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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밖에 나가지 마시오 part.18

익명
2026-10-18 03:55

“으음…….”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분명 꿈을 꾼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찝찝한 마음을 애써 떨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약간 쑤시기는 하지만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었다. 아저씨와 남자는 벽 쪽에 대충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은혜가 죽은 듯이 누워 있다.

“후.”

숨을 크게 내쉬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틈 사이로 언뜻 보이는 밝은 빛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날이 밝았다. 창문을 열어 공기를 마시고 싶지만 참기로 했다. 괴물들이 모여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흐음.”

남자가 자는 모습은 함께 지내는 동안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항상 은혜 곁에서 시중을 들면서 일체 잠도…… 아니, 마음 편히 쉬는 꼴을 못 봤다. 그런 남자가 벽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다니…… 점점 사람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인가?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최근 남자는 부쩍 쉬는 시간도 많아졌고, 먹을 것 역시 자주 챙겨 먹곤 했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 이 근처가 아니라면 좋겠는데. 뭐, 안전한 곳에 있으니 아저씨와 남자가 왔겠지.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합류할 생각이나 하자. 그리고 은혜가 빨리 일어나기를 기도하자.

“으음…….”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아저씨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역시 은혜의 상태를 살피는 일이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에 아저씨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를 보았다.

“고생하셨어요.”

“그래.”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아저씨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소총과 대검을 점검했다.

“쓸 만 할 거야.”

아저씨는 대검을 건네며 말했다.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 들고 대충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파이프보다는 사거리가 짧지만 확실히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무기였다.

“바로 출발할건가요?”

“그래야겠지.”

“다들 어디에 있어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그나저나 전에 봤던 학생들은 어찌 되었나?”

아저씨는 나와 은혜가 겪었을 일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많은 괴물들을 혼자 헤쳐 나가진 못했을 거야. 아마 타인의 도움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곳에 얼마나 많은 생존자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건 그 때 보았던 학생들 밖에 없었어.”

“……떠나갔어요. 괴물들에게 쫓겨서.”

“그렇군.”

그 중 한 놈이 괴물이 되어 은혜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는 말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저씨는 우리 외에 생존자들 모두를 의심하며 냉정히 뿌리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다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선량한 사람들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은혜…… 괜찮을까요.”

아저씨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은혜 얘기를 꺼냈다.

“아니, 더 두고 봐야해.”

“그렇군요. 아, 아래 있던 괴물들은 다 처리한건가요?”

“우리가 왔을 땐 이미 없더군.”

그 정도로 시간이 흐른 건가? 그렇다면 밖은 아직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짧게 생각을 하는 도중 남자도 몸을 일으키고는 은혜를 살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람과 똑같아서 잠시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지. 진성군 자네가 은혜를 업고가게.”

“네.”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은혜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은혜를 안아 올려 내 등에 조심스럽게 올려줬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어 내 몸과 은혜의 몸을 단단히 동여맸다.

“은혜야…….”

가볍다. 너무 가벼웠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거리를 활보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두르지.”

아저씨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남자 역시 그 뒤를 따르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서두르는 편이 좋아. 낮이라고는 하지만 괴물들의 수가 월등히 많은 지역이니까 위험해. 두 사람을 따라 재빨리 이동하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동.

문이 열리자 역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어젯밤 사이…… 아니,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아니다. 신경 쓰지 말자. 지이잉. 순식간에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자동적으로 침묵했다. 다섯 정도의 괴물 놈들이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있었다. 희미하지만 먹이의 냄새를 맡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지나갈 것인가? 전부 처리할 것인가? 아저씨라면……?

아저씨도 선뜻 나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는지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주저 없이 내 허리춤에 있는 대검을 꺼내 괴물들에게 다가갔다.

푸슉. 푸슈슉.

괴물들의 머리를 꿰뚫고 나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환한 햇빛과 선선한 공기가 기분을 좋게 해줬다. 폐 속에 공기를 밀어 넣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제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는 작은 핏자국들과 검은 털들이 여기저기 뜯겨져 있었다.

“15분정도 걸어가면 되네. 힘들면 얘기하고.”

“네.”

사주경계를 하며 빠르지만 조용히 이동했다. 남자는 내 뒤에 바짝 붙어 주변을 경계했다. 가끔 건물 틈새로 생명체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아침이라 큰 움직임은 없는 상태였다.

저벅. 저벅. 저벅. 거리에는 세 사람의 발자국을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그 많던 놈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하루 만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단 말인가?

“…….”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때까지 봤던 놈들의 습성을 보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활보하는 놈과 매복하고 있는 놈들. 분명 어디선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15분이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도 같지만 저 건물에서 나온 지 오 분도 안 된 시간이다. 후…… 긴장하지말자. 나까지 이런 마음으로 임하면 아저씨와 남자에게 폐를 끼칠 수가 있어. 빠르게 걷자. 그러면 된다.

“……크.”

그러나 내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었다. 제기랄. 상가 건물 틈 사이에서 진홍색의 눈을 가진 녀석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가 거리를 서서히 메우기 시작한 놈들은 곧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으으.”

"크으으……."

아저씨와 남자가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어제보다 수가 훨씬 많았다. 어디서 이렇게 불어나버린 것일까. 게다가 타이밍과 수가 너무나 체계적이었다. 설마? 설마!

“……아저씨?”

“정말 운이 없군. 서두르게.”

다행인 점은 녀석들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예전처럼 동료를 뜯어먹고 우리들을 쫓아 왔다면 힘든 싸움이겠지만,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너무 체계적이에요. 이건 분명…….”

순간 태성이 놈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두머리로 변해버린 녀석은 거침없이 나를 날려버리고 은혜를 탐했다. 하지만 놈은 인간으로 돌아왔고 내게 치명상을 입은 채 괴물들에게 당했다.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잠깐…… 설마?

“어딜 가시나.”

그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빠르게 이동하는 우리 앞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들에게 큰 상처를 입은 모양인지 몸 여기저기가 깊게 패여 있었다. 아니, 거의 뜯겨져 있었다.

“너…… 너.”

그런 꼴로 잘도 움직이고 우리 앞에 나타나다니. 쉽게 죽지 않은 것인가…… 상황이 너무 안 좋다.

“아는 사이인가?”

아저씨의 물음에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바로 저 놈이 은혜를 이렇게 만든 괴물이라고 한다면, 아저씨는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것이 뻔했다.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

“아뇨. 전혀요…….”

아저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태성이 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짓말이 들통 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자세한 얘기는 가서 듣지.”

아저씨는 의외로 침착했다. 작게 숨을 내쉬며 소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태성이 놈은 여유 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환하게 빛났다. 확실히…… 남자와는 다른 구석이 있다.

“그쪽은 이미 시작됐다.”

“!!”

어느새 괴물 놈들이 우리 뒤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크으으…….”

녀석들은 비틀거리는 꼴로 우리를 보며 손을 뻗었다. 어쩔 수 없이 길게 뻗은 상가거리 앞으로 걸어갔다. 태성이 놈은 그런 우리를 보며 교활하게 웃었다.

“키햐햐햐! 유감이야. 그렇지?”

나를 보며 웃던 태성이 놈은 돌연 남자를 빤히 보더니 놀라운 얼굴로 말했다.

“나와 같은 놈인가? 끌끌끌.”

제길…… 어째서 저놈은 저렇게까지 운이 좋은 것인가. 분명 괴물 놈들에게 습격을 받았을 텐데 어째서…….

“대량의 백신을 흡수한 결과인가.”

아저씨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군. 피를 많이 흘린 은혜는 어제와 같은 상태로 일어나지 못하는 거고, 저 놈은 그 은혜의 영향으로 남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거군.”

“그 년만 있으면 우리 모두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태성이 놈은 입 꼬리가 올리며 말했다.

“기회를 주지. 그 년을 놓고 가라. 그렇다면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마.”

그 말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린 은혜를 지키며 생존해왔다.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좋다.”

“?!”

아저씨……? 분명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왜?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예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봤지만, 아저씨의 시선은 태성이 놈에게 꽂혀 있는 상태였다. 남자 역시 적잖게 당황한 듯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역시 어른 놈들은 말귀가 통해서 좋아. 아,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오도록 해.”

태성이 놈은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뒤에 있는 수많은 괴물 놈들이 금방이라도 우리를 덮칠 기세였다. 막다른 길…… 더 이상의 퇴로는 없는 것인가.

“아저씨 말도 안돼요. 설마…… 은혜를 저 놈에게 넘기는 건 아니죠?”

“…….”

아저씨는 묵묵히 등에 업힌 은혜를 들어 태성이 놈에게 다가갔다. 마, 말도 안 돼. 은혜야! 자동적으로 몸이 튀어나갔다.

“아저…….”

하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에 의해 몸이 멈춰버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가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너까지 이러면 은혜를…… 난 은혜를…….”

“조용히.”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시선을 따라 아저씨의 뒷주머니를 바라봤다. 대검. 남자 손에 들려 있던 대검이 어느새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그렇다면……?

“큭큭크.”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성이 놈은 음흉한 얼굴로 은혜를 바라봤다. 아저씨는 그 단순한 면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과연 냉철한 상황 판단력은 아저씨가 나보다 훨씬 위였다.

“좋아. 좋아.”

어느새 태성이 놈 앞에 선 아저씨는 은혜를 선뜻 내어주지 않고 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태도에 안달이 난 놈은 양손을 뻗어 은혜를 받아 들려 했고, 아저씨는 가볍게 은혜를 넘겨주었다.

“키…… 킥킥…….”

태성이 놈은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 희열과 쾌감을 주체할 수 없는지 이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그것이 놈의 최대의 실수이자 허점이었다.

푸욱.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상당했다. 날래고 박력 있는 동작으로 녀석의 귓구멍에 대검을 쑤셔 넣은 아저씨는 크게 돌려 차기를 한 후 녀석을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리고는 은혜를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끼아아아악!”

폐부를 지르는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태성이 놈은 고개를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와 동시에 괴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억!”

남자는 나를 안고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타악. 탁. 두어 번의 도약으로 꽤 멀리 떨어질 수 있었다. 남자는 바로 나를 내려놓고는 괴롭게 몸을 꿈틀대는 태성이 놈에게 빠르게 뛰어갔다.

태성이 놈은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뽑아냈다. 하지만 남자의 행동이 더 빨랐다.

철컥.

빠르게 조준간을 맞춘 남자는 태성이 놈의 대가리에 총알을 퍼붓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엄청난 소음과 함께 녀석의 비명이 점차 작아져 갔다. 남자는 경련을 일으키며 꿈틀대는 모습을 잠시 보고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빨리 움직여야한다.”

“아, 알았어.”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어느새 점이 되어버린 아저씨의 뒷모습을 빠르게 쫓아갔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놀라긴 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크아아아!”

그렇다고 영 좋은 일은 아니었다. 태성이 놈을 뜯어 먹은 몇몇 괴물들이 우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서.”

그 짤막한 말과 동시에 남자는 몸을 돌려 총알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큭…….”

당장 남자를 도와 은혜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내 손에 들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의 총알에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아아!”

양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헉. 헉헉.”

뒤를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공포가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경험을 하고 왔음에도 왜 중요할 때 이러는 것일까. 도대체 왜……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휑한 양손 때문일까.

“크아아아!”

아저씨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달려가 있는 상태였다. 진퇴양난. 그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 침착해라.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주변 지형을 이용하면 돼. 일단 남자를 믿고 아저씨와 빨리 붙는 것이 우선이야.

허나 상가거리는 꽤 컸다. 넓고 좁은 골목길 사이에서 스멀스멀 나온 괴물 놈들은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길.”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죽어라 달려 나갔다. 허억. 헉.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저씨의 흔적 때문인지 쭉 뻗어진 상가 거리에 괴물 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크으으.”

저 거리를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다행히 골목길 사이사이가 이어져 있어 도달하는데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목숨까지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으드득. 이를 강하게 악물고 다른 골목길로 빠졌다. 중간 중간 다가오는 놈들이 있었지만 느린 동작 탓에 따라오지는 못했다. 좋아.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돼.

“허억 헉헉.”

상가 골목을 누비는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미 체력은 바닥을 기는 상황이었다. 정신력으로 극복한다고는 하나 놈들과 마주친다면 완전히 대처해낼 수가 없었다. 쇠파이프를 버리고 온 것이 너무 후회됐다.

“후우…… 후우.”

나를 노리는 놈들을 따돌리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얼마나 달려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난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정도로 내 명줄은 짧지 않다.

마침내 두 다리가 풀릴 때쯤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안전하게 숨을 곳은 찾으면 됐다.

“허…… 억.”

저벅 저벅. 숨을 천천히 고르며 발소리를 줄였다. 차분히 내 몸을 숨길 곳을 골랐다. 수많은 빌딩들과 빼곡하게 들어찬 간판들을 대충 훑어봤다. 최대한 높은 곳에 가야 했다.

“크르르.”

여기까지인가. 어둠 속에서 낮게 울리는 소리에 몸에 힘이 빠졌다. 털썩.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크르르…….”

칠흑 같은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온전히 변화한 놈이었다. 녀석은 붉은 진홍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녀석의 상태를 관찰했다. 다른 놈들에 비해 상당히 깨끗했다. 입가에 묻은 핏자국도 상당히 오래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후우…… 후우.”

두근거리는 심장이 ‘빨리 일어서.’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몸에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곧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괴물 놈이 낯설지 않을까.

지척에 다다른 놈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의외였다. 배고프지 않은 건가? 혹시 놈도 우두머리와 같은 부류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녀석을 바라봤다. 녀석은 낮게 울며 그대로 내 옆을 지나갔다.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낮은 발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한 발. 한 발. 확실히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고개를 돌려 놈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살짝 고개를 돌린 놈은 나를 한 번 보고는 이내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왠지 모르게…… 아!”

그 녀석이다. 그 괴물 놈이 틀림없다. 처음 동료들에게 쫓기면서 내 도움을 받았던 그 놈. 좁은 창문 틈 사이로 눈이 마주치면서 멀리 도망치던 놈. 우리의 뒤를 따라다니며 목숨을 이어오던 그 놈이 틀림없었다. 그땐 찰나의 순간이라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저 눈은…… 그래, 그 놈이 확실했다.

“하지만 어째서…….”

나를 뜯어먹지 않고 가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말 남자의 말대로 고마움을 표하는 것일까.

“……아아아!”

희미하지만 괴물들의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멍하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지만 상황이 급박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코를 찌를 듯한 강한 악취와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크우아!”

바로 근처. 가깝다. 이쪽으로 바로 온다면 들킬 위험이 컸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온다. 발소리가 상당히 가깝다. 놈이 눈치 채면 바로 끝이다. 제길! 당장 바닥에 몸을 뒹굴며 끈적끈적한 액체와 지독한 냄새를 뒤집어썼다. 이거면…… 놈도 그냥 지나쳐갈 것이다.

“우욱!”

위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위액을 간신히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바로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놈이 아니었다. 어느새 여러 놈으로 불어나 있었다. 크게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듯 발소리가 유독 소란스러웠다.

“크르…….”

한 놈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놈은 바닥에 깔린 액체와 작은 덩어리들을 입에 처넣기 시작했다.

으적. 으적.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놈은 바로 근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내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저 상태로 바닥에 있는 것들을 먹기 시작한다면 곧 내게로 올 것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었다.

“크르. 크르르.”

이내 한 놈이 더 들어오더니 바닥에 있는 것들을 손으로 집어내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상당히 거슬렸는지 식사를 하고 있던 놈이 낮게 울며 경고 표시를 보냈다. 하지만 서로 배가 주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집어낸 덩어리들을 입에 가져갔다. 그것이 기존에 있던 놈의 신경을 건드렸다.

“크아아!”

두 괴물들은 서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지금이다. 놈들의 괴성이 이어지는 동안 조심히 움직였다.

“후…….”

천천히 걷자 붉은 색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1’ 이라고 쓰여 있는 익숙한 숫자였다. 그러나 괜한 관심을 끌고 싶지 않다면 이용하지 말아야 했다. 대신 길게 뻗은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쭉 걷자 녹색 비상구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걸어가 살짝 열려 있는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끼이익-

낡은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자 건물 특유의 냄새가 났다. 살짝 몸을 내밀어 앞을 살폈다. 위로 뻗은 계단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 일단은 성공이야. 다시 문을 잠근 후 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긴장한 탓에 숨이 가빠졌다. 천천히 심장을 진정시키며 바닥에 앉았다. 희미하게 나는 악취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봤다.

"제길.."

내 몸에서 나는 악취였다. 혼이 빠져 방금 전의 행동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앉아 있으니 문득 추위가 느껴졌다. 온 몸을 가득 적신 특유의 액체 때문에 급속도로 체온이 뺏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냄새는 참을 수 있었지만 차가운 한기는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다시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우.”

천천히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웠던 괴물들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둘 중 한 놈은 죽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놈들의 동향도 변화하고 있다. 놈들도 벼랑끝에 몰릴 상황일 것이다. 정해진 식량의 양이 서서히 고갈되어 가고 있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것은 보류해야 했다.

저벅. 저벅.

조금 올라가자 굳게 닫혀 있는 문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혹여 놈들이 있으면 큰일이다. 처음 이 건물로 들어올 때도 예상치 못한 놈의 등장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조심하자. 살짝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낡은 쇳소리가 달팽이관을 살살 긁어댄다. 절로 마른침을 삼키며 시야를 크게 확보한다.

“…….”

긴 복도와 늘어져 있는 간판들이 눈에 보였다. 일단은 깨끗하다.

문을 닫을까 열어둘까. 일단은 닫아두자. 자아, 천천히 이동하는 거야.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거야. 여섯 발자국 앞에 불이 꺼진 간판이 보였다. 유리를 통해 가만히 안을 바라봤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혹시…… 괴물들일까? 아니면 단순히 죽은 사람들일까?

꿀꺽.

침을 삼키며 잠시 망설였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지내려면 괴물들의 존재를 알아내야 했다. 다른 곳에 숨어 있다고 해도 나를 찾아낼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된다. 중요한건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만,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래. 난 아직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 이거라면 컴컴한 공간에서 놈들도 날 쉽게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앞으로 가자.

철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죽어있는 상태였다. 그 기간이 꽤 됐는지 상당히 많은 구더기들이 시체를 점령한 후였다.

“제길.”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음식점인 것 같았다. 수많은 테이블들이 있었고 차마 치우지 못한 음식들이 썩어 있었다.

조금 이동해 주방 쪽에서 쓸 만한 것들을 챙겨야겠다. 최소한의 무기라도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왼쪽으로 뚫린 길을 따라 가보니 작은 주방이 보였다.

위이잉-

썩어가는 음식들 위에 파리 떼가 가득했다. 가볍게 손을 저어가며 여러 선반과 테이블들을 뒤졌다. 곧 하늘이 도왔는지 음식물 근처에서 날카로운 주방용 칼을 발견했다.

“저거다.”

오래 쓰지 않아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대강 닦아 내고서 두 개의 칼을 집고 주방을 나섰다. 싱싱한 먹잇감을 발견한 파리떼들의 공세가 시작된다. 녀석들도 필사적인 것 같다. 조금 강하게 손을 저어 파리 떼를 쫓으며 음식점을 벗어났다.

저벅. 저벅.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또 다른 간판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 술집 같았다. 일단 씻기로 했다. 악취도 악취지만 체온을 급격하게 떨어트리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기라도 걸린다면 놈들에게 발각되는건 시간 문제나 다름없다. 슬며시 술집 문 앞에 붙어 안을 살폈다. 어둡지만 꽤 깨끗한 것 같았다.

딸랑. 딸랑.

천천히 문을 열자 방울소리가 들렸다. 후우. 숨을 고르며 몸을 비틀었다. 발부터 시작해서 손까지 자연스레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깨끗한 곳일수록 위험할 수가 있다.

이곳 역시 수많은 테이블과 카운터가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 주방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었다. 20개가 조금 넘어 보이는 테이블을 지나 안쪽에 위치한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꼬로록. 자연스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방 안에 있는 것들이 꼭 필요했다.

“……으.”

괴물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를 통해 느껴지는 것은 놈이 꽤 약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였다. 한 놈이냐 두 놈이냐의 차이는 천지 차이라 일단은 잠시 대기해야 했다.

“으…… 으.”

이 소리는? 작지만 뭔가가 흐르는 소리였다. 물?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크게 심호흡을 하며 양손에 쥔 칼을 굳게 잡았다.

뭔가가 내 발목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푸르스름한 손이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색의 무언가가 순식간에 튀어 나왔다.

“캬아악!”

워낙 빠르고 날쌘 몸놀림이라 녀석을 단번에 제압할 수가 없었다. 남은 반사 신경으로 양손에 들린 칼을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뒤다. 검은 색의 놈은 테이블 위에 낮게 앉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색의 선홍색 눈과 군데군데 뒤덮인 빗자루 같은 털들은 괴물이 확실했다. 하지만 작아도 너무 작았다.

“후우…… 후우.”

놀랜 심장을 다독이며 칼을 앞으로 겨누었다. 괴물 놈 역시 가만히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어린애였다. 저 정도의 체구라면 6~7살은 되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모를 때에 당해버린 것 같았다.

“캬르르르.”

“제기랄…….”

정신 차려. 놈은 인간이 아니야. 이를 악물고 칼 손잡이를 꽉 쥔다. 이건 생사를 건 싸움이다. 일말의 동정은 하등 필요가 없다. 곧 놈은 몸을 잔뜩 구부렸다. 그대로 도약할 기세다.

“와라.”

내 소리가 신호가 됐는지 놈은 크게 뛰어올랐다. 침착하게…… 직선으로 떨어지는 놈의 머리를 노렸다. 칼을 강하게 쥐었다.

“!!”

제길! 바짓가랑이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악력에 조금이지만 몸이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찰나의 순간 휘청이는 몸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크르르르.”

긴 생머리를 한 괴물 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자기네들이 이겼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질까보냐 망할 괴물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하앗!”

다행인 점은 내 바짓가랑이를 잡은 괴물 놈의 힘이 상당히 약하다는 것이었다. 왼손에 들린 칼을 아래쪽에 있는 괴물의 대가리에 그대로 쑤셔 박으며 옆으로 굴렀다. 콰직! 소리와 미세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캬악!”

목표물을 잃어버린 작은 괴물 놈은 바닥을 꼴사납게 굴렀다. 이때다!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아!”

작은 괴물 놈은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후웅. 바람소리가 들리며 몸이 앞으로 급격히 쏠렸다. 쿠웅!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끄윽!”

가슴팍에 느껴지는 고통에 잠시 머리가 멍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죽은 줄 알았던 괴물 놈이 내 다리를 잡고 있었다. 경련을 일으키면서까지 나를 제지하고 있었다.

“제길…….”

짧은 순간이지만 작은 괴물 놈에게는 최대의 기회였다.

“캬아악!”

바로 앞이다. 내 앞에 다가온 놈은 최대한 크게 입을 벌렸다. 이대로 있으면 물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캬아악!”

놈의 굶주림은 절박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판단을 흐리게 할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런 본능만이 남아 있는 놈은 단순한 공격을 할 가능성이 높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방법 밖에 없다.

도박이지만 일단은 공격을 온전히 피해내야만 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리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난 최대한 고개를 옆으로 뻗었다. 곧 엄청난 통증이 목 근육에서 느껴졌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캭!”

간발의 차이로 내 목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의도치 않게 바닥에 박치기를 한 놈은 비명을 지르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칼을 놓지 않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하!”

망설임 없이 놈에게 칼을 집어 던졌다. 슈우욱. 꽤 가까운 거리였다. 이 정도라면 놈도 온전히 피하지 못할 것이다.

푸욱!

명중이다. 정확히 머리를 뚫지는 못했지만 명치 부분에 꽂힌 걸로도 큰 수확이었다. 단숨에 몸을 일으켜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의 목을 강하게 밟고, 다른 손에 들린 칼로 놈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콰직. 콰지직. 두어 번의 공격으로 놈은 완전히 늘어졌다.

“하아..”

이런식으로 협동해서 나를 공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죽을뻔한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리마인드를 하면서 호흡을 고른다.

작게 숨을 고르며 축 늘어진 괴물 놈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갑갑해졌다.

여전히 묽은 피를 뽑아내고 있는 시체를 가만히 바라봤다. 홀의 한 부분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피의 양이 상당했다.

“…….”

이제껏 많은 놈들을 없애 왔지만 오늘처럼 찝찝한 적은 거의 없었다. 왜 일까. 과거 두 괴물의 사이가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일까?

“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였고 난 정당한 선택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로 추정되는 괴물을 지나 주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띈 것은 주방에 있는 가사도구들이 아닌 괴물의 배 부분이었다. 볼록하게 솟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크기였다.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니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배를 보며 몇번이고 고민 했다. 칼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기를 수차례. 결국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눅눅해진 침을 뱉었다. 몇 번 손을 휘저으며 주방을 훑어봤다. 전에 나왔던 음식점과 다르지 않게 썩은 음식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몸을 씻어내고 싶었다. 분명 바닥 어딘가에 호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을만한 옷을 먼저 찾아야 했다.

콰득.

주방을 나가려는데 발치에 뭔가가 밟혔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 뼈로 보이는 것들이 아무렇게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괴물…… 하체가 없다.

“…….”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이 괴물들은 모자지간이었거나 모녀지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다리를 온전히 뜯어먹게 놔둘 리가 없다.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다른 쪽에는 뭔가가 없는지 고개를 돌렸다.

“가방?”

주방 구석진 곳에 밝은 색의 유치원 가방이 눈에 띄었다. 혹시 안에 먹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숨에 가방을 들어 내용물을 털어냈다. 곧 떨어지는 것은 과자 몇 봉지와 빵이 전부였다. 다행이었다. 조금이지만 먹을 만한 것들이 있었다.

“씻어야겠네.”

촤아악. 가볍게 핏물을 씻어내고 빵을 집어 들었다. 포장 상태로 보아하니 뜯다가 먹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렴 어떤가. 지금 나에게 있어 이건 최고의 양식이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숨을 돌렸다. 오랫동안 먹지 않아서인지 뱃속이 요란하게 울부짖는 것 같았다. 우물우물. 빵을 다 먹어치우고 과자 봉지를 집어 들었다.

“?”

비닐 재질과는 다른 뭔가가 만져진다. 가볍게 떼보니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바닥에 팽개쳐진 유치원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 아이와 그 옆에 엄마, 아빠가 앉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여자의 배. 당시 그들에겐 새로운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겠지만..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해버렸다. 그게 누군가에겐 좋은 일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재앙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과연 이런 환경을 절실히 바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을까. 남은 생존자들은 대체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상대해야만 이 일이 끝나는 걸까.

“제길…….”

쉬익. 미세한 소리가 났다. 꿀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체의 배. 미세하지만 나약하게…… 부풀어 오른 배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사진에 비친 마지막 인간이었을 그녀의 배를 가만히 바라본다. 난 다시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분명 저 괴물은 죽었을 터. 그럼 역시 안에 있는 것은…….

쉬익.

가까이 다가갈수록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마치 내 눈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 얻은 눈치와 감은 내 생존의 무기이자 특기였다.

쉬…… 이……

앞에 다가서자 완전히 움직임이 멎었다. 속지 않아. 어서 움직여라. 내 눈을 피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을 노출했어. 자, 움직여라.

“…….”

천천히 기다렸다. 분명 움직일 것이다. 그 순간을 노렸다. 죄악감 따위 개나 주라지. 이런 상황에서는 힘이 전부였다. 적자생존이란 말이다.

배가 조금 부풀어 올랐다. 이때다! 강하게 옆구리 부분에 찔러 넣었다. 부우욱! 기분 나쁜 감촉이 손을 휘감았다. 눅눅하고 축축한 피와 장기들이 손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푸욱!

다시 칼을 뽑아 낸 후 다른 방향으로 거칠게 찔러 넣었다. 순간 병원에서 만났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괴물로 변한 자신의 아이에게 살을 내어주며 죽어버린 아저씨.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장면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머릿속에 각인된 상태였다.

“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다른 칼로 남은 배 부분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두어 번의 난도질 끝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눅눅하고 축축한 피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에 있어야 할 장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괴물인 채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안에 있어야할 장기가 깨끗한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럼 뱃속에서 미세하게 움직인 것은…….

“케르르르.”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

천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검은 색의 괴물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아기의 형상이지만 그 외관은 괴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큭! 위가 잡혔다. 서둘러 칼을 들어 올려 놈을 베려했다. 하지만 빠르고 교묘하게 피해낸 놈은 내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위험해. 머릿속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을 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남은 다리를 이용해 놈을 옆으로 쳐낸 후, 재빨리 일어나 다른 칼로 놈의 몸통을 노렸다.

“키!”

허나 놈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 서로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칼날을 최대한 피해 몸을 옆으로 구르는 놈은 내 공격을 막아냈지만 다른 손에 있는 칼날의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푸욱!

“키이이이이!”

전투 경험이 거의 전무한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움직임이 너무 훤하고 솔직한 것이 놈의 패인이었다. 푸욱! 척추 부분에 칼을 깊게 꽂아 넣고 그대로 위로 올렸다. 으드드득.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괴상한 감촉과 함께 놈의 마지막 비명소리가 들렸다.

“키이이…….”

그 일말의 비명과 함께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후…….”

놈이 완전히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칼날과 손을 씻어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몸은 나중에 씻기로 하고 바닥에 떨어진 과자 봉지를 집어 들었다.

“…….”

바닥에 놓인 사진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마음 한 곳이 아려왔다. 분명 난 옳은 일을 한 것인데 왜 이렇게 씁쓸한 것일까. 왜 가족을 몰살했다는 죄책감이 드는 것일까. 왜 이 가족의 행복을 빼앗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이상하게 숨이 찼다. 아까 전의 일이 왜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일까.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떨쳐내려 했다. 스윽. 두 손을 뻗어 얼룩덜룩해진 손과 팔목을 바라봤다. 주먹을 세게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 굳게 먹어라. 이진성. 여긴 너 혼자 밖에 남지 않았단 말이야.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고.

저벅. 저벅.

비상구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당겼다.

“!”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뭔가가 가로 막고 있다는 뜻이었다.

“크르르…….”

미세하지만 확실한 소리가 들렸다. 놈이 밖에 있었다. 내 위치를 알고 대기하고 있던 것일까. 방금 죽였던 놈의 비명을 듣고 온 것일까. 아니야. 그 정도로 방음이 허술하지는 않을 거야. 오래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뒤로 뛰었다. 제길…… 이제 와서 제길!

끼이익.

쇳소리가 나며 문이 열릴 때 쯤 술집으로 들어왔다. 창문 아래에 바로 몸을 숙여 밖을 살폈다. 나오기 전 몸을 씻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크…….”

인간 형상을 한 세 마리의 괴물 놈들이 비상구 문을 열고 비틀대며 서 있었다. 여기에 죽 치고 앉아 있으면 다른 놈들마저 올지도 모른다.

오래 고민하면 안 된다.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려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핏물과 살점들을 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이 정도라면 놈들도 나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철벅. 철벅. 기분 더러운 감촉과 적응되지 않는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피부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좋아. 부딪혀 보는 거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 술집 문을 열고 놈들에게 다가갔다.

빠르게 다가가면 혼란을 줄 수가 있다. 최대한 놈들과 같은 보폭과 걸음걸이로 행동하자. 왼쪽 발을 바닥에 질질 끌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크르…….”

세 놈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스윽. 슥. 다리를 끌며 제일 선두에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한 놈이 속아 넘어간다면 다른 놈들까지 나를 보내줄지도 모른다.

놈이 코앞에 있었다. 눈만은 어쩔 수가 없기에 고개를 숙이고 다가갔다. 비정상적인 놈의 양 다리가 바로 옆을 지나갔다. 넘어간 건가? 보이지 않는 숨을 내쉬며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텁.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내 곁을 지나칠 줄 알았던 놈이 양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크르르…….”

침착…… 침착하자. 최대한 놈이 이끄는 대로 맞춰주면서 놈들의 발을 주시했다. 바지 양 주머니에 꽂힌 주방용 칼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킁. 킁. 어느 정도 당긴 놈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인 걸까. 한 동안 킁킁대던 놈은 내 주위를 맴돌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이다. 외관적으로 멀쩡하지만 겉에서 나는 냄새가 본인들과 너무 흡사하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아직 나에겐 무기가 있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한 번에 놈을 보낼 수 있다. 세 놈이긴 하지만 지금 사정거리라면 충분히 해 볼만 했다. 결정을 내려야 돼. 이 상태로 들통 나면 죽도 밥도 안 돼.

“크르르…….”

그런 대치를 미묘하게 깬 두 놈이 낮게 울며 내 옆을 지나갔다. 그러자 내 주위를 얼씬거리던 놈도 그 뒤를 따랐다. 겨우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핏기가 완전히 식은 후에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지 모르겠다. 슬쩍 고개를 돌려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는 놈들을 확인한 후 비상구 문을 닫고 잠갔다.

달칵.

안에서도 열 수 있는 구조이긴 하지만 저 상태로 완벽하게 열지는 못할 것 같다. 안에 있는 고깃덩어리가 맘에 걸리긴 하지만 술집 문 역시 잠근 상태니까…… 일단은 위로 올라가야 햇다.

어두운 계단에 간간히 비치는 비상구 표시의 녹색 불빛이 눈을 편안하게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크…….”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모으고 있는 한 놈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놈 말고는 조용했다. 슬그머니 칼을 꺼내 놈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느리게 고개를 든 놈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묻었다.

푸욱.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부르르 떨며 움직이지 못하는 놈의 시체를 옆으로 치우고 바로 앞에 있는 비상문을 열었다. 끼이익. 나를 반기는 것은 의류매장이었다. 넓은 3층 자체가 전부 의류매장인 듯 꽤 넓었다.

“흠…….”

군데군데 환하게 빛나는 등불을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여긴 나중에 와야겠다. 다시 문을 닫고 위로 올라갔다. 저벅. 저벅. 낮게 발을 끌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4층. 빨간 목욕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는 굳게 닫힌 문이 보이는 걸 보니 여기가 끝인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싶었지만 우선 확인이 먼저였다. 굳게 닫힌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덜컥. 덜컥.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조금 내려와 목욕탕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신발장과 남/여가 구별되어 있는 입구가 보였다. 조사해야할 곳은 두 군데지만 여기만 안전하면 당분간 지내는데는 큰 지장 없을 것 같았다. 먼저 여탕으로 이동했다.

“깨끗하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탈의실 겸 매점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후…….”

천만다행이었다. 매점 안에 있는 냉장고가 아직도 가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신선한 음식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먼저 탕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널브러진 시체와 바닥에 흥건히 고인 핏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픔보단 안전이 우선이었다. 이번엔 남탕으로 들어가 수색을 했다. 마찬가지로 매점에 눈이 갔다.

“후…….”

예상외로 깨끗했다. 서둘러 나와 바깥 출입문을 단단히 잠근 후, 매점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 닥치는 대로 입에 넣기 시작했다.

우선은 배를 채우고 생각하자. 아무래도 놈들은 사람의 음식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덕분에 이렇게 마음 놓고 음식들을 채워 넣을 수 있으니.

“후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비닐을 보니 꽤 정신없이 먹어댄 것 같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바닥에 누웠다. 얼마 만에 맛보는 휴식인가.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자 절로 눈이 감겼다.

저벅. 저벅.

길고 어두운 통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하염없이 걸었다.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느끼고 있을 때 이미 내 몸과 마음은 정면을 향하며 움직일 뿐이었다. 대체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왜 여기를…….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몸 덕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고오오오. 고공에 있을 때 날 법한, 거세지만 한 없이 고요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자그마한 바람 한 점도 불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인가. 분명 꿈일 것이다. 최근에 꿈을 꾼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피곤해서 그런 건가.

어릴 때는 몸이 허약해서 자주 이랬던 적이 있었다. 원치 않는 꿈을 꾸면서 깨기 위한 노력을 수도 없이 했다. 13살…… 그래, 그 때부터 이런 꿈들이 본격화 되어 나타난 것 같았다.

단순한 허약체질? 아니다. 중학교 때 친구 녀석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 ‘루시드 드림’이라는 증세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나와 같은 증상이지만 문제는 내 마음대로 꿈을 제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넌 아직 미숙해서 그런 것 같다. 올바른 사용자라면 뭐든 마음대로 조종하며 너의 세계를 만들 수 있어.’

그런 미숙한 점은 여러 과정을 반복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가끔 지독하게 피곤한 상태이거나 잠을 오래자면 나타나는 현상 같았다. 이럴 때 누군가 나를 불러주면 일어날 수 있을 텐데…….

문득 붉은 색의 원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혹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출구일까. 손을 뻗어 원을 잡으려고 했지만 뻗는 만큼 멀어지는 탓에 잡을 수가 없었다.

번뜩.

또 다른 원이 나타났다. 빙글빙글 돌던 두 원은 서로 엉켜 나뉘어졌고, 곧 검은 색과 섞여 내 눈을 어지럽혔다.

번뜩. 아니다. 이건 섞인 것이 아니라 눈을 깜빡이는 것이다.

번뜩. 번뜩. 번뜩. 순식간에 붉은 색의 눈동자들이 나타났다. 이내 커다랗게 소용돌이를 치며 내 주위를 빠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빨간…… 아주 진한 선홍색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헉!”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일으켰다. 숨이 많이 딸렸다. 뭘 한 거지? 자는 동안 대체…… 후우. 숨을 고르게 마시며 몸을 진정시켰다.

“…….”

어느새 잠들었는지 주위에는 먹다 버린 봉지들이 아무렇게나 어지럽혀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넓은 목욕탕 안을 살폈다.

바닥에 놓인 두 개의 칼을 꼭 쥐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밖의 상태를 살펴야 했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쿵쿵쿵.

잠결에 들린 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나? 분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목욕탕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간신히 진정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목 언저리가 뜨거워지며 귀가 턱턱 막혔다.

“후우.”

극한의 상황에 너무 노출된 탓일까. 지나치게 피로가 쌓인 것 같았다. 몸이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쿵. 쿵.

두드리는 간격이 짧아졌다. 그렇다는 건?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고개를 살짝 틀어 목욕탕 입구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코팅된 문을 통해 한 명의 검은 인영이 보였다. 고개를 문 쪽에 대고 있는 듯 상체가 꽤 많이 앞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

다른 손은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 올라가 있었고, 다른 손은 축 늘어져 대롱거렸다.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니, 저 정도로 비실거리며 서 있는 폼을 보아하니 괴물 놈이 확실한 것 같았다.

“……냄새를 맡은 건가.”

그럴 리가. 아랫놈들을 속일 정도로 내 위장은 완벽했다. 그럼 중간에 없앤 그 놈의 냄새를 맡은 건가? 아니다. 동족끼리 나는 냄새로 서로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역시 다른 놈이 더 있었나.

“……저기요.”

“!?”

작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갈 뻔 했지만 간신히 추슬러 이를 악물었다. 저 소리에 넘어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도와주세요.”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지만 협소한 공간 탓에 귀까지 들렸다. 다시 고개를 뻗어 인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모든 걸 포기한 듯 힘에 겨워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제발요. 이 문이 잠겨 있는 건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거잖아요. 전 옥상에서 숨어 있었어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마지막에 잠겨 있던 문이 옥상이었나. 목소리로는 지극히 사람 같지만 우두머리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심한 불안과 초조함에 찌든 연약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난 어찌해야 하지?

“제발…….”

주우욱. 인영이 힘없이 문을 타고 무너졌다.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가 인영을 살폈다.

“…….”

미약하게 상체가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더…… 문 쪽으로 다가가 코팅이 안 된 부분에 얼굴을 대고 아래를 바라봤다. 검은 색의 긴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턱 선이 보였다. 전체적인 상태를 봐야겠지만 이런 제약적인 공간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안 돼. 아직 안 돼. 확실하지 않다고…… 우선은…….

“……제발.”

마지막으로 짜낸 듯한 목소리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양손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철컥. 단숨에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자 여자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 아.”

여자는 애처롭게 한쪽 눈을 뜨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다행이다. 적어도 사람이니까…… 문제는 몸에 난 ‘흔적’인데…… 우선 여자를 안쪽으로 끌고 간 후 문을 잠갔다.

여자는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하고 있지만 오래 씻지 못해서인지 여기저기 기름기가 흐르고 있었다. 큰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옷 안에 가려져 있는 흔적이 문제였다.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린 여자의 몸에 손을 뻗었다. 처음 은혜가 반라가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우리 집 마당…… 놈을 피해 오던 은혜와 인연이 시작되었지. 거침없이 옷을 벗기던 동생의 모습이 생각났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다시 손을 거두고 여자를 지켜보기로 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여자였다. 오래 씻지 않아서인지 몸에는 익숙한 땀 냄새가 나고 있었고, 옷 여기저기 잔뜩 뜯겨 있었다.

“…….”

그간 얼마나 고생하며 지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뜯겨진 부분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남아 있기만 하고, 괴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감염의 여지라도 있다면 망설임 없이 죽여야 했다. 일어나는 즉시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칼을 강하게 쥐고 곤히 자고 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인간이길 바라면서.

새액. 새액.

마음 놓고 잘 수 있다는 공간에 와서 그런지 여자는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시간. 3시간도 더 지난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깊이 잠들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바닥에 떨어진 비닐들을 치우며 아직 풍족하게 남아 있는 군것질 종류의 음식들을 집어 들었다.

“…….”

잊고 있었다. 워낙 피곤한 탓에 몸을 씻지 않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먹을 것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아직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일어나지 않겠지…… 두 자루의 칼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그 정도로 요주의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몸을 씻고 나와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꽤 많은 양의 물이 바닥에 고여 있었다. 발바닥 가득 느껴지는 찬 기운에 몸이 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

생존자들은 여기서 몸을 피하며 연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괴물들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적당히 밀폐된 공간과 충분한 먹을거리. 그리고 몸을 씻을 수 있는 물들.

그런데 왜 다들 떠나간 것일까. 괴물들의 습격 때문에? 아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깨끗했다. 더 이상 여기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일까? 그래, 그게 제일 유력했다.

끼리릭.

수도꼭지를 돌리자 차가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쏴아아. 바닥을 세차게 때리는 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밀어 넣었다. 움찔. 쌀쌀한 날씨에 찬물로 샤워라니…… 혹시나 하는 기대로 수도꼭지를 다른 쪽으로 돌려보지만 여전히 차가운 물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추운 것은 잠시 뿐이었다. 쏴아아. 질척거리는 바지와 팬티를 벗어 버리고 딱딱하게 굳어 잘 떨어지지 않는 각질 같은 것들을 떼어냈다. 벅벅. 손톱으로 긁어내며 놈들의 피들을 씻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기간 찬물에 노출된 탓에 몸에서 경고 신호를 보냈다. 어느 정도 놈들의 흔적을 지운 것 같았다. 욕실에서 나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수건들을 들고 빠르게 몸을 닦아냈다.

“흐으…….”

익숙하지 않은 체온 변화 탓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방전된 것처럼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바닥에 누운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굳게 닫혀 있는 사물함 안을 하나씩 확인했다. 덜컹. 덜컹. 열리지 않는 수많은 문들 사이에 간신히 몇 개가 열렸다.

트레이닝복과 바람막이가 들어있었다. 약간 매캐한 냄새가 진하게 났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출출한 배를 달래야 했다. 그대로 바닥에 앉아 바지부터 입는 와중에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

생사의 고비를 넘겨오며 단련된 오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오감에 충실히 움직여야했다. 재빨리 몸을 옆으로 굴러 수건이 널브러진 근처에 있는 칼을 잡기 위해 점프를 했다.

“흐읍!”

바로 앞.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와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는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아니, 그 여자가 분명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눈은 익히 알고 있는 선홍색이었다. 젠장! 어느새? 자고 있는 동안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확인을 안 한 것…….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위로 떠올랐다. 뱃속이 진공 상태 같았다.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그저 나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만 보일 뿐이었다.

“크억!”

콰앙. 바닥에 세차게 부딪히고 나서야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바닥에 누워있다가는…… 큭! 틀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간…….

“내, 내가 왜?”

그러나 여자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격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같은 단어만 중얼거리던 여자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련한 발목을 노려보며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겨우 찾아온 기회였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했다.

“하아!”

바닥을 굴러 날이 선 칼을 들고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선홍색의 눈을 한 여자는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 그대로! 죽여야 해. 저 정도의 상태라면 평범한 놈들 수준이 아닐지도 몰라. 이 일격에 모든 것을!

“……왜.”

칼날이 여자의 목을 뚫기 직전, 중얼거리던 여자의 몸이 옆으로 돌아섰다. 깔끔하게 피하며 내 옆구리를 노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당할 수는 없었다. 아직 내 양손에는 두 칼이 단단히 들려있으니까.

다른 손으로 옆을 크게 베었다. 최대한의 반격이자 최후의 공격이기도 하지만, 여자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겠다.

촤악! 베이는 감각과 뭔가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쿠당! 가슴에 가해지는 충격에 숨이 멎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간신히 몸을 옆으로 틀어 여자에게 달려갔다.

“하!”

역시 예상대로였다. 내 일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멍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이 상태라면…… 이 상태라면!

“왜 나를…… 죽이려하지?”

착각이었을까. 꿈에서 봤던 붉은 눈동자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띠-잉. 머리에 뭔가가 심하게 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에 심하게 울렸다. 칼을 딛고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도 똑같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가련한 발등이 보였다. 아아. 제기랄. 한 걸음. 두 걸음. 바로 앞 까지 다가온 여자는 양손을 뻗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끅…… 끄으으윽.”

아마도 난 그렇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살아갈 길이 없다. 멍하니 내 목을 조르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선홍색의 눈이 루비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너도…… 날 죽일 거지. 그렇지.”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완전히 괴물 놈이로군. 여자는 서서히 입을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들 사이로 조심스레 튀어나온 혀의 색은 짙은 검은 색이었다. 당했군. 완전히 당했어. 제기랄…… 더운 숨결과 역겨운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먹히는 것인가. 아니면 감염이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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