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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저주받은 돈

익명
2026-10-24 14:37

“그러니까… 자네가 그 돈을 어디다 썼다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노인이 다가온다.

“저- 저는…”

“똑바로 말해!”

팔을 꽉 붙잡으며

“하나도 빼먹지 말고 전부 말해. 알겠어?”

“......”

* * *

"맨날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구."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다. 이번 판은 정말 답이 없다. 저 빌어먹을 팀원 놈 때문이다. 계속 죽기만 하는 게, 우리 편인지 상대 편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 이거 지면 안 되는데...

"또 게임 하니, 응? 엄마랑 등산이나 가자. 승우야."

"아 바쁘다고!"

방문을 발로 차서 쾅 닫는다. 제발 제발... 이번 전투에선 이겨야 한다. 꼭 이겨야 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몰살, 더 이상 승패를 뒤집긴 어렵다.

입술을 꽉 깨문 채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무언가 생각난듯 키보드를 두들긴다.

승우 킴 | 야, 우리 팀 1픽 진짜 뭐하는 거냐.

승우 킴 | 이럴 거면 겜 접어라.

그러나 상대는 태연하게도,

지존채원 | 게임 가지고 ㅈㄹㄴㄴ

지존채원 | 집에서 이런 것만 하지 말고 밖에도 좀 나가고 해라 ㅋ

밖에도 좀 나가라...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이 개새...

"아들? 방금 무슨 소리야?"

……아 진짜.

* * *

"왠일이래, 우리 승우?"

북한산 산자락, 여름의 지독한 더위가 등살을 파고든다.

"그래, 공기 쐬니까 좋지? 이렇게 주말마다 등산하고 그러면"

걸어봐야 다 똑같은 풍경뿐이다. 나무 좀 있고 돌 좀 있고 흙. 이게 대체 무슨 재민가?

“그러면 건강에도 좋고 마음도 편해지고.”

오히려 불편해지기만 하는데 뭘.

“어휴, 툴툴 대지 말고 엄마 말 좀 믿어봐, 승우야. 내가 누구야. 그 힘든 역경 전부 이겨낸 김미옥 아니야. 김미옥.”

“네, 알겠어요. 김미옥 여사님.”

발을 질질 끌며 하는 수 없다는 듯 산을 오른다. 하염없이 산비탈을 오르다보니 어느덧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마저도 지겨운 콘크리트 풍경.

반면 선두에 선 엄마는 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아들이랑 오니 왠지 기분이 더 좋다. 나무와 풀은 바람에 날려 사그락대고, 구름은 해를 가려 찰나의 어둠을 빚어낸다. 말 그대로 장관이다.

그런데 그때,

“엄마, 엄마…”

뒤에서 들려오던 발자국 소리가 돌연 멈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본다. 방금까지도 잘 걷던 아들이 어색하게 멈춰 있다.

“왜 그래, 승우야? 응? 한승우, 왜 그래!”

그 순간 해가 구름에 가려진다. 갑자기 어두워진 숲 사이로 뭔가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돈다. 꺼림칙한 그의 표정.

“엄마, 나 사실……”

침을 꿀꺽 삼키더니

“화장실 가고 싶어.”

“에이 뭐야 진짜. 뭘 그리 심각하게 말해? 깜짝 놀랐네.”

한 방 먹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웃음을 터트린다.

“여긴 화장실 같은 건 없으니까 저쪽에 내려가서 싸. 사람 오나 안 오나 확인하고.”

뒤돌아서 길을 내려온다. 입꼬리가 이제 대놓고 씰룩거린다. 아무래도 난 연기가 적성인 것 같아. 정말 깜빡 속였어.

그렇게 내려가다 길 옆으로 빠지니 이제 아무도 못 볼 성싶다. 보이는 거라곤 아직도 썩지 않고 버티는 낙엽뿐이다. 지나간 계절의 부스러기.

그때 저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승우야? ……큰 거야, 작은 거야?”

“아, 엄마!”

사람들 다 듣겠다. 정말 별 걸 다 물어본단 말야.

그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왔다. 엄마는 나름 유추를 하는 모양이었다.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그런데 정말이지 그는 애매하게 돌아왔다.

큰 것이라기엔 너무 짧고, 작은 것이라기엔 너무 오래 걸렸다.

혹시…

사춘기 시절의 혈기왕성한 그런, 아냐 아냐. 그럴리가 없지. 우리 아들이 그럴리가…

* * *

편의점 알바생이 푹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계산해 주세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승우를 쳐다본다. 말 없이 몇 초 적막, 그제야 일어나서 포스기를 잡는다.

아, 아무래도 옆에 있는 키오스크 쓰지 왜 깨우냐는 눈치다.

그는 꾸깃꾸깃한 현금을 내민다. 그제서야 알바생은 사정을 알겠다는 듯 이전의 태도를 지운다.

삐. 연천 생수 1000원 - 캐시 드로어를 꺼내 거스름돈 환전. - 영수증 필요하세요? - 예? - 영수증. - 아 괜찮습니다.

유리문 종소리. 밖으로 나선다. 그리곤 뚜껑을 따고 물을 들이킨다. 역시 운동하곤 시원한 물 마시는 게 최고야.

다시 집으로 들어오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후. 게임, 웹 서핑, 유튜브, 또 게임. 이것저것 정신없이 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갔다. 어느덧 저녁이 다 되었다.

엄마와 단둘이 밥을 먹는다. 둘이서도 충분한 저녁이었다.

그리곤 밤 산책을 나간다. 평소와 같은 루트. 지하1층 주차장으로 나와 단지 한 바퀴. 회갈색으로 뜬 하늘엔 별도 구름도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이에 우중충한 회색 아파트가 더해져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지 안에 있는데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대화나 TV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차가운 전등 빛뿐. 그 적막을 뚫고 아파트 옆 산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돌고 돌아 도로 쪽으로 나온다. 상가 거리.

“어? 승우야!”

엄마의 얼굴을 쳐다본다. 겁에 질린 표정. 그리고 엄마의 손가락.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곳.

“이거 언제 이렇게 된 거야?”

보도 블럭 위에 깨진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 있다. 고개를 들어 흔적을 쫓자 어느 건물. 박살난 유리창과 여기저기 검게 그을린 흔적.

다가가 본다. 1층 상가가 무언가에 들이받힌 듯이 어지럽혀 있었다. 차양은 찢겨져 있었고, 내부 진열대는 마구 부서져 있었다. 조명도 다 깨진듯 내부는 어둡게 내려앉았다. 천장 어디선가 튀어나온 전선에서는 아직도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옆 건물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 건물 윗층도 큰 타격이 없어보였다. 오로지 1층 상가 그것만을 목표로 한 것처럼.

그 초현실적인 풍경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이 상가, 아까 들렸던 편의점이다. 아까 연천 생수 하나 산 바로 그 상가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은 편의점이 아니었다. 겨우 몇 시간 전이었는데… 겨우…

그리고 알바생, 아까 그 알바생. 하지만 알바생이 서 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뒷벽에 지저분한 얼룩이 남았을 뿐이다. 아주 빨갛게…

이상하게도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난리가 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옆 건물 부동산 집 사장도, 미용실 사장도 몰랐다. 부동산 아저씨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고 미용실에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있을 때 굉음이나 비명 소리를 들은 것도 없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승우야, 뭐 하고 있어! 빨리 신고해야지. 신고.”

그가 사건의 시작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키보드가 타닥거린다.

[산에서 돈 주웠는데 이거 뭐냐.]

ㄴ야 이 병신아. 무당이 굿 할 때 쓴 돈인데 그걸 주워오면 어떡하냐. 보통 죄 지은 사람이 액운 떠넘길 때 저런 식으로 해. 그니까 저거 가져오면 그 사람 액운까지 뒤집어쓰는 거야. 이 병신아.

ㄴ산에 있는 돈 함부로 가져가면 클난다. 그냥 길가에 떨어진 거면 모르는데 외진 데 있다던가 봉투에 들어있고 불 피운 자국 있으면 빼박이야. 빨리 버리든가 해.

가슴이 죄어 왔다. 맞아, 맞아. 길가에서 떨어진 곳에, 낙엽 사이 봉투에 들어 있었어. 볼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그냥 들고 왔는데… 나 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구나.

근데 불 피운 자국?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 낙엽이 거무스레했던 게 썩은 게 아니라 태운 거였나.

젠장.

지갑을 열어 본다. 만 원짜리 아홉 장이 들어 있다. 흙과 먼지가 눌러붙은 지폐들, 하도 구겨졌는지 너덜너덜하다.

원래는 열 장이 있었다. 그 산에서 열 장을 주웠다. 그런데 한 장의 만 원은 지금…

[속보) 연천군 한 아파트 상가에서 흉기 난동… 경찰, 용의자 수색 중]

저기 있다. 저 편의점에서 써버렸다.

그런데 흉기 난동? 아니야. 저건 흉기 난동이 아냐. 그럼 어떻게 불 난 자국이 나. 그것도 딱 그 건물 하나만 그을렸어. 아니야, 그게 아니야.

뒷목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괜히 주웠다. 괜히 주웠어. 젠장… 주먹을 꽉 쥔다. 손바닥에 초승달 자국이 새겨진다. 입술도 잘근 잘근 씹어본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 어떡하지. 그냥 찢어 버릴까. 아니면 빨리 버려야 되나.

ㄴ다들 착각하는 게 있는데 찢거나 아무데나 버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 한 번 주은 이상 일단 그 액운은 본인이 다 뒤집어 씌는 거임. 그니까 누군가한테 다시 떠넘기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미쳤다고 누가 그 돈을 가지겠어.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한숨을 내쉬는 순간 대댓글이 눈에 들어온다.

ㄴㄴ지랄하네 ㅋㅋ 액운이 어떻고 저떻고 그런 게 어딨어. 정 찝찝하면 걍 ATM기에 넣으셈. 그 현찰만 남한테 떠넘기면 되는 거잖아?

떠넘긴다… 그 순간 한 장면이 스쳤다. 그래, 편의점에서 알바한테 만 원을 주자 그는 캐시 드로어에 넣었다. 그때 액운이 거기로 간 거야. 나한테 가야 할 액운이 알바한테 간 거야.

만약 나한테 왔으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이 핑 돌았다, 현기증. 가야 한다. 그래, ATM기를 쓰든 해서 빨리 바꿔와야겠다. 지금 안 갔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는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카드와 돈을 챙겼다. 그리곤 조심스레 집 밖을 나섰다. 나설 때도 밖에 괴한이 있는지 조심스레 살폈다. 엘리베이터. 아니 너무 위험해. 계단으로 간다. 센서등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며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간혹 센서등이 꺼져 완전한 어둠 속에 갇힐 때면 심장이 요동쳤다. 계단 위에서 괴물이 쿵쾅대며 내려올 것만 같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주머니에 넣어둔 조그마한 칼을 붙잡았다. 아니면 그 옆에 있는 십자가. 뭐라도 붙잡아야 마음이 풀렸다.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어둑어둑한 도로가 펼쳐졌다. 인적 없는 거리. 아파트 조명도 하나둘씩 꺼져간다. 도로 쪽으로 나오니 상가 거리. 아까 그 건물. 이젠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건물 앞을 지키고 있었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건물엔 폴리스 라인이 잔뜩 쳐져 있어 살인 현장의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그런데 호기심에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

그 너덜너덜한 지폐. 알바생을 죽게 만든 그 만 원짜리 지폐가 보도블럭 가장자리에 꽂혀 있었다. 캐시 드로어에 있어야 할 그것이 왜 여기에, 마치 유혹하듯이. 순간 세종 대왕이 빙긋 웃는다.

황급히 눈을 돌렸다. ATM기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 그러니까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된다. 신호등 불도 꺼졌으니 기다릴 필요도 없다. 4차선 도로 하나만 가로지르면 되는데, 그거 하나면 되는데…

텅 빈 도로, 그 위엔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아무 차도 없었다. 그런데 섬뜩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건너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트럭이 달려와 온 몸을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았다.

결국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다. 차량 진입을 막는 말뚝 뒤에 숨어 계속 머뭇거렸다. 하지만 경찰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이윽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매만졌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텅 빈 밤공기를 울렸다. 큰 마음 먹고 횡단보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육중한 물체가 눈앞을 스쳤다. 기척도 보이지 않던 트럭이 어디선가 나타나 쌩 하고 지나가버렸다.

뒤를 돌아 경찰을 살폈으나 못 봤다는 눈치였다.

그 순간 왠지 모를 용기가 솟아났다. 아니 용기라기보다는 발악 비스무레한 것이었다. 눈을 꾹 감고 무작정 달렸다. 귓가에서 육중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환청이 이상하게도 무척 감미롭게 들렸다. 온 몸에 힘이 축 빠지면서, 제발 안돼! 제발……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해맑게 묻는다. 이젠 그도 해맑은 표정이다.

“아 산책 좀 더 하려고.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그의 뒷목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 * *

[LS은행, 내부자 거래로 천문학적 손실 입고도 숨겨…]

[LS은행, IMA 사업자 지정 물거품… 일각에선 상장폐지까지 전망]

멍한 표정으로 승우는 뉴스를 쳐다본다. 이제 그에겐 지폐라곤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전부 ATM기에 때려 박고 LS은행 예금으로 바꿔버렸다.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모른다. 고작 몇 초 뒤 기계가 폭발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도 다친 건 없다. 이젠 그 돈으로 게임 스킨을 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액운이 강했으면 돈을 넣은 기업까지 파멸할 정도일까. 하여간 굿 한 사람도 죄를 많이 짓긴 한 모양이다. 만약 사람한테 줬으면 끔찍하게 죽었을 거다. 알바생이 그랬듯이… 그리고 나도…

그 순간 편안했던 마음이 다시 초조해졌다. 그날 저녁 일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정말 섬뜩했다. 자칫 하다간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는 뭔가 야릇한 생각이 하나 스쳤다.

그러자 모든 공포는 사라지고 되려 흥분이 일었다. 그 돈을 사람한테 주면 죽는다… 사람한테 주면 아주 끔찍하게 죽는다… 그 액운을 다 돌려받는다…

승우에겐 죽여야 할 놈이 있었다. 찢어발기고 마구 짓밟어야만 하는 놈이 있었다. 딴 여자랑 바람 나놓고 가정은 내팽겨쳐 버린 그놈. 말로 타이르고 법정까지 불러내도 양육비라곤 한 푼도 주지 않고 버틴 그놈. 간혹 찾아와서는 아빠 노릇 하려고 난리치던 그놈. 학부모 참관 수업 때 찾아와서는 자기도 부모라고 남들 앞에서 행패 부리던 그놈. 아직도 내 이름의 성(姓)에 박혀 있는 그놈.

엊그제 보도블럭에 끼어 있던 만 원… 유혹하듯 팔랑이던 만 원… 인자한 세종 대왕의 얼굴…

그의 얼굴에 한 줄기 쓴 웃음이 번졌다.

* * *

“아빠, 나 승우야. 한승우.”

“아들? 왠일이야. 아이구, 오랜만에 아빠라고 부르고 정말 가슴이 뭉클하네. 그래, 학교는 잘 다니구?”

“응. 그런데 아빠…”

“응?”

“나 오랜만에 아빠랑 밥 한 끼 먹고 싶어. 늘 엄마랑 둘이 먹으니까 좀 허전하네.”

제발 받아라, 받아라…

“아 좋지! 그래. 집 근처에서 볼까.”

신형 차 한 대가 상가 앞에 주차한다. 보내줄 줄 돈 없다더니.

“어이구, 승우야. 여기 불 났나 보네.”

“어, 뭐 흉기 난동 같은 게 있었대. 아빠, 저기 저 집에서 먹자.”

길 건너편 중국집을 가리킨다. 그 앞에서 ATM기가 폭발했었다. 하지만 그 잔해는 이미 누군가 치워버렸는지 감쪽 같이 사라졌다. 그놈은 회한에 젖은 듯 중국집만 멍하니 바라본다.

“너 갓난아기 때 저기서 엄마랑 자주 밥 먹곤 했었지.” 그리곤 움찔하더니 “아 그건 혜숙이… 아니다, 아니야. 큼큼. 어쨌든.”

어쨌든 상관 없다. 그놈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틈을 타 보도블럭에서 지폐를 집어 든다. 왠지 이 구질구질한 지폐가 오늘은 친구가 된 것만 같다. 접어서 주머니에 넣는다.

이상하게도 횡단보도가 어느 때보다도 안전해보인다. 손에 지폐가 들려 있는데도 그냥 보내줄 것만 같다. 지난 저녁과는 정말 느낌이 다르다. 한승우는 쾌할한 표정으로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화장이 진한 주인 아주머니. “아유, 오랜만이네! 그땐 여자분이랑 자주 오시더니 아내분이셨나봐? 요건 아드님이구?”

“큼큼. 크흠흠. 아줌마, 자장면 두 개 부탁드려요.”

그놈은 물을 따라주고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앉았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그 잘난 코에도 주름이 꼈다. 머리는 듬성듬성해졌다.

“승우야. 아빠가 잘못한 거 많이 안다. 그래, 내가 아비 노릇 못 한 거 많이 알아. 그래도 난 말이야… 마음 깊숙한 곳에서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응? 알지? 그니까 너만 괜찮다면 다시…”

“아빠!” 화가 치밀어오른다. 준비해 온 말도 다 까먹을 정도다. 입술이 덜덜 떨린다. “아빠… 음… 제- 제가 드릴 게 있어요. 아빠한테 드릴 게 있어요.”

“오 그래?”

너덜너덜한 만 원을 꺼내든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너무 더럽게 느껴진다. 아까의 신비스러운 기운은 모두 사라졌다. 세종대왕의 미소도 빛을 잃었다.

“에이, 이게 뭐야. 장난하는 거야?”

“아- 아니… 아빠, 아니에요. 이게 아닌데… 죄송해요.”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곤 계속 만지작 만지작. 줘야 하는데, 빨리 주고 도망가야 하는데… 초조해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놈은 말이 너무 많다.

“아빠가 말이지. 요즘엔 일이 잘 풀리거든? 흐하하. 요샌 돈 좀 만진다. 이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승우 챙겨줘야지. 응? 옷도 사주고 가방도 사주고 다 할게, 하하하하.”

“아빠…” “승우야! 남자란 말이야.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밀어붙여야 돼. 응? 사랑도 일도 전부 그런 거야. 아빤 인생에 후횐 없다. 인생에 후회 없어. 아줌마 소주 한 병 주세요!”

그놈의 더러운 입에서 침이 마구 튀어나온다. 이런 놈한테 걸린, 불쌍한 우리 엄마.

“승우야, 어디 보니! 아빠 봐. 대화해보니까 너랑 나랑 말이 잘 통하지 않니? 역시 부자끼리는 통하는 거야. 흐헤헤. 앞으로 자주 보자. 자주 봐, 응?”

그 더러운 눈을 피해 테이블만 쳐다본다. 면발만 후루룩 들이킨다. 그리고 그릇을 다 비웠을 땐 물만 벌컥 벌컥 마신다.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어지럽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간다. 하늘이 점점 어둑해진다.

이러다간 나한테 그 액운이 찾아올 것만 같다. 짓밟히는 건 그놈이 아니라 나다. 치이고 밟히고 뜯기고 찔리고 타오르는 건 나다. 젠장, 내가 죽게 생겼다.

시선을 돌려 꼬깃꼬깃한 만 원을 쳐다본다. 이제는 세종대왕의 웃음이 비웃음으로 보인다. 날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게 보인다.

그리고 들려온다. 저번 밤의 그 환청이.

“아빠! 아빠… 저- 저…” 서둘러 지폐를 꺼낸다. 쓰레기가 되기 일보 직전의 지폐를. “이거 받으세요. 예? 이 돈 받아요. 이거 받으세요.”

“응? 무슨…”

“제발… 받아주세요. 제가 아빠한테 드리는 마음이에요. 그니까 받아주세요. 그리고 저는 화장실…”

“야! 이 놈의 자슥이! 지금 뭐하는 거야. 아빠한테 이 더러운 돈 먹고 떨어져라 이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환청. 육중한 기계음. 다가온다, 점점 다가온다.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이에요! 처음으로 땀 흘려서 번 돈. 그저 아빠한테 드리고 싶었어요. 흙이 묻은 건 도중에 넘어져서 그런 거에요. 그니까 제발… 제발 받아주세요. 예?”

그놈의 입가에 이상야릇한 웃음이 발한다. 그리곤 정색. 승우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시선을 붙잡으려 애써보지만 별 소용 없다.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그의 팔이 승우의 손을 꽉 움켜쥔다.

“...흐하하. 우리 승우. 다 컸네, 다 컸어! 그래. 이런 수작 부리면 아빠가 모를 줄 알았지?”

젠장, 이러면 안되는데…

“승우야. 이거 일해서 번 게 아니고 뺏은 거지? 어디 친구 놈 패고 뺏어 온 거지? 안다, 알아.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

거칠고 주름진 손이 승우의 손을 더듬는다. 환청이 비가 개듯이 사라진다.

“자, 이건 아빠가 고이 간직해두마. 한승우 드디어 어른이 되다! 하하.”

자 이제 나가라. 나가서 죽어라. 아주 처절하게 죽어라. 그 혀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죽어버려라.

계산을 마치고 그놈을 배웅한다. 그러면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노력한다. 그놈, 그놈의 바지 주머니, 그 놈의 지폐로부터 떨어지려 노력한다. 이제 횡단보도까지 거의 다 왔다. 먼저 가라. 먼저 건너가서 죽어버려라.

“아 승우야.”

그놈의 목소리가 상상을 파고든다. 순간 놀라 멈칫한다.

약간 찡그린 표정

“승우야… 무슨 소리 안 들려?”

* * *

“쾅… 그렇게 된 거죠.”

“이야. 남의 액운을 갖다가 자기 원한 푸는 데 쓰다니. 참 희한한 놈일세.”

노인이 미세한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조차 신비한 기운이 감돈다.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도대체 왜 절 찾아오신 겁니까.”

“그거야 자네가… 내가 하려던 일을 완전히 망쳐놨거든.”

“예?”

“자네가 가져간 돈이 누구 건지 아나?”

“누구 건데요?”

“그게 그 유명한 장독구 회장이야. 장독구 회장. 한 번쯤 신문에서 본 적 있을 거야. 노동착취에 횡령에 성폭력, 방화에 뺑소니까지 뭐 안 저지른 게 없는 사람이지. 그런 인간이 죽고 나니까 자식들이 무서워서 날 찾아왔다니까. 제발 액운 좀 막아달라고. 하도 사정하길래 돈까지 써가며 굿을 했는데…”

“방화요? 그리고 뺑소니요? 그렇다면 그 액운이라는 것이…”

“그래.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그대로 돌려 갚는 거야. 그 액운을 내가 굿 해가지고 겨우 싸맸다고. 그런데 우리 어린 친구가 그 액운을 가져가 다른 사람한테 뿌렸으니 이 사단이 난 게 아니겠어?”

“...죄송합니다.”

노인이 갑자기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곤 한동안 입을 다시더니 말을 꺼낸다.

“그런데 말이지. 자네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액운은 그 돈을 지금 갖고 있는 사람한테 가는 게 아냐. 한 번이라도 돈을 만진 사람은 무조건 액운을 받게 되어 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예? 하지만 저- 저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요? 심지어는 지금 몇 달이 지났는데도요.”

“흠… 그것도 참 희한한 일일세. 내가 이 생활을 30년 해봤지만 그런 경우는… 어쨌든 이 어린 친구.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게.”

그렇게 무당은 떠났다. 승우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액운, 액운이라… 지난 몇 달간 개똥도 몇 번 밟고 또 친구랑 싸우기도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평범한 삶이었다. 뭐 친아빠가 죽기야 했다지만 그건 사실 비극도 아니다.

그때 갑자기 쎄한 느낌이 스쳤다. 혹시라도 놓친 게 있나? 다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구글에 들어가 검색 - 장독구. 뉴스란에 들어가자 그의 수많은 악행이 쏟아졌다. 계속 손가락을 놀렸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렀을 줄이야.

그러나 그의 악독함에 감탄하며 다섯 번째 페이지에 들어선 그때, 그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DG산업, 연천 공장서 수십년간 페놀 대량 방류…]

[연천 생수에서 유해 화학물질 검출… 검찰, 장독구 회장 구속 기소]

물, 물… 이거였구나…

시야가 핑 돌고 현기증이 일었다. 모든 게 어지러웠다. 그러나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이미 길 건너 멀리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팔을 뻗어보았다.

그러나 구겨진 지폐처럼, 이내 쪼그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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