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불청객을 쫓아내는방법
이야기 좀 할래? 우리 고등학생 때처럼
나는 동창의 10년 만의 연락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목요일 밤 11시, 평일 이자카야 안은 한적했다. 수요일도 금요일도
아닌 애매한 목요일이라서 그런가. 맞은편 테이블 손님이 계산하고
떠나자, 가게에는 우리만 남았다.
아, 어색해..
나는 치미는 어색함을 티 내지 않으려고 씩 웃었다. 맞은편에선 지
우가 거의 홀로 자작하다시피 두 병의 사케를 비워내고 있었다. 대
화는 애초에 끝났다. 공유할만한 소재거리가 없었다. 직장도 사는
곳도, 살아온 시간도 공통점이 없었으니까.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
다는 유일한 공통점을 주제로 이어진 대화는 금세 한계의 벽에부
딪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적막
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하긴, 영업시간이 끝날 때도 됐고,
목요일이니까. 나도 평소에는 금요일에 쉬지 않는 이상 목요일에는
술 약속을 안 잡는 편이었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이 자리에 나오게 됐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그래? 왜 이렇게 못 마셔, 좀 어울려주지.
"아냐, 먹어 먹어."
나는 취향에 맞지 않는 사케를 조금 머금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안주라도 먹어야지
그때 턱을 괴고 있던 지우가 문득 말했다.
"미니멀 라이프라는게 좋은가?"
"응?"
'왜, 어떤 연예인은 재산도 기부하고 단칸방에서 옷 몇 벌만으로 산
다고 하잖아. 다들 잘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그러잖아. 그렇게 더 가지지 못해서 아등바등하면서 살
아왔는데... 소유를 포기한 삶은 어떤 걸까?"
단지 어색함을 메우기 위한 대화라고 하기엔 지우의 눈빛이 어두웠
다. 깊은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지우는 고등학생 때도 종종 저런
눈빛을 보였다. 때로는 하곳길에서, 때로는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
해 쓰레기를 줍다가. 그녀는 고민을 털어놓았고 나는 지금과 같은
어색함을 느끼면서 그 고민을 조용히 들어줬다. 몇 번 그런 대화가
더 이어졌지만 그뿐이었다. 우리는 더 친해지지도 어울려 지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우연히 내가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
했다. 아무한테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순간이 있으니까.
"무슨 고민 있어? 갑자기 연락한 것도 그렇고..
"뜬금없긴 했지, 오늘? 그냥,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면,
고민 좀 들어줄래?'
"그래 얼른 말해봐. 나 더 늦으면 내일 출근 힘들거든."
"그게, 갑자기 이렇게 사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좀 새롭게 살고 싶
어서. 요즘 당근 거래를 많이 하고 있거든. 돈 벌려고 하는 일이 아
니고 비워낸다는 의미로 하는 거라 대부분 무료 나눔으로 하고 있
어."
조금 전에 미니멀라이프 어쩌고 하더니 벌써 실천 중이었을 줄이
야.
지우는 10년 세월이 무색하게 고등학생 때하고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관리 잘했네, 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뜬금없는
성격까지 그대로였다. 고등학생 때도 갑자기 저렇게 말을 걸었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나한테 정말 정말 오래된 게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
서'
"필요한 사람한테 줘."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그럼 버리는 수밖에 없지."
그때쯤 나는 밀려오는 하루의 고단함과 약간의 술기운이 취해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10년 만에 만나자고 하더니 별 이야기
도 안 하고, 당근이니 나눔이니 속 편한 소리를 늘어놓는 지우에게
좀 짜증이 났다
"버려?"
지우는 '어떻게 그렇게 심한 소리를...'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렇게 오래돼서 처치 불가인걸, 무료 나눔
하기에도 망설여지는 거면 버리는 수밖에 더 있어?
지우는 조금 더 고민하고 마지막 술잔을 비우더니 상쾌한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역시 너는 잘 들어줄 줄 알았어. 옛날에도 그랬잖아.
계산은 지위가 했고, 각각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말,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 지우한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정리하고 싶다는 게 오래된 동창이었냐?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잊고 있었다.
몇 달 후, 집 앞에 웬 불청객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지우 친구?"
잘 자고 있는 토요일 새벽, 현관을 두드린 불청객은 키가 컸고 배우
처럼 잘생긴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현관 안을 살폈다. 집에 누가 술
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기겁하며 무례한 불청객을 막아섰다.
..누구세요?"
"지우 친구 맞죠. A고등학교 졸업한."
'그렇긴 한데 친구라고 할 정도로 친하진 않아요. 지우 찾아오신 거
면 당연히 없고요.
문득 수심에 잠긴 지우의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조용하고 얌전한 데다 얼굴까지 예뻐서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을 몰
고다녔던 지우가 성인이 되고 저런 몰상식한 남자와 사귀게 된 건
가.
'잠깐 들어가서 얘기해도 돼요?"
"아뇨. 당연히 안되죠. 누군 줄 알고 집에 들이겠어요.
그는 금방이라도 집에 들이닥칠 기세였다.
친구가 나 버리라고 했어요?"
"네에??"
너무 놀라서 새벽인 것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재빨리 목소리를 낮쳤다.
'저기요,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런 소리
한 적 없구요. 지우랑 만난 것도 거의 10년 만이고 개가 어디 사는
지 어느 회사 다니는지도 몰라요. 00역 근처에서 술 한번 마신 게
다라구요. 아니,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우리 집,
지우도 모르는데.'
말하다 보니 지우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한테 정말 정말 오래된 게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
겠어.
내가 어떻게 말했더라?
버려.
그래, 버리라고 했지
그 말을 들은 지우의 그 놀란 눈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무료 나눔하고 싶다던 게....
그쪽이 그 무료 나눔이세요?
남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갑자기 이 타이밍에 선글라스?
미, 미친놈인가? 그래서 지우가..
미처 내가 막아설 틈도 없이 현관문으로 발을 한짝 들인 남자가 재
차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하고 부탁했다.
어느새 날이 밝았고, 복도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닿은 남자의 뺨
이 치익- 그을리고, 아니 그슬리며 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