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밖에 나가지 마시오 part.19
“이 순간을 기다렸어…….”
그 말과 함께 여자의 고개가 급격히 쏠렸다.
화아악. 더운 입김과 함께 날카로운 송곳니가 뚜렷하게 보였다. 분명 빠른 속도지만 이상하게도 느리게만 보였다. 왜 이럴까. 이 정도라면…… 어쩌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 자유로운 두 손을 들어 여자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커…….”
여자는 숨을 들이키며 약간 몸을 들썩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절호의 기회였다. 그대로 하체를 들어 올려 여자의 머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퍼억. 하지만 고개만 돌아갈 뿐 완전히 날아가지는 않았다.
“크…… 르르.”
목소리가 완전히 바뀌었다.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다. 긴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눈이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위험해. 어서 서둘러야 해. 잠시 몸이 자유로워진 것을 이용해 앞에 떨어진 칼을 잡기 위해 앞으로 굴렀다.
바로 뒤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위험해. 최대한 몸을 숙였지만 따갑고 낯선 감촉이 등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큭!”
다시 칼을 강하게 쥐고 그대로 몸을 돌려 칼날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자의 몸놀림은 인간의 평균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부웅. 여유롭게 뒤로 빠진 여자는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묘한 대치 상태였다. 우세한건 여자가 분명했다. 공격에 성공한다면 내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등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여자를 가만히 주시했다.
“…….”
어째서인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건가. 아까 나를 덮쳤을 때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격하게 꺾으며 몇 차례 발악하기를 수차례.
“크…… 크아아아!”
여자가 고개를 높이 들고 포효를 했다. 이 포효소리는 타 괴물들과는 다른 우두머리와 매우 밀접해 있는 소리다. 초조해져간다. 재수가 없으면 주위에 있는 괴물 놈들까지 이리로 올 수 있었다. 빨리 결판을 내야 했다.
“하아!”
빠르게 앞으로 도약해 여자의 품으로 안겨들듯 뛰어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양 손을 빠르게 뻗어 내 손목들을 붙들었다.
손이 허무하게 봉쇄당하자 움직일 수 있는 건 다리 밖에 없었다.
“하!”
강하게 대각선 방향으로 차올렸다. 물론 맞지는 않겠지만 손이 자유로워지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여자는 피하지 않고 온전히 내 공격을 받아내며 자신의 몸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크크크.”
웃고 있었다. 길게 찢어진 입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송곳니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던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제기랄!”
그러나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아직 나에게는 두 다리가 있었다. 부웅. 붕. 두 다리를 힘 있게 올려 차며 여자의 얼굴 쪽을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퍼억. 그러나 소용없었다. 고개만 약간 뒤로 젖혀질 뿐 나를 잡고 있는 손의 힘은 더욱 거세져 갔다.
“큭…….”
손목이 아프다 못해 시렸다. 감각이 점차 느껴지지 않았다. 제길…… 제기랄! 이번에는 도망칠 수가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죽는 건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을 알게 되자 몸이 저절로 포기한 것 같았다. 축 처진 양 다리가 대롱거리며 여자 쪽으로 끌려갔다.
“크르르…….”
이 소리는? 여자에 비해 더 굵고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뒤편을 바라보니 어제 문 앞에서 보았던 놈이 눈에 보였다. 저 놈이 대체…….
“!!”
남자다. 그 놈 뒤에서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크르…… 크.”
여자는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곧 낮게 이를 갈며 매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캬아아!”
자신의 식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자신의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서 내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괴물과 남자는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왜…… 대체 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무표정하게 나와 여자를 번갈아 볼 뿐 뚜렷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설마……
“오래…… 기다렸다.”
더듬거리며 말을 한 여자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뚝. 뚝. 뜨겁고 더러운 액체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낯선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놓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크…… 르?”
곧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고 느낀 여자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정작 중요한 건 자신 앞에 서 있는 괴물 놈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르르.”
여자를 보던 괴물은 입을 크게 찢어 여자의 목을 단숨에 물어뜯기 시작했다. 으드득. 으득. 낯선 소리와 함께 검은 색의 피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그제야 큰일이 일어났다고 여긴 여자는 몸을 버둥거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아악!”
그러나 여자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이 목을 뜯겼다. 으드득. 으드드득. 단 두 번의 턱짓으로 여자의 목을 완전히 분리시킨 괴물 놈은 구석으로 굴러가고 있는 머리를 강하게 밟아 버렸다.
콰직!
허연 뇌수와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에 고개가 돌아갔다.
“크르르르.”
괴물은 아직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자의 얇은 팔을 뜯어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괴물의 식사 현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깨끗했던 바닥도 보기 싫을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콰득. 콰드득.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괴물 사이로 남자가 걸어왔다.
“괜찮나?”
“어…… 어떻게?”
“저번에 만났던 놈이다.”
“그, 그건 알고 있어. 왜 나를 도와주는 거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에게 적의는 없다.”
적의? 그러고 보니 놈은 예전 동료들에게서 도망 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마르고 볼품없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건장하고 커다랗게 변한 거지?
“그래……?”
“확실하다.”
적어도 괴물들과 소통이 되는 남자라면 믿어볼 만했다. 일단은 나를 구해준 은인이니까 말이야.
“어이.”
열심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녀석을 불렀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지 않는지 고기를 입에 넣기만 할 뿐이었다. 뭐, 상관없나. 몸을 일으켜 목욕탕 문을 나섰다. 휘이잉. 굳게 닫혀 있던 옥상 문이 열려 있었다.
“과연…….”
대강 상황 파악이 된다. 아마도 저 여자는 저 곳에서 지내다가 감염 된 것이 분명했다. 정말 감쪽같은 연기로 내 목숨을 위협했지.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큭…….”
붉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 될 정도였다.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는 시체 더미와 작은 핏물이 모여 조그만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전부 그 여자의 짓인가…….”
시체들을 대충 훑어보니 괴물들과 사람들의 몸이 섞여 있었다. 역시 닥치는 대로 먹으며 생명을 이어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더러운 공간에서 지내며 최소한의 청결을 유지한 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하기에는 몸에서 나는 냄새도 너무 깨끗했어.”
“한 놈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
“응?”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남자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저 여자 혼자서 해낼 수 없는 규모다.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그럼 아직 방심할 수는 없겠군.”
남자는 말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문을 단단히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힐끔 목욕탕 안을 들여다보니 아직 식사 중인 괴물 놈이 보였다.
“저 놈은 어쩌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알아서 올 거다. 우리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으니.”
든든한 놈 하나가 생기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물론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남자가 같이 있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자아, 이제 어디로 이동해야 할까.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물론 양날의 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곁에 남자가 있었고, 건물에 들어오기 전에 마주쳤을 때에도 특별히 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럼 조금이지만 앞뒤를 가릴 줄은 안다는 뜻이었다. 놈에게 은혜의 피를 조금 나누어준다면…… 어쩌면 남자와 같은 힘을 가지고 지성을 가진 반인반수가 되지 않을까. 아니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러고 보니 너.”
이제야 남자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후줄근한 내 옷차림은 둘째 치고 남자의 옷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였다. 반나절 정도가 지난 것 같지만 일주일 이상 부랑자 생활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는 약간 고개만 갸웃거릴 뿐 나를 보기만 했다. 역시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미약하지만 남자의 몸에서 나는 진한 피의 향이 놈들의 후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
“일단 씻고 다시 올라가자.”
“……알았다.”
우리는 빠르게 목욕탕으로 올라갔다. 어느새 식사를 마쳤는지 괴물이 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곁눈질로 놈을 올려다보자 고개를 저으며 옥상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문을 열면 푸짐한 식탁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굳이 챙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들어가서 씻고 와. 난 챙길만한 걸 찾아볼 테니.”
남자를 탕 속으로 밀고 매점으로 와 아직 먹을 만한 것들을 골라냈다. 바스락 거리는 비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혼자라면 상당히 초조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남자와 괴물이라는 변수의 힘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뭔가 담을 것이 필요했다. 매점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서랍장 여기저기를 뒤졌다. 목재로 된 다른 서랍을 뒤지자 운 좋게 작은 가방이 보였다. 얼마 넣지는 못하겠지만 손으로 들고 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빠르게 빵과 과자를 담아냈다.
그 사이 대강 핏기를 없앴는지 남자가 걸어왔다.
“신발장에 있는 것 중에 적당히 골라 신어.”
남자는 말없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서둘러 마무리 작업을 하고 남자를 따랐다.
“많네…….”
주인을 잃은 신발들을 살펴보며 남자의 발사이즈와 최대한 맞는 것을 찾아내어 건넸다. 물끄러미 신발을 바라보던 남자는 군말 없이 신고 앞으로 나섰다.
“바로 아래층이 의류매장이야. 거기서 옷 좀 챙기고 쉬다가 가자.”
“알았다.”
슬쩍 위쪽을 바라보니 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아…… 활짝 열린 옥상의 문이 보였다. 희미한 냄새를 맡고 간 건가? 상관하지 말자. 놈이 하는 일은 내게도, 남자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빠르게 3층으로 내려와 문을 열었다.
끼익. 낡은 쇳소리와 함께 불이 꺼진 의류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괴물 놈들은?”
“없다. 올라오기 전에 다 없앴다.”
“그래?”
역시 도움이 되는군. 안심할 수 있겠다. 넓은 의류매장을 한 바퀴 돌아보며 입을 만한 것들을 눈에 담았다. 활동하기 편하고 더러워지지 않는 거라면 검은 계열의 등산복이 최고였다.
“맘에 드는 걸로 입어. 어두운 걸로.”
남자는 능숙한 동작으로 몸에 맞는 등산복을 입기 시작했다. 나 역시 헐렁한 옷을 던져버리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새 옷 냄새와 몸에 착 달라붙는 착용감이 나쁘지 않았다.
“어두워졌으니 내일 나가자. 은혜는 어디 있는지 알겠어?”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렇군.”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와중에 은혜를 두고 농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모두와 어떻게 합류하느냐는 것이었다. 아침이면 필시 움직일 테고 그 만큼 거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차를 이용할까? 아니야. 소음이 너무 커. 그럼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하나?
“…….”
그럼 저 괴물 놈은? 모두 저 괴물 놈을 보고 반갑게 맞아줄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놈이 이성이 마비되어 은혜를 덮치기라도 한다면…… 역시 놈은 떼어 놓아야 하는 것인가.
“처음부터 우리를 따라오고 있던 놈이다.”
“……그럼 그 버스에서부터?”
“우리 뒤를 따르면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언제나 우리 뒤를 밟으며 티 하나 내지 않다니. 놀라운 사고능력인가. 아니면 몸을 극히 사리는 것인가. 아니다. 놈은 다른 평범한 놈들에 비하면 월등히 큰 체구를 가졌다. 힘도 그만큼 강할 테고…… 그럼 왜…….
“크아아아아!”
“!!”
정적을 깨는 포효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일으켰다. 남자 역시 빠르게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문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둘러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끼익. 거침없이 문을 연 남자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위험하다.”
“……어?”
“아까 말했던 놈이 나타난 것 같다. 안에 있어라.”
여자를 조력해주던 괴물 말인가.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손에 들린 것 없이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그래, 남자의 말이 맞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진 식칼 두 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지금 나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크아아아!”
아까보다 더 격정적인 포효소리가 들렸다.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또 무력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처음 기현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보냈을 때…… 그 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하아.”
덜컹. 덜컹.
“!?”
희미하지만 멀리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소리가 나는 곳과 가까워질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녹색 비상구 표시였다.
“……으으으.”
제길! 설마 아래 계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순간 아래층에 있던 괴물 세 놈이 떠올랐다. 올라오면서 모두 없앤 것 아니었어? 문을 잠군 상태라 그냥 지나친 건가? 제길…… 제길! 만약 놈들이 동시에 나를 공격하려한다면…… 오래 생각할 틈 없이 덜컹거리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들의 지성이 딸린 탓에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으으으.”
틀림없다. 포효 소리를 듣고 올라온 것이다. 찰나의 순간. 이 순간을 놓치면 위험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이 반쯤 열렸다.
“크…… 르르르.”
좁고 검은 문틈 사이로 붉은 색의 눈알이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남은 손에 들린 칼을 그대로 문틈으로 뻗었다. 미간 사이. 이 정도 거리라면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고통 섞인 비명과 함께 놈이 뒤로 멀어졌다. 서둘러 문을 닫았다.
하지만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었다. 간과하고 있던 두 놈이 문틈으로 손을 뻗어 내 행동을 완전히 저지했다. 드드드드. 점차 벌어지는 힘의 차이를 어쩌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대신 문틈 사이로 보이는 놈들의 손가락들을 강하게 찔러댔다.
“크아아아!”
녀석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쉽사리 문을 쥐고 있던 손을 풀지 않았다. 그럼 다시 한 번!
푸슉. 푸슉!
여러 차례 공격에 놈들의 손가락이 땅에 뒹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문을 붙들고 있던 손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좋아. 성공했어. 이참에 닫아버리면 돼. 서둘러 문고리를 잡고 강하게 내 쪽으로 당겼다. 휘웅!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문은 완전히 닫혔다. 재빨리 문을 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우…….”
극한 상황에서 숨을 쉬는 것을 까먹은 것인가. 숨을 거세게 몰아쉬었다. 덜컹. 덜컹. 문이 강하게 흔들릴 정도로 놈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쿠웅!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렸다. 덜컹거리며 미약하게 흔들거리던 문이 강하게 흔들렸다. 뭐, 뭐가 오는 거지? 쿠웅! 다시 들리는 소리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몸이 '위험하다.' 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찌걱.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였다.
쿵!
쩌적. 굳게 닫힌 문이 조심스럽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설마? 저 정도 괴력이라면 완전히 변신한 놈들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린 동료를 뜯어 먹고 변한 것인가?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하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제야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의류매장을 벗어나 문을 굳게 잠군 후 위로 올라갔다. 그대로 목욕탕 쪽으로 들어갈까 망설였지만 환하게 열려 있는 옥상 문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일단은 남자와 괴물 놈이 온전한 상태여야 내 목숨이 보장된다.
서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꽤 커다란 덩치를 갖고 있는 괴물 놈이 바닥에 쓰러져 괴로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치명상을 입은 듯한 괴물과 남자가 비틀거리며 간신히 땅을 지탱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쌩쌩한 두 괴물 놈과 맞붙게 할 수 없었다. 옥상 문을 강하게 걸어 잠그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놈들이 있나?”
“어. 지금 변한 상태니까 조심해.”
“그렇군.”
별 감흥 없는 목소리에 괜히 나까지 김이 빠졌다. '위기' 라는 단어를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걸까.
“……크르르르.”
약하게 신음을 흘리고 있는 괴물 놈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투명하게 붉은 루비 같은 눈. 가만 보니 그 여자 괴물과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 디…… 있……?”
괴물은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여자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곳에서 남자와 괴물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어디…….”
남자는 발을 크게 들어 올려 그대로 괴물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푸각! 단 번의 일격으로 머리가 크게 함몰됨과 동시에 묽고 끈적끈적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다행히 나와는 거리가 있어 튀지는 않았지만, 남자와 괴물에게는 피할 수 없는 사정거리 안이었다.
“크르르…….”
느릿하게 핏물을 털어 낸 괴물 놈은 고깃덩어리로 변한 자신의 동족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찌직. 찌지직. 날카로운 송곳니로 딱딱한 근육덩어리와 살을 뜯어내며 크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먹었으면서 질리지도 않은가?
“여기에 있다면 안전하다.”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안전하겠지. 저런 놈과 남자라면 아래에 있는 괴물 놈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보다 괜찮아?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된다.”
우린 말없이 괴물을 바라보았다. 놈의 식사가 한창이었다. 등부터 꾸준히 파먹은 덕에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하얀 뼈와 정체불명의 장기들을 대충 한쪽으로 치우더니 이내 하체 부분의 살덩이들을 뜯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여전히 듣기 싫은 소리였다. 이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날이 어두웠기에 망정이지 밝은 대낮이었다면 훨씬 더 괴기스러운 장면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큭.”
그제야 등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 여자 괴물에게 당한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탓이었다.
“왜 그러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몰라서 묻냐.”
“아까 당한건가.”
“어느 정도로 심한지 모르겠어. 한 번 봐줄래?”
“알았다.”
상의를 벗어 등짝을 남자에게 보여줬다. 따끔거리는 것이 더 심해지기는 했지만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버티기는 하겠지만 이런 상태로 계속 지체된다면 후에 큰 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여건이 좋지가 않다.
“…….”
남자는 말없이 내 등을 보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상의 뒷부분에 묻은 끈적끈적한 핏물들이 보였다. 예상보다 많은 양이었다. 깊게 베인 건가? 감염의 가능성은?
“심하진 않다.”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다만…….”
“응?”
“빨리 지혈해야 한다.”
“왜?”
“많이 찢어졌다. 봉합해야 한다.”
“어?”
봉합까지 할 정도면 심한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 피를 흘리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역시 봉합할 무언가를 찾는 수밖에 없나. 건물 안에는 없을까. 찬찬히 뒤져봐야 했다.
“그럼 같이 찾으러가자. 그보다 너 봉합은 할 줄 아냐?”
“모른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한다.”
“후…….”
다시 몸을 돌려 상의를 입으려는 찰나,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놈과 눈이 마주쳤다.
“…….”
붉은 피와 커다랗고 작은 살덩이들을 가득 묻힌 놈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내 피 냄새를 맡은 것 때문에 그런가? 그 정도로 후각이 발달했나.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크르르르.”
놈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놈의 커다란 중압감이 내 몸을 찍어 누르는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지만, 남자 역시 놈을 바라보기만 할 뿐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뭐지? 이건 대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야.
“야. 야.”
당황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을 때 놈은 바로 내 앞에 도달했다. 비릿한 피 냄새와 괴물 특유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후각을 자극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여기까지 왔는데 남자가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분명…….
“크아아아!”
잊고 있었다. 아래쪽에 괴물 놈들이 있다는 것을. 놈은 그것을 감지하고 내게로 바로 온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었나? 소리는 바로 아래쪽에서 들렸다. 잠근 문을 모두 뚫어냈는지 놈들의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발소리가 상당히 거칠고 컸다. 잔뜩 흥분한 상태 같았다.
“크르르.”
놈은 작게 울며 나를 가볍게 밀쳐내고 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단숨에 문을 열고는 공간을 막아섰다. 큰 체구를 가져서인지 놈의 뒷모습에서 나오는 포스가 우두머리 급과 비슷해 보였다. 처음으로 놈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크아아!”
어느새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문 앞에 도달한 것이다. 녀석들은 길길이 날뛰며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놈들은 모르고 있었다. 문 앞을 막고 있는 놈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곧 자신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죽임을 가할 존재라는 것을.
슈웅. 한 번의 일격이었지만 그 파공음은 엄청났다.
“킥?”
한 번의 손짓으로 녀석들의 목을 움켜잡은 놈은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괴물 놈들의 목을 잡은 채 몸통을 꽂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콰앙.
콘크리트 바닥에 묻힐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녀석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놈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그러다 한 녀석은 놈을 완전히 적으로 인식했는지 굵은 팔뚝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크르르르.”
오히려 놈을 더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놈은 발악하는 놈을 순식간에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기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키아아아!”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녀석은 양손으로 놈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나 힘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놈은 단 번의 일격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뜯어 놓았다.
진하고 거무튀튀한 혈액이 분수처럼 목에서 뿜어져 나왔다. 놈은 그것을 대충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다른 손에 잡힌 녀석을 서서히 끌어 당겼다. 바로 앞에서 동족의 죽음을 목격한 녀석은 발작적으로 버둥거렸다.
마찬가지로 녀석의 목을 완전히 분리한 놈은 아직 마치지 못한 식사를 이어갔다. 짧은 순간의 '살육'은 놈에게 아무런 흥미를 돋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손 하나 더럽히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는 선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제 이 건물 내에 괴물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건가. 열심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놈을 잠깐 보고 문을 나섰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상처 부위를 가볍게 씻는 것이었다. 그 전에 뭔가 피를 멎게 할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후우.”
다시 찬물에 몸을 맡겨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떨렸다. 욕탕에 들어가 수건에 대충 물을 묻히고 등 부위에 가져다 댔다. 알싸한 통증과 등을 마비시키는 물의 온도가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등에 묻은 핏물들을 닦아 내고 구급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남자 역시 전에 본적이 있기 때문에 시키는데 한결 수월했다.
“없어?”
“없다.”
목욕탕에는 구급도구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없었다. 일단은 내려가야 했다. 의류매장이 있는 곳이라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래층에는 음식점이 있는 곳이니 충분히 있을 법했다.
“그럼 내려가자.”
건물도 깨끗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옆에는 남자가 있었고, 옥상에는 놈이 있었다. 이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다. 천천히 활동반경을 넓혀가며 은혜들을 따라 잡아야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세상이 돌아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을 멍하니 보며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돼버린 걸까.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작은 강아지를 쫓아 뛰어나가는 은혜를 뒤쫓고, 태성이 놈들을 만나고, 우두머리가 되어버린 놈을 없애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모두와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의 최종 목표 지점이 있는데, 자꾸만 멀어져만 갔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아빠가 살아있을까. 엄마는? 두 분 모두 제주도에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늦어버린 걸까.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수많은 일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들도 수 없이 많았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와 생사를 같이 했던 사람들 역시…… 이제는 없다. 그런 사람들의 몫까지 힘내야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과연 이 여정의 끝은 있는 것일까. 길고 긴 영화 같은 현실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죽어야만 끝나는 걸까. 어둡고 긴 터널을 무작정 달리는 기분이었다. 끝나지 않는 미로에서 계속 방황하는 기분. '희망' 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기는 할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은혜…… 은혜는 이제 힘들 것이다. 태성이 놈에게 당한 상태라 가망이 없었다. 만약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면…… 앞으로 우리 인간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고 싶다. 죽기 싫다.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하게 죽어버릴 수는 없다.
“?”
눈을 뜨니 흰색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뱃가죽을 따뜻하게 받쳐주고 있는 옷 더미들을 대충 치워내고 몸을 일으켰다. 찌릿. 낯선 통증이 등에서 느껴졌다. 슬쩍 손을 뻗어 등에 가져갔다. 투박하지만 뭔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살갗 사이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실들이 느껴졌다.
“…….”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남자가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놈이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쉬고 있었다.
“읏.”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간 쌓인 피로가 상당했는지 몸 여기저기가 뻐근했다.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의류매장이었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며 주위를 살폈다. 창문 틈 사이사이로 밝은 빛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날이 밝은 것인가. 정말 오랫동안 정신을 잃은 것 같군. 다시 남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빵 봉지 여러 개를 뜯고 입에 넣었다. 텁텁하고 습한 빵의 감촉이 영 좋지 않았다. 입도 많이 메말라 있어 빵을 잘게 부수고 넘기는 게 조금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힐끗 고개를 돌려 곤히 자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최근 들어 자주 느끼는 거지만 남자의 행동이 온전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괴력이나 먹는 것, 지내는 방식에서는 괴물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이젠 완전히 변해버렸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건가…….”
은혜의 피는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인가. 그랬다면 태성이 놈 역시…… 아니지.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해서 뭐하겠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서둘러 움직이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감성에 젖어 굼뜨고 있을 시간이 없다.
“크르르.”
놈이 낮게 울며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나를 힐끔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영양 보충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야. 일어나.”
남자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
미세하게 눈을 뜬 남자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나는 다른 손에 들린 빵을 쥐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할 수단을 찾아야 수월할 것 같았다. 날이 밝을 때 빠르게 해결해야 했다.
“주차된 차들 좀 조사하러가자. 그거 타고 바로 따라 잡아야 돼.”
“……알았다.”
남자는 손에 쥔 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에게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다시 앞으로 넘어졌다. 쿠당. 낯선 소리가 귀를 강하게 때렸다.
“어, 야!”
말없이 땅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서둘러 팔을 부축하며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분명 평소와 같은 남자의 얼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분명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미세한 변화가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불안한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왜 그래. 어? 무슨 일이야.”
“아니다.”
“근데 왜 넘어져. 너 여태 이런 일 없었잖아.”
“아니다.”
남자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좌우로 비틀거리는 꼴이 영 말이 아니었다. 대체 뭣 때문에? 남자가 저토록 변한 것일까. 대체 왜…….
“크르르…….”
그때 놈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남자를 빤히 보더니 곧장 다가갔다. 놈의 양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살덩이들이 가득 잡혀 있었다. 남자는 놈이 가까이 갈수록 눈에 띄게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크르르…….”
남자 앞에 멈춰선 놈은 고기를 내밀며 서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가만히 보기만 할 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저 고기를 먹으라는 건가. 설마 그럼 여태까지 무리를 하면서 우리와 같은 음식을 먹었던 것인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은혜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인간이 되고 싶어서? 수만 가지 궁금증이 생겼지만 당장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랫동안 남자를 봐왔지만 저렇게 무방비하고 연약한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서 먹어.”
그래. 그게 해결책이라면 먹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남자는 우리와 전혀 다른 신체구조를 갖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지만 이미 사람의 기준을 넘어서 있었다.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고깃덩어리들을 받아 들었다. 그 느릿한 과정에서 남자의 눈이 번뜩이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난 정말 잘한 걸까.
남자는 빠른 속도로 고깃덩어리들을 먹어 치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다려주는 것뿐이었다. 남자라면 태성이 놈처럼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한 의지와 은혜에 대한 집착이라면 그래. 그거라면…….
“크…….”
놈과는 다른 소리가 났다.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던 남자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확연히 달라진 남자를 보며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같이 가.”
서둘러 남자를 따라 나섰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 바닥 곳곳에 널브러진 괴물들의 사체와 말라비틀어진 핏물들을 보며 큰 길 쪽으로 걸어갔다. 차는 큰 것이 필요한가. 아니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오라고 하며 우리 둘이 먼저 가는 것이 좋을까.
“놈은 알아서 올 것이다.”
“그렇겠지?”
평소의 남자로 돌아가 있었다. 입가에 진하게 묻은 피만 빼면 평소의 남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얘기가 빠르지. 적당히 열리는 차문을 보고 차키가 꽂혀 있나 봐봐.”
“알았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반대편 골목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 역시 그 반대편으로 이동하며 주차된 차를 점검했다. 놈은 바로 떠나지 않고 가운데에서 우리들을 두리번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든든하군. 저런 놈 하나가 끼치는 영향이 이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놈의 기세에 어딘가 매복하고 있는 놈들도 쉽사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
허나 내 생각대로 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어쩌다 차문이 열리는 것이 있는가하면 차키가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싸늘한 시체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제길.”
성과가 없다. 많은 차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온전히 굴러갈 차가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 놈이 서 있는 곳을 지나쳐 남자가 있는 골목으로 걸어갔다.
“응?”
남자가 어느 한 곳에 멈춰있었다. 무슨 일이 났다면 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설마 찾아낸 것인가? 서둘러 남자에게 뛰어갔다.
“찾았어?”
내 말에 남자는 말없이 하나의 차를 가리켰다. 시선을 옮기자 중형차들 사이에 주차되어 있는 소형차가 눈에 보였다. 보기엔 좁아 보이지만 일단은 굴러가기만 하면 됐다. 서둘러 소형차 앞으로 가 문을 열었다.
“제법인데?”
꽂혀 있는 차키가 왜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 것일까. 적당히 기름도 있는 상태였고, 최적의 조건이었다. 멀뚱히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하여 조수석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릉. 기분 좋은 엔진 음이 나면서 차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제 은혜를 찾아서 가기만 하면 된다.
“좋아. 사람들은 다 어디 있어?”
운전대를 꽉 잡고 남자에게 물었다.
“…….”
남자는 말없이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다. 단지…….”
“단지?”
“냄새가 지워졌다. 숨이 끊어진 것 같다.”
“어, 어?”
부르릉. 낮은 엔진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멀쩡히 돌아다녔던 은혜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고? 태성이 놈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나 컸던 것인가? 그럼 은혜를 저렇게 만든 것도 결국 나…… 내가 은혜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운전대를 꽉 잡고 멍청하게 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은혜가…… 은혜가 아니야. 그러나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었다. 기어를 넣고 운전을 시작했다. 남자는 말없이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앉아 있지 말란 말이야. 은혜는 너한테도 소중한 존재잖아?”
울컥하는 뭔가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눈가가 뜨거웠다. 이내 뜨거운 뭔가가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메시아께서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소리 하지 마! 운명 따위 개나주라고 하라고!”
“예전의 일을 기억 못하는가?”
“알아. 하지만…….”
“그 때부터 메시아께서는 죽어가고 있었다.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
난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도대체 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거냐고!
“어디야.”
“뭐가 말인가.”
“마지막으로 은혜를 느꼈던 곳 말이야!”
“늦었다.”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남자의 모습에 진저리가 났다. 아무리 괴물의 습성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격한 감정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이라면…… 정말 마지막이라면 우리도 곁에 있어줘야 해.”
“왜 그렇지?”
남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며 반문했다.
“은혜는 우릴 기억 못할지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니까.”
“난 기억한다.”
“그래야 은혜가 천국에 가서도 우리를 보며 미소 지을 테니까.”
“천국?”
남자는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은 남자를 어르고 달래는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은혜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마지막 장소를 말해. 네 기억에 남은 장소 말이야.”
남자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창문 너머로 다른 쪽을 가리켰다. 망설일 것 없이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여기라고?”
“그렇다.”
처음 우리가 몸을 숨겼던 곳이었다. 은혜를 쫓다가 태성이 놈들에게 붙잡힌 곳, 시청 앞이었다. 일행들이 머물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일단 눈으로 확인해두는 것이 좋겠지. 서둘러 차에서 내려 시청 안으로 걸어갔다.
바스락. 바스락.
조각이 되어버린 아스팔트 도로와 벽으로 추정되는 단단한 벽돌 조각들이 발에 밟혔다. 그리고 딱딱해져버린 고깃덩어리와 핏덩어리들이 보였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곳을 지나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괴물들에게 습격을 받아서 그런지 시청 안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수많은 시체더미들을 지나 우리가 머물렀던 곳으로 걸어갔다. 아무런 기분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몸을 돌려 굳게 닫힌 여러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문들을 하나씩 열어 확인했다. 민원실, 인사과, 복사실의 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복합기 위에 흰색 종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둘러 종이를 집어 들어 정신없이 글을 읽어내려 갔다.
‘남자와 함께라면 분명 이곳에 오겠지. 은혜가 많이 위독하다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우린 일단 부산항에 가기로 했다네. 거기라면 작은 단서라도 건질 것 같은 희망이 들었기 때문이지…… 자네가 이 글을 읽었다면 무사하다는 증거겠지. 우리 먼저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체하지 말고 부대로 돌아가게. 자네까지 무고한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어.’
짧지만 강렬한 문구. 아저씨의 글씨 같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겼어도 나 혼자 부대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반드시 모두와 함께여야만 했다. 그러기로 맹세했으니까. 어느 하나 같이 이루어내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 모두와 떨어져서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삶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함께해야만 했다. 망설일 것 없이 서둘러 시청을 나섰다. 목적지가 생긴 이상 한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 차를 출발시키려다 몸이 자동적으로 멈췄다.
“?”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없어져버린 남자를 깨달았다. 조수석에 멍하니 앉아 있을 남자가 없어진 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남자들 두고 바로 출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찌됐건 남자도 우리와 생사를 같이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제길…….”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이럴 때 말도 없이…… 당장 어디로 가야할지 먹먹했다.
“10분만 기다린다. 그래도 안 오면…….”
내가 남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아니, 혼자 부산항까지 가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처럼 모두와 함께 지내온 탓에 혼자라는 현실이 너무나 씁쓸하고 무거웠다. 난 잘하고 있는 걸까.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
기다렸지만 남자는 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먼저 가는 수밖에 없다. 내 수중에 있는 것은 약간의 빵과 두 개의 부엌칼이 전부였다. 이걸로 괴물 놈들에게 대항이나 할 수 있을까.
“아니야. 지금은 은혜가 위급하니까.”
그래, 망설일 시간 따위는 없어. 서둘러 차를 돌리고 부산항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부우웅. 차는 빠르게 미끄러져 나갔다. 10분 거리에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부산항이 있었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은혜와 모두들일까. 아니면 괴물 놈들일까.
어지럽다. 복잡하다. 그것이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너무나 크고 즐비한 건물들 사이에 배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더 앞으로 가야하는 건가. 약간은 느리게 차를 운전하며 건물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
오랫동안 사람들의 흔적이 없는 것 같았다. 거리 곳곳에는 말라비틀어진 사체와 짐작도 되지 않는 흉몰스러운 덩어리들이 바닥에 늘러 붙어 있었다. 생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폐허. 그야말로 폐허였다.
“이런 곳에 유람선이 오기는 할까…….”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은혜도 은혜지만 이쯤 되니 아빠의 말이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부산이 이렇게 변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
그래. 우리가 너무 늦어버린걸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아빠를 탓하기보다 우리의 행동을 탓해야 했다. 처음부터 집을 나와 바로 갔었더라면…… 아니야.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지도, 구하지도 못했을 거야.
부우웅.
가지처럼 넓게 뻗은 선착장 여러 개가 보였다.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거대한 배들과 휑하니 비어 있는 선착장이 전부였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랐던 유람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인간의 작은 흔적들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미 떠나버린 건가..”
은혜와 모두는 어디에 있는 거지? 유람선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건가? 혹시 남자도 그 쪽으로 가버린 건가.
“후…….”
차에서 내려 넘실거리는 바다를 가만히 바라봤다.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살아남지 못하는 걸까.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혹시 모두들 부대로 돌아간 건가. 간발의 차이로 모두와 엇갈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잡생각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방향을 정해야 했다. 그러나 드넓은 사막에 버려진 것처럼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휘이잉. 거센 바닷바람이 온 몸을 때릴 때쯤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다시 가야겠지…….”
모두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차문을 열고 마지막으로 부산항을 눈에 담았다. 넘실거리는 바다 너머에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제주도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후…….”
돌아가자. 모두가 기다릴 거야. 모두가…….
“진성아.”
“?”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분명?
“진성아.”
선착장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건장한 체구의 한 사람이 보였다.
“진성아.”
그 단어와 목소리는 내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데 충분했다. 아빠를 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비들을 넘겨 왔던가.
“아…… 빠?”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눈물 나는 부자 상봉을 하고 싶었지만, 미련한 내 몸은 그 자리에 단단히 굳어버렸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그렇게 말한 아빠가 점점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아빠를 가만히 바라봤다. 전과 다르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아빠.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뚝. 일정 간격으로 들려오던 구두 굽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 아빠는 가만히 날 바라보다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미 출발했지. 자, 서두르자.”
“벌써?”
이상하다. 시간차가 그리 많이 났었나? 그럼 아빠는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거지? 눈을 껌뻑이며 천천히 다가오는 아빠를 가만히 주시했다. 두근두근. 생생한 오감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째서? 지금 내 앞에 오고 있는 사람은 아빠란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근데 엄마는?”
또 다시 발걸음이 멈췄다. 아빠는 아까와 같은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진성아 엄마는…….”
“어?”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땐 이미…….”
“이미…….”
“사람이 아니었어.”
어느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듣는 것은 역시나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구나 엄마는 이제 볼 수 없는거구나.
“더 이상 가족들을 잃는 것이 두렵구나. 어서 가자.”
스윽. 따스하게 손을 뻗는 아빠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래. 그토록 기다리고 염원하던 아빠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다.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잠깐.”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에 보이는 것은 아저씨와 은혜였다. 정신을 잃은 은혜는 아저씨의 품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되지 않아서…… 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지?
“아저씨!”
망설일 것 없이 아저씨에게 뛰어갔다.
“…….”
하지만 아저씨는 내게 어떤 표정도 비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아저씨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빠르게 걸어오던 아저씨는 이내 나를 지나쳐 아빠에게 곧장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왜 내가 아닌 아빠에게 곧장 가는 것일까.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나? 내가 살아있는 건 기쁘지도 않은 걸까? 은혜 때문에?
나를 지나친 아저씨는 아빠와 다섯 걸음 정도 앞에서 멈췄다. 아저씨의 우람한 덩치 때문에 아빠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살짝 옆으로 걸어가 아빠의 표정을 살폈다.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여기까지 왔군.”
아빠는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약속은 지키겠지.”
“물론.”
이 대화의 흐름은 분명 두 사람이 안면이 있다는 소리였다.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처음부터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접근한 것도?
“아저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우리 아빠랑 모르는 사이 아니었어요?”
“…….”
침묵을 지키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말 좀 해보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냐고요!”
“……미안하다.”
그 말만 남긴 아저씨는 아빠를 지나쳐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니, 처음부터 아저씨는 우리 모두를 속인 것이었나? 그럼 나에게 해답을 줄 사람은 아빠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빠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저씨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송병헌. 우직한 연구소 실장이었지. 그 일을 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야.”
무표정한 아빠의 얼굴과 아저씨의 뒷모습에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아닌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배신……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배신이라고 표현하나? 아니면 개 같다고 표현을 하나?
“아저씨가 연구소에서 일했다는 것은 알아. 하지만 아빠까지 그 일에 연관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아빠는…… 아빠는 단순한 연구원 아니었어?”
“진성아.”
그렇게 말한 아빠의 두 눈은 웃고 있었다. 평소 집에서 알고 지내던 가정적인 아빠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화아악. 오싹한 소름이 온 몸을 타고 돋아났다.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렴. 그런 한 밤중에 내가 어떻게 너에게 갈 수 있었는지를. 우글대는 괴물들 사이에서 온전한 내 모습이 수상하지는 않았니? 게다가 송 박사가 너희들에게 접근하는 타이밍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하지 않았니? 자기 몸 아끼지 않고 너희들을 돕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뭔가가 걸려 있지 않은 인간은 그렇게 행동할 수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 아빠는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뭔가에 씌인건가? 혹시 쌍둥이가 있나?
“그럼…….”
“맞아. 송 박사를 다루는 데는 은혜라는 샘플이 큰 몫을 했지. 자, 여기서 잡담할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꾸나.”
변해버린 아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아빠의 그것과 매우 같았다. 아니 내가 알고 있던 아빠가 맞았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아빠가 맞는 거야?”
그 말을 하며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원래 이것이 내 모습이란다.”
“전화로 우리보고 나가지 말라고 한 것도…… 문 바깥에서 몸조심 하라고 한 것도…… 여기까지 오라고 한 것도 모두 다 거짓말이라는 거지?”
아빠는 다시 옅게 웃으며 양손을 뻗었다.
“너희들은 소중한 존재야.”
그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아빠와 너무나 똑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부아아앙.
거친 소리와 함께 작은 보트가 멀어져갔다.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은 분명 아저씨일 것이다. 멍하니 멀어지는 보트를 바라봤다. 안녕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멀어져버렸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왜 일까.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우릴 속였던 아저씨인데…… 가차 없이 떠나버리는 아저씨인데…… 왜 일까.
“자, 어느 정도 간 것 같으니…….”
그렇게 말한 아빠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버튼이 달려 있는 리모컨을 꺼내들었다.

