."
"너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독일에서 유학할 때 지도교수님이었어요
"월세집 주인이기도 했고, 주말마다 본인 집에 불러다 앉혀놓고 제대로 된 끼니도 먹게 해주셨어요.
"일주일에 20유로만 쓰면서 버텨야 할 때도 있었는데, 교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 밑에서 박사 학위 따려고 했으면 굶어죽었을 거에요.
"네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렇죠."
"그리고 죽었고?"
남자는 대답을 채근하는 대신 날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는 한동안 내 과거를 캐물었다. 젊고 바보같았던 대학시절, 독일에서 유학하던 나날,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학계의 거성들을 보며 불안감에 떨었던 일, 슈라이버 교수님이 미친 사람처럼 꿈 렌즈의 개발에 몰두하다가 말도 안되는 유언장만 남긴 채 세상을 등진 사건, 도망치듯이
한국으로 돌아와 다른 죽은 학자들이 남긴 것을 수집하기 시작한 계기까지.
그는 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작은 사항마저도 물고 늘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나라는 넓은 모래밭에서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파내기 위해 앞발을 놀리는 개처럼 열렬하기도 했고, 단서를 아주 조금씩만 던지는 추리소설을 읽다가 넌덜머리가 난 소년처럼 짓궂기도 했다. 그러다가 날 놀릴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면 그는 장난기와 걱정이 반반 차오른 시선으로 날 쿡쿡 찔러댔다.
"이렇게 차갑고, 단호하고, 순진하게 생긴 주제에 안쪽에 이렇게 말랑말랑한 구석도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손 치워요."
"싫어."
"아프단 말이에요.
"아픈 것도 좋아하면서."
"넌 연기를 너무 잘해서 탈이야. 겁에 질렸을 때는 스스로 무서운 존재가 되려고 하고, 지쳤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것처럼 굴어. 널 알기 전이었다면 아직도 네가 돈이나 명예를 노린다고 생각했을 거야.'
마치 지금은 날 안다는 것 같네. 웃기는 말이었다. 그와 내가 함께한 것이라고는 꿈을 공유하는 일 몇 번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더 웃기는 것은, 나도 남자를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게 으르고 커다랗고 단단하기만 한 주제에 친절한 남자가 사실 가벼운 목적보다는 굳은 사명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왜인지 나는 어
렴풋이, 그러나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이만큼 했으면 네 교수님한테 할 도리는 다 한 것 같아. 이제 너스스로를 챙겼으면 좋겠어.'
"내가 연구를 멈추면 당신이 이 집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져요.'
"또 못된 소리. 마음에도 없는 말 자꾸 할래?"
"네가 경매장에서 사지 않았으면 저 기계는 고물상에나 굴러들어갔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넌 그 교수한테 할만큼 했어. 그리고 꿈같이 꾸게 해주는 기계. 그것도 제대로 작동한다는 거 우리가 확인했잖아. 네가 학계에 빛을 지거나 한 건 없어.
'세상에 알리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나서서 논문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슈라이버 교수님은 멍청한 연구나 하다가 빛더미에 앉아서 자살한 괴짜 과학자고, 아바르하잠신 교수도 소설에나 나올 일에 몰두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바보로 남을 거에요. 영원히.'
설득이 먹혔는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바탕 분풀이 끝에 긴장이 풀려 축 늘어진 내 몸을 남자는 단단한 팔로 안아들어 거실로 데려갔다. 저물어 가는 햇살이 들어와 작을 노을이 들어찬 공간에서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꿈 속에서는 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랬었다. 나도 남자에게 같은 말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꿈 속의 너랑 현실의 너는 그리 다르지 않은 것않아.'
"나는 어때?"
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그래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제법 점잖은 것 같아요.
그의 남자다운 입술이 예쁘게 살짝 위로 말려올라갔다. 여러 세계를 넘나들며 내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자주 키스했던 그 입술이.
그래서 난 입을 맞추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난 그에게 달려들었다.
=+=
"Ein Geist ist ein wunderschönes Fraktal. Ich habe keine Angst vor dem Tod."
"무슨 말이야?"
"정신은 아름다운 프랙탈이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 교수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에요.
'정신이 뭐?"
"프랙탈이요."
"그게 뭐야?"
자기유사성을 갖는 패턴을 말해요.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
난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의 태블릿을 빼앗아서 프랙탈의 고전적이고도 완벽한 예시를 검색했다.
"여기, 이 그림 좀 봐요.
남자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듯 그림을 대강 훑어보다가 태블릿을 다시 내게 넘겼다.
"이게 뭐야?"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이라는 거에요. 프랙탈의 완벽한 예시죠. 정삼각형 안에 정삼각형이 무한히 반복되는 거 보여요? 계속 확대해도 끝없이 이 구조가 이어져요."
"이게 인간의 정신이라고?"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이겠죠. 아무튼 슈라이버 교수님께서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에요."
사람의 정신이 어떻게 세모일 수가 있지? 그리고 정신이 세모라서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세모. 삼각형도 아니고 세모인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세모 모양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세모가 아니라 프랙탈이에요. 여기 나온 건 프랙탈의 한 예시인거고."
'몰라. 너무 어려운 얘기야.
그는 없던 흥미마저 완전히 잃고 다시 소파에 누워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난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고, 그런 내 앞에는 여전히 미약한 소음을 내며 하얀 화면만 띄우고 있는 꿈 렌즈가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기계는 방을 바꾸면 혹시라도 다른 결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미신적인 믿음 때문에
거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 하얗기만 한 화면을 스캔 중인 모션디텍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기세로 수십 수백개의 움직임을 잡아내고 있었다.
"맹수를 조련하는 사육사, 가동 중인 크림 주입기, 남편과 아내. 이런 게 지금 여기에 있대요. 여기, 이 거실에. 미치겠네.'
난 태블릿에 뜨는 모션디텍터의 경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타닥거리는 멍청한 꿈 렌즈의 하얀 화면과 그 옆에놓인 물티슈 팩,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다 쓴 콘돔 박스뿐이었다.
"다 맞는 말 같은데, 크림 주입기라는 게 가동 중인 부분만 빼고. 슬슬 가동해볼까?
"으으, 저리 가요."
난 남자의 음흉한 손길을 거세게 쳐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야, 역시 맹수라서 그런지 손이 맵네."
"말 똑바로 해요. 맹수는 무슨."
포악하고, 앙칼지고, 사람 몸에 이빨 자국이나 남기고. 맹수 맞잖아."
"길에 지나가는 사람 잡고 물어보라구요. 나랑 당신 중에 누구를 맹수라고 하겠어요?"
"담비랑 여우도 우리나라에서는 맹수인 거 알지?"
곧 대화는 몸싸움으로 번졌다. 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저항했다. 포악하고 앙칼지다는 표현을 쓴 사람에게 고분고분 잡혀줄 마음이 없었다. 소파에서 내려와 나와 함께 러그 위에서 뒹굴기 시작한 남자는, 조금만 힘을 줘도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할 수 있으면서 내게 거듭 몸을 비틀 여지를 주었다. 먹잇감을 가지고 노
는 맹수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이래놓고 나한테 맹수라고 하다니.
'저리 가요!"
'싫어."
그는 내 옆구리를 커다란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간지럽게 했다. 내가 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해도 그는 집요했다. 우리의 갈 곳 잃은 다리가 테이블에 부딪혀 위에 있는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둥근 기둥처럼 생긴 모션디텍터가 쓰러져 데굴데굴 구른 끝에 거실벽에 닿았고, 꿈 렌즈를 제어하는 키패드도 테이블이 몇 번 쿵쿵거리며 들뜬 끝에 러그에 떨어졌다.
"아! 멈춰요! 진짜!"
'싫어. 항복한다고 말해."
"아니, 키패드 떨어졌다고!"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닐텐데."
"아! 비싼 거라고! 무선이란 말이야!"
그의 웃는 얼굴은 참 잘생겼지만, 지금 이 순간 난 손만 자유로웠다면 그의 볼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었다.
"그럼 항복한다고 말해.
"이 변태야!"
그의 손가락은 더욱 간질거리는 부위로 파고들었다. 난 물에 올라온 생선처럼 퍼덕이며 바닥에 떨어진 키패드를 쥐려는 동시에 그의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내 노력은 역효과를 일으켰다. 우리의 얽힌 몸이 싸움을 벌인 끝에 키패드가 남자의 날개뼈 밑으로 들어가버렸다.
"야! 이 미친놈아! 얼른 놔!"
"미친놈? 점점 나쁜 말만 하네."
남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구리를 잔뜩 간지럽힌 뒤에야 날 놀아주었다. 풀려나자마자 내가 한 일은 남자의 두꺼운 가슴근육을 있는 힘껏 밀어서 그 밑에 깔린 키패드를 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키패드는 망가지지 않고 무사했다.
저 두꺼운 흉통에 깔리고도 멀쩡하다니. 비싼 걸로 사길 잘했네.
"아, 진짜 이거 부서졌으면 어쩔 뻔했.
내 말은 다 나오지 못했다. 그의 시선도 그것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할 말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꿈 렌즈는 불타는 땔감처럼 타닥거리는 소음을 내지 않았다. 항상 하얗기만 하던 스크린에서 무언가가 재생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세계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전쟁과는 아주 달랐다. 보병들의 곁에는 커다란 사족보행 로봇이 자리잡고 기관포를 쏴대고 있었고, 멀리서 날아오는 포탄이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뒷힌 것처럼 폭발하기도 했다.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 아주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뭘 한 거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그였다. 평소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꿈 렌즈를 제어하는 키패드였다. 남자의 몸에 깔렸던 분명 키패드는 눌렸을 것이다. 그리고 눌린 게 설마.
난 키패드의 ''키를 누른 채로 손을 멈쳤다. 수 초에 걸쳐 화면이 점차 느려지더니 자연스럽다고 할만한 속도가 되었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꿈 렌즈는 제대로 기능하는 물건이었다. 꿈렌즈의 스크린에 하얀 화면만 잡혔던 것은 영상의 재생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였다. 빨간 빛과 파란 빛을 한 곳에 비추면 보라색 빛이 나오듯이 모든 색깔의 빛을 하나로 합치면 하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 건데?"
거듭 설명을 요구하는 남자에게 난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려보였다. 그리고 키패드를 계속 조작하며 원래 영상이 몇 배속이었는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결과를 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표기상 1초가 실제로 담고 있는 게 대략 141.3815시간 분량이니까... 20분 24초짜리 영상이 담고 있는 건 173,051시간. 19년 9개월 5일쯤 되는 분량이네요. 현실에서 20분 자면 꿈 속에서는 20년이 흘러요. 우리가 여태까지 봤던 게 대략 51만배속 영상이었던거죠. 정확히는 508,973배속이요. 미친.. 이래서 모션디텍터가
잡아낸 장면들이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거에요. 몇몇 달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일을 잡아내서 보여주는 거니까. 내가 여름에 입었던 티셔츠하고 올 겨울에 쓴 털모자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요."
우린 길게 이어진 침묵 속에서 방금 발견한 것의 의미를 곱씹었다.
진지한 생각은 꿈 렌즈의 화면에 내 얼굴이 잡혔을 때 끝났다. 꿈렌즈는 남자의 시점에서 보이는 것들을 담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내얼굴은 진짜 나와 아주 많이 달라보였다. 난 과학자가 아닌 군인이었고 한 쪽 눈썹에는 칼날 같은 것이 굵고 지나간 흉터가 나있었다.
남자의 손가락은 그 흉터를 애틋하게 어루만지곤 했다.
"공유몽도 아니고, 혼자 꾸는 꿈에서까지 내 생각을 했어요?"
"항상 하는 거라 습관이 됐나보네."
"하."
남자의 꿈은 그와 내가 하객 한 명 없는 반쯤 무너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끝났다. 세 시간 자는 동안 꾼 꿈을 녹화할 때 저장장치가 20분만에 꼭 차버렸으니, 저 세계에서 남자와 나의 삶은 이이후로 훨씬 더 길게 이어졌을 것이다.
"이 뒤에 어땠는지 혹시 기억나요?"
"음.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그와 내가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어떨까?
그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억측하기 전에 난 연구실로 남자를 끌고 가 다시 수면의자에 앉혔다. 그는 군말 없이 날 위해 다시 본인의 꿈을 추출하도록 해주었다.
세 시간 뒤, 우린 함께 연구실 바닥에 앉아 새로 얻은 영상을 재생했다. 이번에 그가 꾼 꿈은 영상 표기상 1초가 실제 분량 204시간에 해당했다. 그 다음 꿈은 1초가 67.4시간이었고, 그 다음은 132.25시간이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꿈과 현실에서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1초가 수십 혹은 수백 시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속도차였
다.
"아바르하잠신 박사가 맞았어요. 꿈은 시냅스가 불필요한 기억을 제거하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 제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더 복잡한 작업이에요. 몇 시간만에 수십 년어치의 기억이 죄다 뇌에 쌓인다고 생각해봐요. 세상에, 그걸 어느 뉴런이 견디겠어요. 우리가 꿈을 일부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건 뇌의 자기보존전략이었던
거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설명을 가만히 들었다.
"이제보니 꿈에서 지극히 논리적이고 당연했던 일들이 깨어나서보면 말이 안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수십 년분의 기억 중에서 아주 작은 조각들만 따로 빼다가 꿰어맞쳤는데 그게 제대로 된 그림처럼 보이겠어요?"
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희열을 느꼈다. 열은 웃음을 뛴 남자를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이 모든 진리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다가 나 또한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한 대 얻어맞았다.
그와 나의 공유몽. 그건 몇 시간의 짧은 낮잠이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우린 수백 년간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남자에게 뜬금없이 느끼기 시작했던 감정의 정체를 설명했다.
"이해돼요? 내가 방금 한 말들."
"응. 전부 다.
우리가 같이 꿈 꾼 거 기억해요?"
"어떻게 잊어, 그걸."
'그게 전부..
"그냥 이렇게 말하자.'
남자의 손이 내 허리에 감겼다.
"너랑 내가, 사실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사이라고.
다음 순간, 그는 잠들 때마다 하는 것처럼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내팔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허리에 감겼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겪은 게... 다... 다...
"의미가 있었냐고? 당연하지.'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다 잊어버렸잖아요. 수십 년 중에 고작 몇 순간만 기억했다구요."
"기억할 수 없어도 일어났던 일이야."
"그 반대에요. 기억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우릴 묶어주는 추억이 없다면 뭘 가지고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잘 봐. 네가 초콜릿을 싫어하다가 어떤 사건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어. 그 사건이 뭐였는지 잊어버려도 년 앞으로 쭉 초콜릿을 좋아하겠지. 그럼 네가 잊어버린 그 사건은 삶에 어떤 의미도 없는 걸까?"
"잃은 걸 보지 말고 얻은 걸 보라는 거네요.
"영혼이란 기억의 총합보다 큰 법이야. 네가 나한테 처음 키스하기로 결심한 순간이 언젠지는 잊어버렸지만, 앞으로 몇 번이라도 나한테 입을 맞출 거란 사실이 더 중요한 것처럼...
아, 바보 같은 인간. 굳이 그렇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난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감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안 그래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와중에 공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 말만 골라서하는 못된 입술을 내 입으로 막았다.
행복했다. 나는 친구도, 스승도, 모두 잃은 대가로 나와 영원을 함께해준 동반자를 얻었다.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우린 숨이 모자랄 지경이 되어서야 서로의 입술을 놔주었다. 한동안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의 눈만 바라보던 끝에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여기까지 했으니까 이제 그만 둘 수 있지?'
그만두다뇨?"
"이 연구 말이야. 충분히 알아냈잖아.
"충분히'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해요.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거든요."
'장난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 했으면 너도 할만큼 했어."
할만큼 했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할 거에요."
"그럼 지금 결정해. 같이 여행이라도 가자. 힘든 일 많이 겪었잖아.
나랑 같이 가자.'
"걱정돼요? 나 죽이러 오는 놈들 있을까봐?"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긴한숨을 내쉬었다
그럴까봐 당신이 여기 있는 거잖아요. 당신이 막아주면 돼요."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잠깐동안은 그 자신감 없는 푸념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가 꿈의 수호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그는 꿈의 수호자를 실제 존재하는 위협으로 여기지 않아야 했다. 우스꽝스러운 도시전설로나 생각해야 했다.
난 그의 품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다른 할 일이 떠오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구실을 나가려했지만, 그가 먼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제기랄. 참 많은 걸 알게 되네
"어쩐지, 너무 쉽다 했어요. 너무 평화롭더라니.'
"나도 자살하나요? 우리 교수님처럼?
"아니."
"그럼?"
"그럼 어떻게 날 막을 건데요?"
'네가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무서워진 나머지 스스로 기계를 부줬다고 보고할 거야.'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 돼.
남자의 얼굴은 명령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내게 빌고있었다.
'전부 그만둘 거지? 알만큼 알았잖아.
아. 왜 내가 행복할 거라 생각했을까
처음부터 전부 다 알고 있었어요?"
"아니."
"어디까지 알았는데요?"
"그냥 널 죽여야 한다는 거. 꿈에는 인류가 알아선 안되는 위험한 비밀이 있다는 거."
인류가 알아선 안되는 위험한 비밀이라니. 애들 보는 영화도 아니고. 꿈의 수호자들이 현장 암살자들에게 내리는 지령에는 퍽 낭만적인 구석마저 있었다.
"대체 뭐가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이라는 건데요? 우리가 함께 알아낸 것들 중에 뭐가 그렇게 위험하죠?"
"말해봐요. 그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는데요?'
"나도 몰라. 하지만.. 생각해봐. 꿈 속에서 우리가 또 꿈을 꾼다는 부분 말이야.'
면밀하게 꿈 렌즈 속 영상을 살펴본 결과, 영상 속 시점의 주인이 침대에 누우면 아무리 배속을 느리게 해도 다시 타닥거리는 하얀 화면이 나오는 구간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꿈 속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 그 안에서 또 꿈을 꾼다는 것.
"너희 교수가 그랬댔지. 정신은 아름다운 프랙탈이라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그게 어때서요?"
"너와 네 부류들이 발견하는 비밀이 우리 사회를 멸망으로 몰고 갈수도 있다고 했어. 어떤 방식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제 알것 같아."
한 발 늦었지만, 나도 이제 꿈의 수호자들이 뭘 두려워하는 것인지 감이 왔다.
"멈출 거지?"
난 약속한 게 있어요.'
'제발. 넌 그 사람들한테 이제 빛 진거 없어.
사람들에게 알려야 의미가 있어요.
내 손목을 쥔 남자의 손은 점점 더 세게 옥죄어왔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알린다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약속이니 뭐니, 다 네가 살아야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럼 날 죽이지 마요. 나한테 그만두라고 하지 말고, 당신이 그만둬요. 그럴 순 없어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답은 이미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많은 학자들을 죄다 죽여버린 놈들이 진행 중인 임무 따위 그만두고 떠나겠다는 사람을 곱게 놔주는 것도 이상하다.
"하, 멍청한 질문 같은 건 학부생들만 할 줄 알았는데.
유일한 위안이라면 실없는 탄식에 그가 피식 웃었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그냥 죽이지 그랬어요?"
"그때는 . 네가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않는지 확인해야 했어."
접촉하면? 누군지 알아내서 그 사람들도 다 죽여버리게요?
"예정된 기한이라도 있어요? 나 죽여야 하는 기한.
"다음 주말. 하지만 지금이라도 네가 멈추면..'
난 그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없었다.
'날 죽여도 끝이 아니라는 건 알죠?"
의미 없는 말이 사라지자 난 그대로 그 남자다운 보기 좋은 턱을 쥐어 내 입술로 이끌었다.
다음 주말까지. 우리에게 남은 기한이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키스가 끝났을 때 내 손에는 공유몽 중계기가 들려있었다
"먼저 영원히 함께 행복하자구요. 다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그리하여 내가 거실의 러그에 누웠을 때, 옆에 나란히 누운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끝으로 타닥거리는 소음이 돌아왔다. 화면은 다시 하얀색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