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디아블로에 담긴 전설 1/2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갈게.”
“정말? 어디에 있든?”
“응.”
“올 수 없는 곳이라면?”
“그런 곳은 없어.”
“약속해. 꼭 내 곁으로 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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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라고 아십니까?”
술집 주인이 묻자, 남자는 메뉴판에서 시선을 들었다.
바의 이름은 낡은 네온사인으로 적혀 있었다.
비가 막 그친 골목 끝에서 간판이 유난히 붉게 빛나, 퇴근길의 남자는 마치 누군가에게 이끌리듯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술집 주인은 줄곧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술집 주인의 목에는 짙은 색의 모반이 눈에 띄었지만, 남자는 예의상 최대한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디아블로…? 게임 말씀하는 겁니까?”
“아뇨, 와인 말입니다. 디아블로 와인.”
남자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예 들어봤습니다.”
“디아블로 와인에는 전설이 하나 있지요.”
주인은 와인병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주 아주 옛날에, 가고일이라는 악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마는 한 가지 금기를 저질렀죠.”
“그게 뭡니까?”
“한 천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름은 미카엘이라 하더군요.”
“아, 그게 금기인 겁니까?”
“하늘에서는 그랬나 봅니다.”
주인은 엷게 웃었다.
“아무튼, 둘은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신의 눈을 오래 속일 수는 없었겠지요. 결국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기억을 잃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
“흠…”
“천사 미카엘이 먼저 벌을 받았습니다. 지상으로 사라졌지요. 가고일은 미카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에게 빌었습니다. 미카엘이 어디 있든, 거기로 가게 해달라고요. 아, 그는 천사가 어디 있던 기필코 따라가겠단 약속을 했었거든요.”
“신이 그 부탁을 들어줬습니까?”
“예, 아량도 넓지요. 들어줬습니다. 근데 그래봤자 뭐하겠습니까? 기억을 잃을 텐데.”
남자는 어느새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허나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예상한 악마 가고일은, 그 전부터 미리 한 가지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자신의 피와 기억을 담아 두 종류의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디아블로였고, 지상에 저렴한 가격에 유통되도록 했죠. 언젠가 둘 중 누군가 그 와인을 마신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요.”
“그럼 마시면 되는 거네요.”
“그랬다면, 전설이 아니겠지요. 악마의 기적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남자는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레드와 화이트, 둘 중 하나는 기억을 돌려주고, 다른 하나는 마신 이를 죽입니다. 누군가에게 정답을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선택은 반드시 스스로 해야 하지요.”
“하하. 만약 제가 악마나 천사라면, 매우 신중히 골라야 하겠군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신중해봤자입니다.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결국은 1/2 확률입니다. 심지어 본인이 악마인지도 알 수 없으니.”
“그건 그렇네요. 과연 흥미로운 전설입니다. 사장님은 드셔보셨습니까?”
“그럼요. 저는 이미 이 이야기를 듣기도 전인 어릴 적에 마셔봤습니다.”
주인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평소에 술은 자주 하십니까?”
“아뇨, 잘 안 마십니다. 기껏해야 소주나 맥주 정도… 오늘은 그냥 지나가다가 간판이 묘하게 눈에 띄어서, 홀린 듯 들어와 봤습니다.”
주인의 시선이 남자의 왼손에 잠시 내려앉았다.
“그러시군요. 실례지만,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
“전 고아입니다. 어릴 때 부모와 떨어져 보육원에서 자랐죠.”
“지금은요?”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지내고 있습니다. 5달 전 결혼했거든요.”
주인의 잔을 닦던 손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남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의 반지를 내보였다.
"행복해 보이십니다."
"그럼요.”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한쪽에 꽂아 둔 사진을 조심스럽게 빼내 내밀었다.
“사진도 있는데. 예쁘죠?”
사진 속에는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주인은 남자가 내민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쁘군요.”
“그렇죠?”
남자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
“제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 예쁩니다.”
주인은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았다.
술집 주인의 말수가 없어지자, 남자는 사진을 다시 집어넣었다.
“저, 자랑 좀 했네요.”
“아닙니다.”
주인은 붉은 병의 코르크를 땄다. 병목에서 마른 소리가 짧게 났다.
“처음 오셨으니 한 잔 드리겠습니다.”
잔이 남자 앞에 놓였다. 붉은 와인이 찰랑였다.
“아! 감사합니다.”
남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잔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끔찍한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하고,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저기..”
남자가 가쁜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 화이트는 없습니까..?"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렸다.
주인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급처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현재 화이트 와인은 없습니다. 레드도 괜찮은데, 별로신가요?”
주인은 붉은 와인이 찰랑이는 잔을 남자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남자가 느낀 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인 공포였다.
느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다른 감각의 공포.
공포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밀려오는 공포를 참아낼 수 없었던 남자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문까지 걸어가는 도중 한번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아아"
주인은 남자를 쫓아가 부축하려는 듯 하다가, 포기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마침내 문을 열고 거리로 나온 남자는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만취한 사람처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분명 내가 모르는 게 있어.’
그리고 다시금 자신을 옥죄어 오는 듯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인간이 평범하게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니었다.
‘이건... 아니야. 신이 있어. 내가 악마인 거야? 천사?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하는 거야. 저 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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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부터, 남자는 기이한 꿈들을 꾸기 시작했다.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술집 주인이 내밀었던, 잔 속에서 찰랑이던 레드 와인과 같은 섬뜩하고도 선명한 색이었다.
구름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압도적인 공포가 짓눌러왔다.
술집에서 느꼈던 한기가 다시금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가슴을 찢고 심장을 끄집어낼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하늘에서 검은 형체의 것들이 내려오더니, 남자를 향해 쫓아왔다.
남자는 도망쳤지만,
“도망칠 곳은 없다."
머릿속을 찢을 듯 울리는 천둥 같은 음성에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나, 날 죽이려고 해… 날 죽이려고 해!!! 나를 쫓아오고 있어.”
남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곁에 있던 아내도 놀라 몸을 일으켰다.
“여보?”
“날 쫓아오고 있어!”
“무슨 소리야? 악몽 꾼 거야?”
“아아… 안 돼.”
“괜찮아. 진정해.”
아내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 안. 아내의 따뜻한 체온이 곁에 있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누군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끔찍한 감각을 지워낼 수 없었다.
끊임없는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훼집었다.
나는 천사일까, 악마일까? 내가 미친 걸까?
아내가 나보다 어리다는 걸 생각하면, 아내가 악마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다면 아내랑 계속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가고일은 미카엘을 따라갔다. 그 둘은 평생 함께 하기로 했다.
아내가 악마일 수밖에 없다. 나는 천사다.
남자는 다시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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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출근해서도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모니터의 하얀 엑셀 화면이 자꾸만 붉게 번져 보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젠장, 그 술집만 안 갔어도...! 대체 거길 왜 가서는!'
괴로워하는 그의 앞으로, 제경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밀며 물었다.
“어이, 너 얼굴이 왜 그래? 밤새 게임했냐?”
제경은 남자의 고등학교 친구였다.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현재는 직장 동료가 되었다.
“아니, 그냥… 잠을 잘 못 잤어.”
“신혼인데 잠을 못 자? 부럽다, 인마.”
동료가 실없이 웃으며 어깨를 툭 쳤지만, 남자는 웃을 수 없었다.
“야, 농담인데 왜 그렇게 정색하냐. 어디 진짜 아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 적 있어?”
“뭐야, 갑자기 아침부터 재수 없는 소리야. 너 어디 대출 막혔냐? 아니면 제수씨랑 싸웠어?”
“아니… 어제 한 술집에 갔었는데, 거기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근데 그 뒤로 계속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야.”
동료는 눈썹을 찌푸리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이야기?”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디아블로라는 와인이 있는데, 거기에 전설이 있다는 거야.”
“디아블로? 와인 이름이야?”
“응. 근데 그냥 와인이 아니래. 그 전설에 나오는 악마가 천사를 사랑했대.”
제경이 눈을 깜빡였다.
“악마가 천사를?”
“응. 둘이 함께 있으려고 했는데, 신의 뜻을 어겨서 벌을 받았대. 기억을 잃고 인간 세상으로 떨어졌다고 했어.”
제경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야, 그게. 누가 그런 걸 믿어?”
“레드랑 화이트가 있는데, 둘 중 하나는 기억을 되찾게 하고 다른 하나는 죽게 만든다는 거야.”
“야. 그래서 네가 천사고 악마라는 거야?”
제경이 농담처럼 물었지만, 남자는 웃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남자는 마른 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누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아. 어젯밤에는 꿈까지 꿨어. 내 심장을 빼내려고 하는...”
“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경이 잠시 기다리다 다시 물었다.
“하루 쉬는 게 어때. 오후에 반차 내고 병원이나 가봐.”
“병원은 됐어. 가서 뭐라고 말해. 무언가 나를 쫓아오는 것 같다고? 와인에 이상한 전설이 있다고?”
“그건…”
“너 내가 어릴 때 자랐던 보육원 기억나지. 성당이랑 같이 있던.”
“그래. 너 고등학교 때 떠나버리고는, 다시 안 가겠다며.”
“거기 성당을 좀 가봐야겠어. 신부님 좀 뵙고.”
“갑자기 거긴 왜?”
“어쩌면 내가 잊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신부님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의 모든 신경은 종일 그곳에 쏠려 있었다.
‘레드 아니면 화이트. 하나는 기억을 되찾고, 하나는 죽는다…’
아내도 지켜야 한다. 잘못된 와인을 마시게 해서는 안 된다.
미쳐버린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망상이라 해도, 이 끝없는 공포와 기묘한 환각을 끝내야 한다.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이제라도 보게 되니 반갑네.”
보육원의 관리인이기도 했던 신부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벌써 결혼도 했다고?”
“네.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잘됐군. 자네가 어릴 때는 워낙 말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남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찾은 성당은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빛바랜 나무 의자.
벽에 걸린 십자가.
성모상 앞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촛불.
그리고 아주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종소리.
“그런데 무슨 일인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고.”
“아…”
남자는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한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무슨 질문인데?”
“혹시…”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디아블로에 담긴 전설… 아십니까…?”
신부는 눈가를 찌푸리며 황당해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와인에 전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아시나 해서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응?”
“제 부모님에 대해서 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신부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해졌는가?”
“그냥…”
남자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있는 것 같아서요.”
신부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신부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물어본 적이 없어서 굳이 보여주진 않았지만, 아마 내가 어딘가 보관해뒀을 거야.”
신부는 안쪽 방으로 향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자네한테 보여줄 만한 게 있을 거야.”
신부가 사라지고, 남자는 넓은 성전에 혼자 남았다.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이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도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방향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성당 자체인 걸까?
아니면 신부님?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이잉.
갑작스러운 진동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아내였다.
그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
“여기 OO병원 응급실입니다.”
“네?”
“김희연 씨 남편 되시는 분 맞으십니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요?”
“교통사고로 조금 전에 응급실에 오셨습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고요?”
“현재 검사 중이고요. 보호자분께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아내는 괜찮습니까?”
“오셔서 설명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의식은 있어요?”
“처음 이송됐을 때는 의식이 없었습니다.”
남자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젠장! 내가 아니라, 아내였던 건가? 이곳에 올 게 아니라, 아내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나?’
남자는 전화를 끊자마자 외투를 움켜쥐었다.
“신부님!”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신부님!”
잠시 기다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성당을 뛰쳐나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와인도,
자신의 부모도,
신부가 보여주겠다던 무언가도,
그 순간만큼은 전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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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아내는 목숨에 지장이 없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량과 부딪쳐 넘어졌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면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그래도 머리를 다친 만큼 하루 이틀은 병원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아내가 퇴원한 날, 남자는 현관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절대로 혼자 밖에 나가지 마.”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도.”
“출근은 해야지.”
“며칠만 쉬어.”
“여보.”
“장 봐야 하면 내가 갈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아내의 사고 이후, 남자의 확신은 오히려 강해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내를 언제까지 집 안에 가둬둘 수도 없었다.
그는 확인해야 했다.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화이트.
술집에는 없었던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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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편의점 주류 매대 앞에 섰다.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레드.
화이트.
수많은 와인병 사이를 헤집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그는 구석에 놓인 투명한 디아블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조심히 꺼내 들었다.
계산대 직원은 창백하게 질린 그의 안색을 보고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계산을 마쳤다.
남자는 와인병을 손에 들고서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
남자는 와인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당신, 이거 마셔봤어?”
"나는 술 잘 안 마시잖아. 그리고 와인은 무슨."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잔에 먼저 화이트 와인을 채웠다.
“나랑 같이 한 잔만 마셔 줘.”
“갑자기 왜 그래? 당신 오늘도 이상해.”
“제발.”
“하지 마.”
남자는 아내의 잔에도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나랑 한 모금만 마셔봐.”
“싫어.”
“한 모금이면 돼.”
“싫다고.”
남자는 제 잔을 들어 올렸다.
아내가 황급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병원 가자.”
“놔.”
“우리 지금 병원부터 가.”
“마셔야 해.”
“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있는 것 같아.”
“당신 지금 아픈 거야. 너무 지쳐 있는 거라고.”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왜 그래!”
“당신은 느껴지지 않아? 기억나지 않지만, 난 분명히 느껴져! 당신은 왜 느껴지지 않는 건데!”
아내의 고함에 남자도 흥분해버리고 말았다.
“당신 지금 정상이 아니야!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그 생각만 하고 있잖아!”
그는 아내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잔을 기울였다.
와인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헉!”
손에서 잔이 떨어졌다.
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식탁 위로 고꾸라졌다.
“여보!”
아내는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남편을 향해 달려갔다.
“여보! 눈 떠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식이 차갑게 끊어지기 직전,
어릴 적부터 듣던 성당의 종소리가 남자의 머리에 울렸다.
댕.
댕.
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