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딧 베스트- 유리 병에 행복을 담아 파는 여자
익명
02-23
292
유리 병에 행복을 담아 파는 여자
" 유리 병에 행복을 담아 팝니다!! 지금 전화주세요!!"
그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오래된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를 흘낏 봤을때 난 길고 고된 하루끝에 퇴근하던 길이었다. 웃기는 글이네 라고 생각하며 사진을 찍고 집에 도착하면 아내에게 보여주리라 생각했지만 저녁차리기, 설거지, 빨래, 딸 먹일 간식싸기, 딸 재우기, 거실에 널부러진 딸내미 장난감 치우기 같은 집안일에 치여 잊어버리고 말았다. 매일 밤 반복되는 같은 루틴이다.
다음 날, 아내와 등을 맞댄 채 잠에서 깨어났다. 직장 때문에 아내보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조용히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섰다.
직장에서는 최근 지출품의서를 업데이트한다. 대부분의 날들이 비슷하게 흘러갔다. 하루에 9시간씩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스프레드시트에 숫자를 입력하는 일로 돈을 받는 것이다. 오늘은 일이 빨리 끝나 빨리 퇴근하기로 했다. 금요일이라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많기도 했다.
집으로 걸어 가는 길에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있는 일이다. 어릴때는 항상 여행을 꿈꿨는데 차를 타고 대륙횡단을 하거나 홀로 유럽 배낭여행을 가고싶었다. 그러다 켈시를 만났다. 오해하진 마시라, 물론 여전히 켈시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우리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일은 없을 뿐이다. 누군가를 만나 사귀게 되면, 그 만남이 운명적이건 아니건간에 홀로 짰던 인생 계획은 보류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연애는 결혼으로 넘어갔고 그러다 아이를 가지게 되어 딸아이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그러다보면 돈을 더 많이 주는 직업을 구해야하고 더 오래 일해야 하며.. 뭐 그런거다.
자기연민에 빠지려는게 아니다. 그저 내 인생에 백프로 만족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일뿐. 나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매일 다니는 출퇴근길을 걷던 중에 어제 지나쳤던 포스터를 발견했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알 수 없지만,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아마 그냥 누군가의 장난 일 것이다. 전화를 받아선 " 사랑해요!" 라고 외치곤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매춘부일수도 있고.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전화벨이 한번 울리자마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 어.. 어 안녕하세요. 포스터 보고 전화드려요. 광고 내셨잖아요?"
" 아, 네네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 언제 가지러 오실래요?"
" 뭘 가지러 가요?"
" 병이요." 당연한 걸 묻느냐는듯 그녀가 말했다.
" 아 그렇죠.. 어.." 켈시에게 말하지 않고 빨리 퇴근했으니 당장 가지러 가면 켈시는 아무것도 모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정확히 뭘 파시는거예요?"
" 방금 말했잖아요. 행복이요. 병에 담아서요. 포스터에 써있는 것 처럼요. 행복은 유리병에서 더 오래가거든요. 지퍼백보다."
" 아 네. 어디 장소를 정해서 만날까요?"
" 그럼요. 그쪽이 이상한 사람일수도 있으니까 밖에서 만나죠."
그래서 우리는 1마일 정도 떨어진 스타벅스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결정했다.
진짜 병에 든 행복 같은걸 살 수 있을거라는 기대는 안했다. 99퍼센트 정도는 그 여자가 마약 딜러일거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병 속에는 아마 헤로인이 들어있을것이다. '행복'은 길에서 파는 어떤 마약 이름이겠지 난 그걸 사는거고.. 경찰이면 어쩌지? 체포되면 어떻게 해? 라고 생각했던게 기억난다. 하지만 내 안에서 계속 걸으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멈추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 저 도착했어요."
" 좋아요. 저도 곧 도착해요.'
" 무슨 차 타고 오세요?'
" 은색 도요타 캠리."
문자가 도착하자마자 캠리 한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차가 멈춰서서 그녀 외에 다른 사람은 없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납치 공포가 좀 가셨다. 차 문을 열고 내린 그녀와 시선이 마주쳐 살짝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척을 하자, 그녀는 심플하게 손을 흔들며 차 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웨이브진 금발머리를 한 20대 중반쯤의 젊은 여자로, 올블랙 의상에 대비되어 피부가 더욱 창백해 보였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착한 마녀 글린다가 나쁜 마녀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 외출하기 좋은 날이네요." 그녀가 인사삼아 말했다.
" 그러네요. 날씨 생각은 못했어요."
" 병 때문에 전화하신 분 맞죠?"
" 네 저 맞아요."
" 좋아요. 여기있어요."
그녀가 건넨것은 아주 작은 크기의 유리 메이슨 자였다. 5cm 이상은 안되어 보였는데 안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구가 아니라 그냥 빛이다. 꼭 병에 햇살을 담아놓은 것 같이 오후의 햇빛 속에서도 반짝여서 작은 태양, 혹은 크리스탈로 만든 장벽속에 존재하는 조그만 우주 같았다. 나는 얼굴에 드러난 경외감을 감추려고도 하지않고 병을 감상했다.
" 멋있죠?"
" 이게.. 이게 뭔가요?"
" 벌써 세번은 물어보신 것 같은데.. 대답은 똑같아요. 행복이예요. 병에 담긴 행복."
" 이걸로 뭘 하면 돼요?"
" 가지고 있어요. 문제 생기면 나한테 문자 하세요."
그녀가 차에 몸을 실으며 말했다.
" 잠깐만요!"
내가 외쳤다.
" 이거 파는거잖아요. 얼마예요?"
" 걱정마세요. 돈은 내게 될거예요"
미소와 함께 문을 닫은 그녀는 내가 길을 내주자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내가 들고 있는게 뭐지? 병을 내려다보니 넋이 나갈듯한 광채는 여전했다. 주머니에 넣어도
바지 밖으로 빛이 살짝 뿜어져 나왔다. 나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창했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드리워지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분명 기상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비 예보가 있었더라면 출근할때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테니까. 흠뻑 젖지 않으려고 조깅하듯 집으로 뛰어갔다.
아파트 건물에 도착해서야 마침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현관문 앞에서 키 링에 집 키가 없는 걸 발견했다. 키를 또 잃어버리다니 믿을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문을 두드렸다. " 자기야 나야. 키 잃어버린 것 같아." 크게 외치자 반대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기엔 기름진 머리에 헝클어진 염소수염을 한 건장한 남자가 서있었다.
" 집을 잘 못 찾았나 보네요."
그가 말했다.
" 어.." 나는 혼란에 빠졌다.
"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그는 낄낄 거리며 문을 닫았다.
33호.
내 집 호수이다. 틀릴리가 없다. 벌써 5년째 이 아파트 33호에 살고있다. 그런데 내 집이 아니었다. 잠깐 본 내부는 가구도, 벽지 색도 모두 달랐다.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멍한데다 약에 취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의 모든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폰을 꺼내 켈시에게 전화를 해 잠깐 헷갈린거라는 위로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폰에 그녀의 연락처가 없었다. 사실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마치 폰이 공장 초기화 된것처럼 메시지도 지난 통화 기록도 사진도 없었다. 아까 그 여자가 내가 안볼때 폰을 바꿔치기했나? 켈시의 전화번호를 누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외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회사 컴퓨터에 모든 연락처가 백업이 되어있으니 사무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직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잡아탔다. 사무실을 향해 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안 내내 젖은 신발을 내려다보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의아해했다.
직원들만 들어올 수 있도록 회사 건물에 키카드를 인식해야 하는데 항상 지갑 속에 넣어두는 키카드가 없었다. 방문객이나 카드를 분실한 직원들이 이용하곤 하는 인터폰을 호출했다.
" 안녕하세요 저 팀 이라고 하는데요. 카드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제 직원번호는.." 갑자기 머리속이
하얘져서 말을 멈췄다.
" 팀? 잘 안들려요. 직원번호 말씀해 주세요."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기억이 안나서요.. "
" 괜찮아요. 풀네임이랑 부서 말씀해 주세요."
" 어.. 재무요. 재무 팀 브룩스 입니다."
" 잠시만요."
30초쯤 후, 스피커 속 남자가 말했다.
" 우리 건물에 팀 브룩스라는 직원은 없는걸로 확인되네요. 약속 잡고 오셨어요?"
충격에 뒤로 물러서다가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바로 한두시간전에 이 건물에 있었는데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알츠하이머가 하루 만에 마지막 단계까지 가버린듯했다. 손을 내려다보며 몸뚱이에 잘 붙어있는지 확인했다. 날 둘러싼 세상이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군가의 머리속에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나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문자가 도착했다. 나한테 병을 준 그 여자의 번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문자를 볼때까지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별 일 없어요?
할말을 잃은채로 폰을 내려다봤다. 너무 태연한 그녀의 반응에 화가났다. 그녀라면 이게 무슨 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전에도 해봤을테니.
- 대체 나한테 뭔 짓을 한거예요?
- 최악은 아직 오지도 않았어요."
분노에 차 폰을 최대한 멀리 던져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보니 변함없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 뭔 짓거리냐고 이게!" 미친놈처럼 보일 걸 알면서도 병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반짝이는 유리병을 보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아내의 얼굴이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내의 이름이 K 아니면 C로 시작한다는 건 알았지만 머리속에 그녀를 떠올릴수가 없었다. 분명 나에게 아내가 있다. 있었다. 왜냐면 딸도 있으니까. 나에게 아내와 딸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그들의 얼굴이나 이름, 생일, 우리가 함께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아내와 딸을 봤으니까 그들이 존재한다는 건 확실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향취가 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첫 데이트는 어땠더라? 결혼식은 했었나? 첫 키스는 어떻고? 그리고 내 딸- 아니 아들이었나? 아니면 아예 애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아내, 아니면 내 여자친구는 진짜 존재한다. 그 생각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머리속에 그녀에 대한 그 어떤것도 떠올릴 수가 없다.
여전히 회사 건물앞에 서 있는데 왜 왔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일했었나? 어디선가 분명 일하긴 했을거다. 이제 비에 섞여 차가운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비바림이 얼굴을 후려쳐 코와 볼이 얼얼했다. 집에 가서 그녀와 함께있고싶다. 따뜻함을 느끼고싶다. 생계를 유지해주던 그 거지같은 직업을 다시 가지고 싶다. 그 모든걸 원했다. 나는 홀딱 젖었고, 비참했고, 내 부모도 어린시절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한테 친구가 있었나? 대체 왜 이 비를 다 맞고 있는거지?
손을 내려다보니 여전히 병을 움켜쥐고 있다. 내 생애를 통틀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단 한가지는 그 여자가 이 병을 주었다는 것 뿐이다. 이게 행복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행복은 커녕 고통과 괴로움만 가져왔다. 그 어느때보다 비참한 심정이었다.
폰이 울렸다.
- 병을 깨버려요 팀
지는 해와 빗속에서, 그 병은 내가 본 그 어떤 가로등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병을 깨버린건 그녀의 지시를 따라서가 아니라 너무 화가 났기 때문이다. 해방감이 필요했다. 나는 머리 위로 팔을 치켜 올렸다가 단 한번의 빠른 동작으로 발 밑 콘크리트에 병을 집어던져 산산조각을 냈다.
비를 동반한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폭탄이 터진뒤의 충격파처럼 퍼져 나갔고, 나는 그 가운데 있었다. 유리병 안의 따뜻하고 노란 빛이 땅 위로 빠르게 번지더니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우주가 창조되는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았다. 신이 손가락을 튕기며 "빛이 있으라" 라고 명한 바로 그때 말이다.
나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거리나 내리는 비, 어두운 것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전진하는 별 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 같았다. 한겨울 추운 밤에 모닥불 앞에 앉아 몸 구석구석을 채우는 온기를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눈을 깜박이자
즉시 내 밑의 시트가 느껴졌고 내 등에 닿을듯말듯한 아내의 등이 느껴졌다. 창 밖을 내다보자 창문너머로 들어온 아침햇살이 내 얼굴을 비췄다.
침대에서 일어나 폰을 잡았다. 금요일 아침이었고,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 병 또 필요하면 말해요 :)
직장에 병가를 내고 딸의 방으로 들어가 키스로 그녀를 깨운 후 오늘은 유치원에 갈 필요 없다고 말해줬다. 오늘 우리는 가족의 날을 즐길것이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두 팔을 쭉 펴 기지개를 켠 후 하품과 함께 몸을 웅크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침대로 돌아가 아내를 꼭 끌어안았다. 마침내 딸이 방에 들어와 침대 위에서 점프하며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러 우리를 깨울때까지 몇 시간이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제라면 짜증스러웠을지 모른다. 어제라면 많은 일들이 짜증스럽거나 지루하거나 따분했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 나는 딸을 켈시와 나 사이로 끌어당겨 안는다.
오늘은 좋은 날이 될 것이다. 오늘,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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