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딧 베스트 - 스페이스걸 마지막.
익명
1시간전
24
난 자연스레 3일 정학 처분을 받았지만 타냐와 사샤는 아니었다. 둘 다 그냥 걷는 중이었는데 내가 달려들어 때렸다고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결국 둘의 증언 대 내 증언이었다. 갖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이마에 멍 하나만 달고 교장실을 빠져나가며 사샤는 그 엿같은 웃음을 또 지어보였다. 그녀의 눈에서 익숙한 감정이 보였다. 지난번에 내가 그 애에게 주먹을 휘둘렀을때 봤던 그 분노였다. 그게 날 겁먹게 했다.
학교로 돌아왔을때 나는 내가 괜히 겁먹은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초상화가 사라진 것이다. 사샤를 때린일로 학교에서 초상화를 내린 줄 알았지만 진상은 그보다 더 나빴다.
"누가 가져갔어." 스페이스걸이 말했다. 그 애는 도서관의 매번 앉는 자리에 앉아 노트에 꽃을 그리고 있었다.
"언제?"
"니가 사샤 때린 다음 날... 아직 아무도 못 찾은거 같아."
그 애는 날 보지 않았다. 시선을 그림에만 고정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누구를 의심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 누가 있겠는가? 사샤를 찾아가 따지려고 반쯤 마음 먹었지만 좋은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또 내가 먼저 그랬다고 피해자 행세를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애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하지만 결국 그건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미술실로 돌아갔더니 그림이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수정을 거친채로.
저능아랑 붙어먹는 레즈년
이라는 문장이 밝은 빨강색으로 초상화에 휘갈겨져 있었다. 복도 끝자락에서도 빨간글씨가 보였고 그림 밑에서는 애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뿐이었다.
그림은 바로 내려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샤는 결국 복수에 성공했다. 게다가 그림에서 끝낸것도 아니었다. 스페이스걸이 도서관에 있을때와 뭔가 달라 보였던것이다. 불안해 하는데다 울었던 것처럼 눈이 빨갰다.
"그림은 미안해..." 내가 부드럽게 말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짓을 할건 알고있었어..." 그 애가 말했다. "이젠 익숙해서 신경 쓰이지도 않아. 그래도 너한테 저런 말을 하다니... 맘이 안좋아."
"그래도 니가 열심히 그린거잖아." 내가 말했다. "나라도 속상하겠다."
그 애는 그저 고개를 흔들뿐이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스페이스걸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잔뜩 구겨진 종이 한장을 꺼내 내쪽으로 내밀었다.
천천히 종이를 폈다. 그게 무슨 그림인지 알아보는 순간 내 눈이 커졌다.
그때와 똑같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거의 비슷했다. 목을 매달고 있는 스페이스걸 옆에 내가 서 있었고 '저능아 레즈년들의 결혼식'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 사물함에 이런게 잔뜩있었어...." 스페이스걸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노트 도로 줬을때 있잖아. 걔가 이런걸 그려놨더라고. 그래서 내가 찢어버렸었어."
스페이스걸은 다시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 애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필기를 하는 대신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몇번 그쪽을 흘끔거리며 그 애가 그리고 있는 유니콘을 훔쳐보았다. 지난번에 본 유니콘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이번 그림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시 노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새 유니콘이 없었다. 지워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깨끗했다. 지운 흔적 하나 없이.
그 날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타냐가 나를 따라왔다.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더는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집들 뒤로 난 작은 산책로의 중간쯤 왔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날 향해 다가오는 타냐를 바라보았다.
"뭐야?" 내가 물었다,
"서프라이즈~" 타냐가 말했다. "사샤랑 내가 우리 동네 레즈년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려고... 웁스! 내가 너무 많이 말했나."
타냐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정말이지, 한 대 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애가 더 힘이 쎄다는건 우리 둘 다 알았다. 타냐의 꿍꿍이가 무엇이든 좋은 것일리가 없었다. 날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타냐가 가까이 다가왔다.
"빨리, 레즈년아. 집에 가자고." 그 애가 말했다. "빨리 가서 서프라이즈가 뭔지 확인하라니까."
그 소름끼치는 순간, 타냐가 날 협박하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내가 그 애를 앞지를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싸워봤자 이길 수도 없었다. 타냐가 하라는대로 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천히 돌아서서 내 뒤를 바짝 따라오는 타냐를 느끼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다. 그때 저 앞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사샤가 보였다. 멀리서도 사샤 옆에 놓인 빨간색 휘발유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타냐가 내 팔을 움켜쥐고 벤치로 질질 끌고갔다. 사샤는 광기어린 얼굴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안녕 제인." 그녀가 말했다. "잘지내?"
"이게 뭔 짓거리야?"
"얘기 좀 하자고." 사샤가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전에 그딴짓을 하고도 무사할줄 알았어? 아니야. 몇년동안 나를 쓰레기 취급한 이유가 고작 스페이스걸 때문이야? 니가 누굴 선택한건지는 알지?어? 존나... 난 그 저능아년이 싫어. 근데 그거 알아? 니 년은 더 싫어. 걔를 불쌍하게 여기면 뭐 니가 나보다 나은 인간같냐?"
"넌 미쳤어."
사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야 좀 놀렸다고 쟁반 던진게 누군데. 니가 개 미친 사이코지."
벤치에 앉은 사샤 뒤로 스페이걸이 그려준 내 초상화가 보였다. 사샤가 그림을 집어들어 내 앞에 휙 던졌다. 그리곤 휘발유통을 들어 캔버스 위에 쏟아부었다.
"레즈가 되고싶으면 맘대로 해. 근데 너나 니 저능아 창녀가 이딴 걸 학교에 걸어놓고 나대게 놔두진 않을거야. 니 과제에 작별인사나 해라 갈보년아."
사샤가 주머니를 뒤져 성냥갑을 꺼냈다. 그녀의 웃음이 더 커지나 했더니 우리 뒤에 있는 뭔가를 보곤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뭐야 씨발?" 타냐가 말했다. 나는 애들이 뭘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목을 길게 뺐다. 보긴 봤지만... 그걸 믿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우리 뒤쪽 산책로에 유니콘이 서있었다.... 하지만 생김새가 너무 기묘했다. 우리가 아는 말과는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유니콘의 새하얀 몸통을 따라 얇은 파란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질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꼭 줄노트에서 오려낸 것 같은 모양새 였지만...불가능한 일이었다...불가능 해야만 했다. 유니콘의 몸 선을 따라 회색줄로 깔끔하게 윤곽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 선을 보니 스페이스걸이 그렸던 그림이 떠올랐다. 유니콘은 스페이스걸의 노트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생겼다.
타냐가 내 팔을 놓고 휘청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크게 뜬 눈은 달려오는 유니콘을 향해 있었다. 유니콘은 성난 포효를 지르며 타냐를 향해 돌진했고, 공포에 질린 그녀는 달아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며 산책로로 도망쳤지만 종이 유니콘을 앞설수는 없었다. 타냐를 따라잡은 유니콘이 머리를 숙였다. 단 한번의 신속한 동작으로 그것의 뿔이 타냐의 등을 가슴까지 꿰뚫었다. 유니콘의 뿔에 꿰인 타냐의 몸이 땅에서 들어 올려졌고, 유니콘은 다시 방향을 틀어 살기 어린 눈으로 사샤를 노려보았다.타냐는 공포로 휘둥그레해진 눈으로 자신의 몸을 뚫고 나온 거대한 뿔을 내려다 보았다. 생명이 빠른 속도로 흘러나가며 타냐의 몸이 움찔거렸다. 마지막 경련이었다.
유니콘이 고개를 숙이자 타냐가 뿔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녀의 팔다리가 뒤엉킨 채 바닥에 처박혔다.
사샤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채 유니콘이 뒷다리를 짚고 일어나 발굽으로 타냐의 몸을 내리찍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타냐는 비명을 지르지도,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누워 밟히고 또 밟혔다. 부디 그녀의 숨이 빨리 멎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샤가 성냥개비를 떨어트리고 두려움에 질린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서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도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녀의 발치에 놓인 내 초상화를 내려다 보았다. 초상화가 바뀌어 있었다. 아름답게 채색된 버전의 내가 캔버스 밖으로 몸을 내밀어 현실세계를 침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샤의 다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여전히 그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그림속의 내가 천천히 캔버스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샤의 다리를 쥔채로.
"씨발, 씨발,씨발!"
사샤는 필사적으로 그림 속의 나를 쳐내려 했지만,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그 애는 벗어나지 못했다. 천천히 캔버스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샤의 손톱이 아스팔트라도 붙잡으려는 듯 바닥 위를 긁어댔다. 공포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 없이 도움을 애원하는 그녀를 침묵속에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제인! 제인 도와줘! 제발! 제발!"
그림속의 내가 손을 내밀어 사샤의 머리채를 잡고 캔버스 안으로 끌어내렸다. 마치 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분명 방금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고요한 공원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종이 유니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니콘은 콧김을 한번 내뿜은 후 숲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천천히 그림 쪽으로 다가가 내려다 보았다. 그림은 입을 벌리고 공포에 질린 마지막 비명을 토해내는 사샤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망설인 끝에 나는 그림을 집어들었다. 내일 아침에 스페이스걸에게 돌려줄 것이다.
타냐의 죽음은 야생동물의 공격으로 처리되었고 사샤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목격한 일에 대해 한번도 스페이스걸에게 묻지 않았다. 물론 나보다는 많이 알겠지만 그 애조차 정답을 알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시절도 어언 10년전이고, 나는 되도록 많은 것을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이제 나만의 삶을 잘 살고 있으니 너무 많은 질문을 하지는 않으려 한다. 가끔 그림이 움직이는 걸 보긴 하지만 굳이 한번 더 확인하거나 내 와이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묻지도 않는다. 그녀가 그 얘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으니 나도 절대 강요할 생각이 없다. 사샤의 그림은 그녀가 집 한켠에 차린 스튜디오에 걸려있다. 그녀의 아빠를 그린 그림 바로 옆이다. 가끔은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며 어쩌면 일이 다르게 풀릴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지만 죄책감은 그닥 들지 않는다. 잔인하게 짓밟히거나 동물의 공격으로 사망한 케이스를 또 듣는다 해도, 솔직히 죄책감이 크게 들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알기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내 아름다운 스페이스걸을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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