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의 옷을 벗기는 자에게, 친히 왕좌를 하사하겠노라
"오늘부로 왕비는 만인의 노예가 될 것이다."
마력이 담긴 정적의 목소리가 중앙 신민들에게 잔잔히 울려 퍼졌다.
머릿속을 파문하는 불길한 음성.
누군가는 땅을 기듯이 웅크린 채 두려움에 몸서리쳤고,
누군가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그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왕... 마왕이다..."
"아... 용사님... 용사님은 어디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을 유린하는, 나락의 중심으로 재림한 만악(萬惡)이 한때는 세상을 구원한 인류의 여명이자 용사였다는 것을.
'노예? 나를 노예로 만들어? 감히...'
왕비의 고혹적이던 눈이 매섭게 찢어지고, 촉촉한 입술이 잘근 깨물렸다.
비록 딸이 나를 욕하고, 남편이 나를 의심했어도 감내하고 견뎠다.
결국엔 나의 핏줄이고, 나의 반려이고 왕이니까.
그런데... 핏줄도 반려도 왕도 아닌 비루한 평민 출신의 칼잡이가 감히 나를 내려다보며 모멸해?!
"무엄하다!! 나는 오가헤아 왕국의 국모이자 왕비 리즈이파. 사특함에 현혹되어 타락한 만고역적 알티엔을 현 시간부로 마왕으로 간주하며, 이로써 마왕 알티엔의 용사 자격을 박탈한다."
변수에 응수하는 정수.
마력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왕비의 음성은 멀리, 그리고 또렷하게 번져나갔다.
"뭐...? 저게... 마왕이... 용사님이라고?"
"말도 안 돼... 용사님이 왜..."
"용사가 없으면 누가 마왕을..."
인류를 수호하던 용사는 이제 없다.
부정한 현실을 마주한 이들 대부분이 죽음의 그림자를 포용하는 기색.
하지만 심연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별을 움켜쥐려는 작은 가능성이 꿈틀거렸다.
"오가헤아 기사단장 루조 킹팽스!! 고결한 빛으로 만악(萬惡)을 처단하겠다!!"
"성검...!! 성검이다!!"
창공을 집어삼킨 흉악한 죽음 사이로, 여린 황금빛이 싹을 틔웠다.
'단 한 번. 일격으로 끝내야 한다.'
기수식을 취한 루조가 마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성검의 기염이 서서히 더욱 짙어졌다.
본디 성검이란 그 자격을 마땅히 갖춘 자에게만 허락된 태초의 빛.
"오오...!! 루조가 빛을 거머쥐었구나!! 새로운 여명이 탄생하는 순간이로다..."
찬란한 섬광이 국왕의 눈동자를 가득 메웠다.
"이것으로 끝이군요."
왕비가 곧 사라질 어둠을 쳐다보며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입가에 은은한 조소가 번졌다.
"아아아악!!! 안 돼!!! 나의 용사...!!! 마왕님!!! 어서 도망쳐요!!!"
공주가 어둠을 물리칠 빛을 부정하듯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마왕은 침묵으로 천공을 부유할 뿐. 그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우우웅-
마력과 동화된 성검이 진동하며 눈부시게 발광한다.
루조는 손아귀가 터지도록 성검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알티엔!! 고결한 빛으로 너를 처단하겠.... 커헉!!"
마왕을 향해 성검을 휘두르려던 루조가 별안간 검붉은 피를 울컥 토했다.
자세와 집중이 무너진 탓에 발광하던 성검은 그 빛을 점차 잃어갔다.
"컥... 어... 어째서..."
한계까지 마력을 전부 쥐어짰다.
그에 성검은 확실히 응답했고, 찰나의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런데 왜..."
빛을 완전히 상실한 성검.
희망의 별이 수놓였던 사람들의 눈은 다시금 절망으로 깊이 물들어갔다.
"루조!! 일어나라!! 다시 검을 쥐란 말이다!!"
국왕의 간절한 외침에도 루조의 손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빛을 잃은 채 차디찬 철덩어리가 된 성검처럼.
빛을 틔우지 못한 여명의 눈동자엔 좌절과 공허만이 영유하였다.
"본디 성검이란 그 자격을 마땅히 갖춘 자에게만 허락된 태초의 빛."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마왕이 건조하게 말했다.
기사단이 펄친 삼중 방어막을 사이에 두고 마왕과 루조의 시선이 교차했다.
"성검 도딜(Dodil)은 먼 고대에 전쟁의 여신이라 불렸던 스팬리온(SfanLyon)이 별의 조각으로 빚어낸 성광(星光).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신의 산물로 숭배받으며, 오직 고결한 자만이 선택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그 말은 내가 고결하지 못해 선택받지 못했다는 건가."
"아니. 루조, 넌 고결하다. 그 누구보다 용사에 적합한 재목이지."
"그렇다면 왜..."
"단지."
마왕의 손이 방어막과 맞닿는다.
콰창-!!
수십의 정예 기사단이 펼친 고위 방어막이 살얼음 깨지듯 산산이 부서진다.
과거 대마법사의 필살조차 막아냈던 방어막이 겨우 손 한번 댄 것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침음에 빠져들었다.
경탄의 구심에 서 있던 마왕이 보란 듯이 빛바랜 성검을 주워들었다.
"단지, 부족한 힘에 성검이 만족하지 못한 것뿐. 너의 의기는 용사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곧이어 흉흉한 마력을 흘려내보자 성검이 검붉게 화하며 형태를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딜은 소유자의 고결함과 가치관은 분별하지 않는다. 오로지, 파괴와 살육을 추구하며 지배적인 힘을 갈구할 뿐. 그렇기에 세상을 구하는 성검이 될 수도, 파멸을 주도하는 마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
루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검이 매끄러운 반원을 그린다.
툭-
루조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 여전히 눈과 입을 뜨고 벌린 채로.
"이 개자식이!!!"
단장 루조의 죽음을 목견한 부기사단장 돈콤이 방패와 장검을 꼬나쥐고는 마왕을 향해 매섭게 돌진해왔다.
일순간 허공으로 도약한 돈콤이 붉은 오러가 휘감긴 장검을 사선으로 크게 휘두른다.
마왕의 몸뚱어리를 반으로 썰어버릴 심산이었다.
서걱-
분노를 머금은 붉은 오러가 희미하게 일렁인다.
"커헉... 알티엔... 지옥에서 기다리..."
털썩-
닿지 못한 검의 불길은 결국 재가 되어 꺼지고.
강인했던 왕국의 방패. 돈콤은 썩은 나무처럼 맥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물러서지 마라!! 위대한 오가헤아 기사단의 명예를 지켜라!!"
그러나 누구 하나 도망치지 않고 투지를 불태우며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검을 놓지 않았다.
오늘을 희생해 내일을 지키는 것이 기사의 본분이자 명예이기에.
"의미 없는 희생이다."
그렇게 말하며, 마왕은 피와 살점으로 진창이 된 바닥을 걸었다.
가로막는 저치들을 베고 또 베면서.
피의 마검은 살육의 발자국을 찍어내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으아아!!!"
왕의 집무실. 국왕 일가를 지키던 기사단원들이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검을 팽개치고는 곧장 도망쳤다.
"알티엔... 이렇게까지 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도대체 무엇이 너를 이렇게까지 타락시켰느냐 말이다."
"하아... 알티엔... 저를 위해 와주셨군요..."
국왕이 식은땀을 흘리며 묻자, 공주가 볼을 발그레 붉히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라펠. 닥쳐라."
참다 못한 왕이 신경질적으로 공주를 쏘아봤다.
하지만 공주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숨을 헐떡거리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곤 마왕만을 바라봤다.
"자... 어서 저한테 오세요. 어머니... 왕비보다 더 뜨겁고 격렬하게 당신을 품어드릴게요."
따악-
마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멀쩡했던 바닥이 검게 일그러지며 검붉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왕... 왕비님?"
"저, 저건..."
"마... 마왕이다!!"
직전까지 왕궁 집무실이었던 공간이 한순간에 왕국 중앙 대광장으로 바뀌었다.
왕궁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
피칠갑을 한 마왕을 본 사람들은 혼비백산 기겁했다.
"자리를 이탈하는 자는 즉시 참살하겠다."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첨예한 음성에 모두가 작은 침음조차 삼키며 제 자리에 얼어붙는다.
"알티엔... 저들은 무고한 백성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만..."
"나는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한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왕비의 고운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모순이군요. 조금 전에 당신이 몰살한 기사단도 무고한 백성들인데 말이죠."
"그래. 모순이군."
마왕이 피식 웃으며 마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내 바닥에서 원형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시커먼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크르르...]
늑대의 형상을 한 거대한 마수 세 마리가 누런 침을 질질 흘리며 공주를 애워싼다.
"아아... 알티엔...? 장난이 과한 것 같아요..."
"라, 라펠...!"
목숨의 위협을 느낀 공주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에 왕비와 국왕이 뒤늦게 손을 뻗어보지만, 마수의 독살스러운 기세에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흐윽... 아버지... 어머니..."
"라펠...!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 나를... 이 어미를 믿고 가만히 있으렴. 알겠지?"
"모성애가 참으로 갸륵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군."
마왕이 조소하며 비아냥거리자, 왕비가 눈에 살기를 품은 채 노려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것이라. 일단 옷을 벗고 전라로 대중들 앞에서 춤이라도 춰보는 게 어때?"
"...뭐? 감히 나에게..."
"왜, 못 하겠나?"
[크르으릉...]
마수 한 마리가 벌벌 떨고 있는 공주의 코앞에 악취가 진동하는 입김을 내뿜었다.
"흐으윽... 어, 어머니... 무서워요..."
"라펠...!"
이내 마왕이 손짓하자 위협하던 마수가 침을 뚝뚝 흘리며 천천히 물러섰다.
"딸의 목숨보다 왕비로서의 품위가 더 중요한가?"
"차라리... 차라리 나를 죽여라."
왕비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심장을 꺼내 가라는 듯 육중한 가슴을 꽈악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호소했다.
하지만 마왕은 감정이 증발한 것처럼 건조하게 대답했다.
"벌써 안식을 줄 수는 없지."
따악-
마왕이 검지를 까딱 움직였다.
이번엔 새까만 마력 덩굴이 쑤욱 튀어나와 왕비의 손목과 발목을 휘감았다.
"꺄악! 이, 이게 뭐야...! 당장 풀어!!"
손과 발이 단단히 구속된 채로 주저앉은 왕비.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간 드레스 아래로 왕비의 희고 가녀린 다리가 일부 노출되어 보였다.
"오늘부로 오가헤아 왕국의 주인은 없다. 하여 이 자리에서 왕비의 옷을 벗기는 자에게, 친히 왕좌를 하사겠노라."
왕비의 옷을 벗기면 왕관을 준다니...
내내 공포에 잠식되어 있던 사람들의 눈이 저마다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정, 외면, 불신, 고민, 욕심, 욕정 등...
각양각색의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나는 왕비다... 너희의... 왕국의 어머니란 말이다..."
날개를 잃고 추락한 새는 반드시 죽는다.
그 죽음의 형태는 어쩌면 추락사일 수도, 배고픔에 지쳐 아사할 수도, 또는 포식자에게 뜯어먹히는 약육강식이 될 지도 모른다.
오늘 날개가 꺾인 왕비는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였고. 난생 처음 피식자로서의 두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왜...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냐..."
언제나 나를 칭송하고 따르던 인간들이 이제는 탐욕에 사로잡힌 눈으로 나를 갈망하는 것이 느껴졌다.
"옷만 벗기면 왕이 된다잖아."
"속살을 만지는 건 안 되겠지?"
"어차피 왕이 되면 왕비도 내 소유가 되는 거 아니야?"
탐욕은 빠르게 전염되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치만 보며 입술만 달싹일 뿐. 선뜻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그때, 인파 속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왕비의 옷을 벗기겠습니다."
혼잡한 인파를 헤집으며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라브노 공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