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딧 베스트 - 스페이스걸 1.
익명
1시간전
37
우리는 그 애를 스페이스걸 이라고 불렀다.
그 애의 진짜 이름은 메간 다니엘스 이지만 그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2학년때부터 그 애는 이미 스페이스걸이었다. 그 애는 길고 붉은 머리,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 그리고 콜라병 바닥처럼 두꺼운 안경 때문에 어디서든 눈에 확 띄는 아이였다. 그 애는 언제나 조용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릴 때도 우리와 같이 놀지 않았고,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과 떨어진 저 구석에 혼자 앉아 보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쳐 무언가를 끄적이곤 했다. 가끔은 시를 쓰기도 하고, 가끔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떤식으로든 그 애는 항상 자기만의 작은 세상에 갇혀있었다. 돌이켜보니 왜 우리가 그 애를 목표로 삼았는지 알 것 같긴하다. 다른애들과 다른데다 늘 혼자였기 때문이다. 그게 괴롭힘을 정당화 할 순 없지만 애들이란 잔인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사샤 브라운이 걔 엄마가 약쟁이라서 스페이스걸도 저능아가 된 거라고 말했던게 기억난다. 아마 지어낸 말일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걸 믿었다. 사샤는 항상 스페이스걸에게 제일 못되게 굴었고,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5학년때 사샤가 그 애의 노트를 뺏으면서 모든게 시작되었다.
그 날은 비가 와서 교실에서 쉬는 시간을 보냈다. 스페이스걸은 구석 자기 책상에 앉아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사샤와 나는 근처 우리 책상에 앉아 그 애를 지켜보았다.
"저런 저능아를 우리랑 같은 교실에 있게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사샤가 속삭였다. "쟤 좀 봐.. 애초에 저런 애를 학교에서 왜 받아주는거야? 어차피 뭘 배우지도 못할텐데."
"약쟁이 엄마랑 집에 놔두는거보다야 낫지." 타냐 에브렛이 말했다. 타냐와 내가 친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자리가 사샤와 내 근처라 어울리곤 했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쟤네 집 앞에 맨날 다른 차가 서 있대. 우리 아빠가 봤는데 걔 엄마가 맨날 남자들을 집에 들이고 돈을 받는대. 그 사람들이랑 S-E-X 하려고.." 그 시절 우리중에 그 무서운 단어를 진짜 내뱉을 수 있는 애는 없었다. 섹스는 여전히 끔찍하고 알 수 없는 무언가일 뿐이라서,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배우며 자랐다.
스페이스걸이 동작을 멈추더니 노트에서 시선을 획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사샤는 그 애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뭐? 뭐 꼬운거 있어 스페이스걸?" 그녀가 물었다. 선생님이 우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어서 사샤는 하고싶은 말은 뭐든 할수있는 전권이라도 받은 양 굴었다. 스페이스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길을 돌려 노트를 내려다볼 뿐이었지만 사샤는 그 애가 도전장을 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책상 쪽을 힐끗 보며 그녀가 바쁜지 확인한 뒤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페이스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노트에 대체 뭘 끄적이고 있는 건데, 저능아야?"
스페이스걸이 막기도 전에 사샤가 손을 뻗어 노트를 낚아챘다.
"이게 대체 뭔데? 유니콘? 너 뭐 5살이냐?"
사샤가 내게 노트를 넘기길래 본능적으로 받아들었다. 밝은 컬러로 색칠한 유니콘이 그려져 있었다. 사실 꽤 잘 그린 그림이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노트는 다시 타냐에게 넘어갔고 스페이스걸은 그런 우리를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와우. 그림도 못그리네. 이거 봐." 타냐가 노트에서 한 페이지를 뜯어내자 스페이스걸은 마치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타냐는 뜯어낸 페이지를 꼬깃꼬깃 구긴 후 노트를 스페이스걸의 책상 옆 바닥에 집어던졌다.
"다음에는 쓰레기 말고 딴 걸 그려봐." 타냐가 말하자 사샤는 이 모든게 괴롭힘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이기라도 한 양 키득거렸다.
타냐와 사샤가 그 애에게서 등을 돌리자, 스페이스걸은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진 자기 노트를 천천히 주워 들었다. 나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애가 몸을 움직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너무나 풀이 죽어 있어서, 마치 자기 안으로 점점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날 올려다 보다가 금새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애가 안쓰러웠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애를 내버려두고 다른 애들에게 가버렸을뿐.
그 일 이후로 스페이스걸은 사샤와 타냐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애들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녀를 괴롭혔고, 나는 부끄럽지만 거의 항상 그애들과 함께 있었다.
운동장에서 쉬는 시간을 보낼때마다 스페이스걸은 항상 같은 나무 아래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고, 우린 매번 나무에 기대어 스페이스걸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 보았다.
"와우,엄청 잘 그렸네 스페이스걸." 사샤의 첫 마디는 대부분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부러 트럭에 치인것처럼 그린거야 아니면 이게 니 스타일이야?"
칭찬처럼 들린 적은 있어도, 진짜 칭찬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샤는 늘 그 애를 비꼴 거리를 찾아냈다.
"나 그려줄 수 있어?" 언젠가 사샤가 물었다. "누가 그러던데 저능아는 예술 천재라던데.이번에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잖아?"
스페이스걸은 사샤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모욕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라고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그애들을 말리지 않았고, 스페이스걸을 놀릴때면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그런것밖에 없었고, 우리만 그런것도 아니었다. 많게든 적게든 모두가 그 애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마 너무 무서워서였겠지.
7학년때의 12월 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자세한 내막은 나도 모르고, 그 일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곪아 터질 지경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제임스 하디가 스페이스걸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제임스와 같은 반이 된적은 몇번밖에 없고, 그 해에는 우리 반이 아니었다. 그 애는 쥐를 닮은 얼굴에 키도 작았지만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터프한 깡패라도 되는 줄 아는 애였다. 그애의 아빠가 스페이스 걸의 집에 드나드는걸 봤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자연히 그 둘이 섹스를 했다는 추측도 이어졌다. 그것때문에 제임스네 부모가 이혼했다고 말하는 애도 있었다. 어쨌건 그 소문은 제임스와 스페이스걸이 사귄다는 이야기로 바뀌었고 아마 그게 제임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쉬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남자애들 몇이 제임스한테 작은 장난을 치기로 마음 먹었다. 브라이언 조단과 걔 동생인 마이크가 시작한 장난이었다. 곧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겨우살이 장식을 갖고 있었던 그 애들이 우리 교실로 가는 복도에 겨우살이를 걸어놓은 것이다. 쉬는 시간에 스페이스걸을 잡아온 마이크가 겨우살이가 있는 문 뒤에 그애를 붙들어 놓았다. 제임스가 들어오자 마이크는 그 애를 제임스 쪽으로 확 밀친 후 바로 사진을 찍었다. 그때 난 제임스 바로 뒤에 있어서, 스페이스걸이 두려움에 질린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어디선가 날아와 제임스에게 세게 부딪히는걸 모두 볼 수 있었다. 그 둘이 엉킨 채 바닥에 넘어지자 남자애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좀 봐! 스페이스걸이 너한테 키스하고 싶대!" 남자애 하나가 말했다. 스페이스걸은 엉금 엉금 기어 제임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노트를 주으려고 했지만 누군가가 발로 차 저 멀리로 날려버렸다. 제임스를 뒤돌아 보는 그 애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던게 기억난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에 끔찍할 정도로 겁에 질려있었다. 누가봐도 이런 일에 말리고 싶어하지 않는게 자명했지만 그녀는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제임스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쟤가 너한테 키스하고 싶대잖아!" 브라이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빨리 키스해줘!"
누군가가 스페이스걸을 제임스쪽으로 밀쳤고 그는 이 모든게 그녀의 잘못인 양 스페이스걸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제임스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스페이스걸을 붙잡아 때리는걸 지켜보았다. 주먹은 정확히 그 애의 턱을 가격했다. 스페이스걸을 바닥으로 밀친 제임스는 브라이언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때 선생님이 끼어들어 둘을 떼어놓았다. 제임스, 스페이스걸, 그리고 조단 형제 모두 크리스마스 연휴 바로 직전에 정학을 당하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다.
1월이 될때까지 스페이스걸을 보지 못했다. 제임스와 형제들은 그 후로 다시는 보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마을 외곽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있었다. 동물을 피하려고 방향을 꺽다가 도랑에 처박혔다고 했다. 마이크, 브라이언, 그 둘의 부모까지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12월 27일, 제임스가 자기 집 진입로에 쌓인 눈을 치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부모님이 말하길 사슴 같은 동물에게 공격 당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사슴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특히 우리 동네에서는 말이다.
새해 전 날 사샤의 집에 갔다. 둘 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프트 카드를 받아서 몰에서 쇼핑을 하기로 한 터였다. 사샤의 부모님은 다 출근을 한 뒤라 집에 안계셨고 집에는 우리뿐이었다.
"야 기다렸잖아." 문을 노크하자 사샤가 말했다.
"미안해."
"괜찮아. 금방 준비할테니까 위층으로 올라가자 보여줄거 있어."
나는 그게 뭔지 묻지 않았다. 그저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또 받았겠거니 하며 함께 계단을 올랐다.
"너도 엄청 좋아할걸." 사샤가 말했다. "완전 재밌을거야...."
그녀를 따라 침실로 가 문을 열자, 책상 위에 놓인 익숙한 노트 한권이 보였다.
"어디서 났어?" 책상으로 다가가며 내가 물었다.
"브라이언이랑 걔 동생이 그 난리 친 날 스페이스걸이 떨어트렸어. 내가 뭐… 슬쩍 집어왔을 수도 있고. 알잖아.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그녀가 입가에 조소를 띠며 노트를 펼쳤다.
"이거봐... 맨날 똑같은 유니콘만 죽어라 그리네. 이건 다 그리지도 않았어!"
사샤가 '유니콘 왕자'라는 제목이 붙은 작은 그림에서 멈췄다. 그림에는 빈 들판이 그려져 있었고, 제목 속 왕자가 있어야 할 자리만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페이지를 술술 넘기던 사샤가 최근에 그린 그림들이 있는 쪽에 이르렀다.
"걔 학교에서 잠깐 쫓겨났잖아. 걔네 엄마 너무 가난해서 크리스마스 선물도 못 사줬을텐데 나라도 선물을 줘야지! 어떻게 생각해?"
사샤의 그림실력은 스페이스걸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그녀가 그린 단순한 그림 몇개는 내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사샤의 첫번째 그림에서 스페이스걸은 밧줄로 목을 매달고 있었다. 눈은 감겨있었고 혀는 쭉 삐져나온 채였다.
두번째 그림에서 스페이스걸은 입에 총을 물고있었다.
세번째 그림에선 빌딩 모서리에 서있었다.
사샤가 조악하게 그려낸 자살 장면들을 넘겨보는 동안 그녀는 키득 거리며 웃었다. 그림은 몇장이나 이어졌다.
"어떻게 생각해?" 사샤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걔 완전 멘탈 나갈걸!"
나는 노트를 덮고 사샤를 바라보았다.
"너-너 제정신이야?" 내가 묻자 사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뭔소리야?'
"이런거나 그리려고 걔 노트를 훔친거야? 사샤, 이건 좀 심하잖아"
"스페이스걸이잖아. 그딴 애한테 누가 신경을 쓴다고 그래, 제인?"
"너 지금... 얘 자살하는거 계속 그린거야." 나는 책상위에 올려진 노트를 집어들었다. "뭐가 잘못된지 진짜 모르겠어?"
사샤는 미친 사람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좋아. 좀 웃겨보려고 그랬다 고소하던가." 사샤가 말했다. "이리 줘..." 그녀가 노트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내가 뒤로 감췄다.
"싫어. 또 뭐 그릴거잖아."
사샤의 눈 속에 분노가 차올랐다.
"제인, 노트 내놔."
"싫어!"
노트를 펼쳐 스페이스걸이 자살하는 그림들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사샤가 달려들어 나를 막고 노트를 가로채려 했지만 내가 밀쳐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세게 밀어서 사샤가 바닥에 거칠게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사샤가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뜬채 나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 애에게 이런식으로 손을 댄적이 없었을것이다. 그때 그 애의 눈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분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쁜 무언가였다. 사샤로 하여금 그 끔찍한 그림을 그리게 부추긴 바로 그 것이 보였다. 나는 뒤돌아 달렸다.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와 현관문을 열고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는 내내 스페이스걸의 노트를 가슴에 품고 있었고, 집에 도착할때까지 품에서 놓지 않았다.
남은 크리스마스 연휴는 사샤네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께 전화라도 하지 않을까 벌벌 떨며 보냈다. 내가 사샤를 밀었다는 사실이 그때는 너무 큰 일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과연 사샤가 부모님께 그 일을 말했을지 의심스러웠다. 분명 그녀의 부모님이 내가 왜 사샤를 밀쳤는지 물어볼것이고, 또 내가 부모님께 노트 이야기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선 사샤도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걸 알았을 것이다. 사샤는 잔인한 애였지만, 그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내 말이 옳음을 깨닫고 개학하면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솔직히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스페이스걸의 그림들을 훑어보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심하게 비웃었던 건 바위 위에 앉아 머리를 빗고있는 인어를 그린 그림이었다. 인어의 눈은 평온한 행복감 속에 감겨 있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멍청해 보이냐고 떠들었던게 기억나지만, 사실은 그 그림이 좋았다. 유니콘, 요정, 성을 그린 페이지들을 넘기다가 유니콘 왕자를 그린 그림에서 멈췄다. 사샤의 집에서 그 그림은 분명 공백으로 남아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보니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유니콘 왕자가 뿔을 뽐내며 위풍당당하게 들판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른 그림과 헷갈린것일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사샤의 그림이 있던 페이지로 돌아왔다. 하나 하나씩 노트에서 찢어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종이 낭비긴 했지만 이대로 스페이스걸에게 돌려줄 순 없었다.
개학 첫 날 나는 일찍 눈을 떴다. 노트가 가방안에 얌전히 있음을 확인하고 최대한 일찍 집을 나섰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에 쌓인 눈은 새 것처럼 깨끗했지만 우리 집 앞마당에 집 쪽으로 난 발자국이 보였다. 깊은 U 모양인걸로 봐서 동물 발굽 같았다. 사슴 발자국 같기도 했다. 나는 오래 곱씹지 않고 갓 정비된 보도를 따라 학교로 향했다.
스페이스걸이 학교로 돌아올까 반신반의했는데 그 애는 이미 와있었다. 교실엔 그 애 밖에 없었다. 자기 자리에 앉아 새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 애 쪽으로 다가가자 그 애가 동작을 멈추고 내 쪽을 곁눈질했다. 내가 더 가까이 가도 그 애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긴장으로 굳은 어깨가 보였다.
"안녕." 내가 말했다. "어.. 연휴 잘 보냈어?'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엔 미안했어. 그 일에 대해선 미리 알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비열한 짓이었다고 생각해."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나는 가방을 뒤져 노트를 꺼내 그 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입을 다문채로 노트를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샤가 가져갔더라고. 저번에 사샤네 집에 놀러갔더니 이걸 보여주더라. 몇 장은 내가 찢었어 사샤가 못된 짓을 해놔서.. 그걸 그대로 놔둔채로 돌려주면 안될 것 같았어.." 말없이 바라보는 스페이스걸 앞에서 작아진 기분을 느끼며 나는 말을 멈췄다. 그 애는 화나보이지도, 고마워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사람 같았다. 무슨 금욕주의자처럼.
"그동안 내가 너한테 좋은 애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쭈볏거리며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스페이스걸은 내가 자리에 앉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노트를 펴고 점검하듯 들여다 보았다. 그러더니 새 노트를 덮고 내가 준 노트의 새 페이지에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게 뭐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한 일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사샤가 교실에 들어섰지만 날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함께 어울리던 다른 친구들과 타냐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들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망쳐버렸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보고 싶었다.
선생님이 오기 전이라 사샤한테 말을 걸어보자 생각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샤 옆으로 가자 그 애는 역겨워 죽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애가 내뱉었다.
이제 내가 말을 잃을 차례였다.
"저리 꺼져 우리 옆에 오지마." 타냐가 말했다. "우리보다 저 병신 저능아랑 노는게 좋잖아 저능아 세균 묻어 너 같은건 격리해야돼."
둘을 바라보고 있자니 스페이스걸의 기분이 어땠을지 여실히 느껴졌다. 거기에 대고 뭐라고 말할수 있을까? 나는 말 없이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스페이스걸은 내내 나를 보고 있었다. 노트 위에서 펜을 쥔 채 가만히 멈춰있던 그애는 펜을 내려놓더니 방금까지 쓰고 있던 페이지를 찢어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한참 후 점심시간에 그애가 찢어낸 페이지를 휴지통에 버리는걸 보았다.
내게 더는 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페이지를 꺼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림이 마음에 안들었던걸까? 그 애가 그림을 그렇게 버리는걸 본 건 처음이었다. 그 그림을 화해의 제스처 비슷한걸로 사용할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적힌 걸 보자마자 휴지통에 도로 버리고 싶어졌다.
니가 한 말들.
니 '미안해'가 가는 나라가 있어
항상 눈이 오는 끔찍한 나라야
그 눈은 색도 냄새도 썩어 있어
그 속은 오물, 차마 말 못 할 것들
거길 가 본 사람은 니네 아빠 뿐이야
언젠가 니 남자친구가 한번 더 가게 될거야
니 시체 같은 몸뚱이 안에 있는, 인간 모양의 지옥
니 '미안해'는 거기로 가면 돼, 니 껍데기에 난 그 구멍으로
내 노골적인 메시지, 이 같잖은 행간의 재즈가 뜻하는 건
니 미안해는 니 엉덩이에나 처넣으라는 거야.
그 애가 이런 글을 쓴 건 처음 보았다. 너무 지독하고 악의적인 글이었다... 이건 그 애가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장 증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걸 왜 버렸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제껏 그 애가 그린 그림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애들이 뭐라고 하던 그 애의 그림은 항상 아름다웠다. 이건 분노에 가득차 있고 추하다.. 그리고 나한테 쓴 글이다. 나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 애에게 돌려주진 않을거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고 싶었다. 내가 그 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억하고 싶었다.
8학년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남은 친구는 거의 없었고 사샤는 내 배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사샤 버전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뒤틀려갔다. 처음엔 내가 그녀에게 주먹을 날리고 노트를 훔쳤다는 이야기였다가, 나중에는 내가 키스를 하려했고 사샤가 거절하자 노트를 훔쳐 사샤를 곤경에 빠트리려 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스페이스걸과 데이트 한다는 소문까지 따라붙었다. 그런 소문들에 너무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난 진실을 알고있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옳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니까.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새 출발을 기대하고 있었다. 뉴페이스가 몇 있었고 사샤의 루머가 퍼지기전에 걔들이랑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부분에 있어선 작은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더 괜찮은 애들이랑 어울릴 수 있었다.
사샤는 같은 패거리와 어울렸다. 무리가 아주 살짝 커지긴 했지만.
그 애는 여전히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라도 찍는 것처럼 굴었지만 학교 애들은 대부분 사샤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스페이스걸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그 애를 자주 보지 못했다. 수업 몇 개를 같이 듣긴 했지만 교실 밖에선 마주치기 어려웠다. 그 애는 기회만 닿으면 도서관 구석에 있는 칸막이 좌석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가끔은 그 애에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왠지 그럴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샤의 괴롭힘은 당연히도 절대 끝나지 않았다. 그 애는 스페이스걸을 도서관까지 따라가, 5학년 때부터 해오던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칸막이 너머로 불쾌한 시선을 던지며 그 애의 그림에 한마디씩 얹는 것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꼬투리를 잡았다. 그 광경을 볼때마다 말리긴 했지만... 내가 항상 볼 수 있는건 아니었다.
"또 구해주러 오셨네, 제인?" 어느날엔가 내가 또 끼어들자 사샤가 말했다. 그녀의 뒤에서 타냐가 입을 벌린 채 껌을 씹으며 음흉한 눈초리로 날 보고 있었다.
"쟤가 너한테 뭘 했다고 이래?" 내가 물었다. "그냥 혼자 자기 일 하고있는데."
"너한텐 뭘 해줬길래 이러냐 이 레즈년아" 사샤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그리곤 칸막이에 몸을 기대고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유니콘...유니콘,유니콘, 좆같은 유니콘... 너 언제 철들래 스페이스걸?"
"야! 그만하라고 했다." 내가 칸막이를 돌아 나가자 사샤가 움찔하는게 보였다. 순간 그 애의 눈 속에서 공포를 엿볼 수 있었다. 비록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익숙한 분노가 대신했지만 말이다.
"좋아." 그 애가 말했다. "타냐, 여기 잉꼬 커플 지들끼리 놀라고 놔두자." 사샤가 칸막이에서 물러나자 타냐가 충직한 애완견처럼 뒤를 따랐다.
노트위로 등을 구부린 스페이스 걸의 어깨 위로 긴 빨간머리가 쏟아져 내렸다. 그 애는 불가능할 정도로 고요하게 굳어 있었다.
돌아서 가려 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돌아보니 그 애가 날 보고 있었다.
"어.... 괜찮아." 내가 말했다. "쟤가 또 괴롭히면 말해, 알았지?"
"그럴게. 근데... 니가 거의 맨날 오긴 해."
그 애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야 있지만, 나에게 직접 말을 한건 처음이었다.
"어..응. 저러면 안되는거잖아. 애도 아니고. 언젠가는 쟤도 철이 들어야할텐데."
스페이스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서관 문을 흘낏 보곤 다시 노트를 내려다 보았다.
순간 뭘 그리는건지 물어볼까 생각했다. 뭔가 다른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그럴순 없었다. 그 애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애를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10학년때 나는 선택과목으로 미술을 골랐다. 미술에 재능은 없었지만 수강하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놀랄것도 없이 스페이스걸이 거기 있었다. 나는 몇 번 조별 과제를 같이 하자고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작업하자는 제안 자체가 그 애한테는 낯선 모양이었다. 미심쩍다는듯이 날 보긴 했지만, 그 애가 웃었다.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한번은 초상화 과제를 같이 하려고 처음으로 그 애의 집에 갔다. 서로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고, 내가 먼저 모델이 되겠다고 자원한 터였다. 그 애 엄마에 대한 소문이 언제나 스페이스걸 주변을 떠다니고 있었기에 도착하면 무엇을 보게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조용하고 깨끗하게 관리된 집일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문을 열어준 그 애의 엄마는 두꺼운 안경을 벗은, 나이 든 버전의 스페이스걸 같았다.
"네가 제인이구나." 그녀가 말했다. 웃고있진 않았지만 화난 것 같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네, 맞아요.."
"들어와. 메간은 2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집 안은 벽에 걸린 각종 장식품들로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대부분은 접시와 자기인형들이었다. 그 애의 엄마가 날 2층으로 올려보냈고, 나는 지체없이 올라갔다. 스페이스걸의 방으로 이어지는 층계참에 가족사진이 벽 한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어 잠시 멈춰섰다. 곳곳에서 스페이스걸과 그 애의 엄마를 알아볼 수 있었다. 스페이스걸은 웃는 법이 없었다. 그 애 아빠의 모습은 어린 시절 사진 몇 장에만 담겨있었다. 아빠와 함께 있는 몇 안 되는 사진 속에서, 스페이스걸은 아직 아주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나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 애의 방으로 보이는 문을 향해 걸었다. 종이로 만든 별과 행성 장식품으로 보아 그녀의 방일게 분명했다.
그 애는 날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문을 향해 이젤을 세워놓고 그 뒤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 정리된 침대는 방 한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그간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게 분명한 책상은 깨끗히 치워져 있었고, 내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빼어놓은 상태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격식을 차린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하지만 그때 방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그려진 작품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회화에 가까웠다. 그 애가 항상 그렸던 판타지를 그린 그림이었지만 색채가 훨씬 강렬했다. 구름은 푹신한 베개같았고 거대한 성은 끝없이 넓었다.
"대박, 이거 다 니가 그린거야?'
"맞아." 그 애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서 쿠키 접시를 받아들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어.. 맘이 차분해져." 잠시 후 그 애가 말 했다. "그림 그리는거 말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골라서... 완성하는거야."
그녀는 단어를 고르는 것 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뭔가 피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 것 같았다. 바닥을 둘러보다 그녀의 아빠로 보이는 그림을 발견했다. 화풍은 똑같았지만 내용이 달랐다. 완전히 겁에 질린 표정을 한 그 애의 아빠 주위를 삐뚤빼뚤한 낙서가 둘러싸고 있었다. 스페이스걸도 그림을 내려다 보았지만, 탐탁찮아 하는 기색이었고 곧 그 애가 그림을 뒤집어 놓는 바람에 더 볼 수 없었다.
"이제 시작해야돼." 그녀가 말했다. "미안...'
"아니야, 괜찮아!" 내가 말했다. 그리곤 그 애 앞 의자에 앉았다. " 난 그 얘기 듣고싶은데."
스페이스걸은 내 말이 진심인지 의심하듯 곁눈질로 나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결국 이젤 뒤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스케치를 다 한 후에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더 오래 머물렀다. 그 애는 항상 판타지를 좋아했노라고 말했다. 유니콘은 단순하면서도 예뻐서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단어 하나하나에 열중해가며 들었고, 그 애는 이야기를 하면서 수줍은 듯 웃었다.
그 애가 그린 내 초상화는 차원이 달랐다. 스페이스걸의 그림은 항상 아름다웠지만 이 초상화 속의 나는 거의 초월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그게 나인지도 몰라볼 지경이었다. 내 표정에 뭔가 있었다. 아주 작고, 어딘가 평온하게 만족한 듯한 미소였다. 그 미소가 전하는 따스함은 디즈니 영화에 나올 법한 종류였다.
"완전 맘에 들어." 내가 말했다. "완전 최고야 스페... 메간.. 진짜 너무 잘 그렸다!"
"스페이스걸이라고 불러도 돼." 그녀가 말했다. "그 별명이 그렇게 싫진 않아… 적어도 그걸 부르는 사람들만큼은 아니야."
내 감탄은 금세 수치심으로 바뀌었지만 스페이스걸은 화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 애는 늘 그랬듯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완전히 표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얼굴에 많은 감정이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 어떤 감정이 있었다.
"내가..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우리 어렸을때." 내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집 온거야?" 스페이스걸이 물었다.
"아니!...과제 때문에 왔지. 그러니까.. 미술 과제. 초상화..."
그녀가 계속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불쌍해서 같이 하자고 한거야?" 그녀가 물었다.
"아니! 너랑 같이 하면 멋있을 것 같아서."
스페이스걸은 잠시 반응이 없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무미건조한 말투 때문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초상화 쪽으로 걸어갔다.
"태워다 줄 사람 필요하면, 엄마가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그녀가 말에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을 열었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나?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 고마워." 내가 생각해낼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내일 보자."
그 말을 끝으로 그 집을 떠나왔다.
다음 날 아침, 스페이스걸을 다시 보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날 나는 미술 시간이 될 때까지 멍한 상태로 수업들을 흘려보냈다. 막상 미술 시간이 되자 내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 애는 밤늦게까지 작업한 게 분명했다..... 그녀가 가지고 온 걸 보자 숨이 턱 막혔다.
그건 내 초상화였다. 하지만 그 애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작업을 더 해 놓았다. 스케치 위에 채색을 더해 나를 아주 아름다운 사람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내 갈색 머리 주변으로 꽃들이 만발했고 데이지, 백합, 국화꽃으로 만든 왕관이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색채는 너무나 선명했고, 그 그림 속의 나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교실로 들어서는 나를 그녀가 빤히 쳐다보았다. 내 반응을 살피려는 것 처럼. 하지만 내가 할수있는 것이라곤 경외감에 가득 차 크게 뜬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뒤 돌아 스페이스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날 향해 웃었다. 그녀의 그림만으로 우리 둘 다 A를 받았고, 미술 실 밖에 걸리는 영광까지 얻었다. 당연히 그녀에게 그림이 얼마나 맘에 드는지 말해주었다. 내 말에 웃음짓던 그 애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리고, 살면서 저렇게 귀여운 미소는 처음 본다고 생각했던것도 선명하다.
초상화가 걸린지 하루도 안되어 사샤가 비평을 하러 친히 행차했다. 그애들이 습격했을때는 점심시간이었고 난 카페테리아에서 막 감자튀김을 받아온 참이었다.
"왕관은 어딨냐 레즈년아." 사샤가 말했다.
"나 좀 내버려둬라." 그 애들을 획 스쳐지나며 말했지만 사샤는 작정하고 나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너 레즈년인거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이제 아주 증거를 갖다가 광고를 하네? 우리가 사건 하나 해결했다 타냐. 그래서 어쨌어? 집 가서 저 저능아 거기라도 빨아줬어? 아주 기술이 좋은가보네 쟤가 그림까지 그려주는거 보니."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사샤와 타냐가 나를 계속 따라왔다.
"왜 그냥 가? 나는 레즈 되기엔 덜 이뻐서 그래?" 사샤가 쏘아붙였다.
"쟤는 저능아랑만 자나봐." 타냐가 말했다. "스페이스걸은 흥분하면 돼지처럼 끽끽거린다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내 뒤에서 사샤도 멈췄다. 그 애가 한 말의 어떤 점이 나를 이렇게 화나게 했는지 몰라도 그 둘이 마침내 내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나는 뒤로 돌아서 점심이 담긴 쟁반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감자튀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타냐를 겨냥했음에도 맞은건 사샤였다. 사샤가 쿵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그 애가 바닥에 부딪힐때 아직 의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타냐가 곧바로 달려들어 나를 벽으로 내동댕이치고 꼼짝 못하게 짓눌렀다. 타냐는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쎄서 빠져나올수가 없었다. 애들 몇몇이 우리를 말리려 달려들었고 마침내 선생님이 와서 우리 셋을 교장실로 데리고 갔다. 카페테리아를 나설때 복도에 서서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스페이스걸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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