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디아블로에 담긴 전설 2/2
"심장마비였대. 그렇게 젊은데."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휴… 여자도 안타까워서 어떡해…”
조문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깐, 술을 조심해야 해, 이 양반들아.”
누군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남자의 아내, 희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며칠 사이 얼굴도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그때 낯익은 얼굴 하나가 빈소 안으로 들어왔다.
남편의 회사 동료이자,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친구, 제경이었다.
“제수씨.”
희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제경은 향을 올리고 한참 동안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혹시…”
“네?”
“동우가 마지막에 와인을 마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희연은 고개를 들었다.
“네… 들으셨군요.”
“화이트였어요?”
희연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회사 근처에 있는 술집에 우연히 들어갔는데, 거기서 무슨 전설을 들었다고 했어요.”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제경을 바라보았다.
“디아블로라는 와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순간 아내의 손끝이 움직였다.
“디아블로…”
“아세요?”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기 직전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와인병.
투명한 병에 적혀 있던 이름.
그리고 그 위에 그려져 있던 악마의 형상.
분명 그것이었다.
“어떤 이야기였나요?”
제경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헛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말씀해주세요.”
희연의 목소리가 조금 급해졌다.
제경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악마와 천사가 사랑에 빠졌는데, 벌을 받아 기억을 잃고 인간 세상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였어요.”
“……”
“그리고 그 악마가 자기 기억을 되찾으려고 와인을 만들어놨다나… 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제경은 잠시 망설였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에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신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희연의 표정이 굳었다.
“또 다른 말은 없었나요?”
“성당에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성당이요?”
“어릴 때 동우가 보육원에 살았던 거 아시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성당이랑 같이 있었는데, 그 성당요. 자신에 대해서 신부님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 술집은 어디인지 아세요?”
“주소는 모르는데…”
동료가 기억을 떠올리다 말했다.
“회사 근처 골목이라고 했어요. 퇴근하다가 우연히 들어갔다고.”
.
.
.
장례가 끝난 다음 날, 희연은 남편의 회사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제경에게 대략적인 위치를 다시 물어,
회사 근처 골목을 하나씩 돌아다녔다.
낮에는 식당과 카페가 붐비는 거리였지만,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가자 오래된 술집과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비슷한 골목을 몇 번이나 헤맨 끝에,
골목 끝에서 낡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Olpaip]
희연은 걸음을 멈췄다.
가게 문은 닫혀 있고, 손잡이 옆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임시 휴무]
희연은 문을 두드렸다.
반응은 없어 유리 너머로 안을 들여다봤지만,
가게 안은 불이 꺼진 채 어두웠다.
몇 번 더 두드려봤지만, 끝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희연은 한참을 문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던 중,
제경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남편이 죽기 전에 찾아갔던 또 다른 장소.
성당.
.
.
.
가본 적은 없어도 보육원의 이름 정도는 여러 번 들었다.
남편은 가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지만, 보육원 근처에 가는 건 슬프다며 싫어했다.
희연이 방문한 보육원은 오래된 건물이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고,
그 옆에는 성당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담장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낮이라 사람도 거의 없어 성당 안은 매우 조용했다.
희연은 입구 근처에 있던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여기 신부님 계신가요?”
“아뇨. 지금 잠깐 나가셨어요.”
“아, 그럼,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오늘 중으로는 오실 텐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아…”
“무슨 일로 오셨나요?”
희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망설였다.
“혹시 신부님 돌아오시면, 그냥… 김동우씨 와이프가 왔다 갔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희연은 여성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나서, 성전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긴 의자가 여러 줄 놓여 있었고,
앞쪽에는 십자가와 제단이 보였다.
희연은 뒤쪽 의자에 앉았다.
남편도 며칠 전 이곳에 있었을 거다.
신부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희연은 한참을 앉아 슬픔에 잠겨있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부가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다시 오면 됐다.
오늘은 보육원 근처라도 한 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남편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을,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직접 보고 싶었다.
희연이 성당 밖으로 나와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문득,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셔츠 깃 위로 드러난 피부에,
짙은 색의 커다란 모반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김동우 씨…”
희연의 눈이 커졌다.
“…아내분이시죠?”
그 질문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던 사람.
남편에게 그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
계단에 디딘 발끝부터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감각이 종아리를 타고 순식간에 올라왔다.
왜 이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는지.
왜 하필 이곳에 있는지.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정작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죠?”
공포를 억누르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죽었습니까?"
“당신이 죽인 건가요?”
희연은 두려움에 손발을 떨면서도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희연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희연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도 이제 알겠어요.”
사내의 걸음이 멈췄다.
“인간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거.”
사내가 다시 희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이가 그 술집 이야기를 했어요.”
“…”
“레드와 화이트. 하나는 기억을 돌려주고, 하나는 죽인다면서요.”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이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신이 존재한다고 했답니다. 신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사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신의 계획이겠지요… 벌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계획이요?”
“저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어요. 그 뒤로 여기 보육원까지는 찾아냈는데...”
그는 희연 너머로 성당을 한번 바라봤다.
“지금까지의 세월이 무색하게, 다 끝나버렸네요.”
마치 확인해야 할 것을 모두 확인했다는 듯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도 죽었다는 걸 늦지 않게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희연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요?”
“저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대답은 없었다. 희연은 그저 사내가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골목을 돌아,
사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희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함께 살 날이 훨씬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도 몰랐다.
“잠시만요!”
성당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연이 뒤를 돌아보자, 한 노신부가 성당 문을 열고 뛰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신부가 희연의 얼굴을 확인했다.
“김동우 씨 아내분입니까?”
희연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부는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 아직 안 가셨군요.”
신부는 손에 작은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희연이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신부가 먼저 말했다.
“며칠 전에 동우가 여기 왔었어요. 그동안 한 번도 자기 과거를 물어본 적이 없던 아이였는데…”
신부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은 갑자기 와서 물어보더군요. 내가 예전에 보관해둔 사진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사진이요?”
“그래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놓고 찾으러 갔는데…”
신부가 한숨을 쉬었다.
“돌아와 보니까 이미 가버렸더군요.”
희연은 봉투를 바라봤다.
신부는 안에서 색이 바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병실 침대에 누운 젊은 여자.
두 명의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희연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이분이…”
“동우 어머니예요.”
신부가 사진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가 동우고. 어릴 때 얼굴을 내가 기억하죠.”
그러다 희연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사진에는 아기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럼 여긴…?”
“쌍둥이였어요. 이란성이라 닮지는 않았지.”
희연은 다시 사진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두 번째 아기의 목.
작은 목 한쪽에,
짙은 색의 커다란 반점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크게 보였지만,
분명 같은 모양이었다.
“이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애 엄마가 다른 곳에 맡긴 것 같아요.”
“…아아… 말도 안 돼요. 이건…”
“동우가 이제라도 알면, 찾고 싶어할까요..? 동우는 잘 있지요?”
.
.
.
그날 밤,
사내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가게로 돌아왔다.
그는 진열장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먼지가 뽀얗게 쌓인 화이트 와인을 꺼내 잔에 따랐다.
텅 빈 의자를 바라보며 아주 오래전의 약속을 되뇌었다.
그리고 허공에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미카엘.”
그는 잔에 든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가게 안에 공허하게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